My domestic travel/충청내륙

금동대향로 발굴미스터리

봉들레르 2011. 10. 27. 14:39

 

 

발굴 10년 금동대향로 上

서기 660년 ‘한(恨)많은 왕국’ 백제가 멸망한 이후 망국의 왕자 한 분이 일본으로 피란한다. 의자왕의 서(庶)왕자 41명 중 한 분이었다. 그는 일본 미야자키현 남향촌에 둥지를 틀어 백제마을을 가꾸었다. 마을사람들은 신다이(神門) 신사에 백제왕을 상징하는 신체(神體)를 모셔두고 이를 신성시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1993년 10월26일, 이 남향촌 주민들은 보자기에 싼 신체를 모시고 망명한 백제왕자의 고국이자 선대왕들의 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을 찾았다. 실로 1,330년 만에 이뤄진 고향 방문. 이들은 선대왕들을 위한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신체는 세습신관과 그 아들 외에는 절대 열어볼 수 없었다. 협의를 통해 이 신성한 신체는 김포공항 검색대마저 통과하지 않는 특전을 누렸다. 망명 백제왕자의 귀향 행사가 열리던 바로 그날, 바로 그 곁에서는 또다른 이벤트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능산리 절터발굴을 알리는 ‘개토제’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장비의 만행을 피한 백제의 혼=‘망국의 한’을 담은 백제왕자의 혼이 깨어났을까. 고유제와 개토제가 동시에 열린 지 17일 만인 12월12일, 1,330여년이나 잠자고 있던 백제의 정신이 홀연히 기지개를 켤 줄이야. 사실 이 발굴은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원래 이 이름없는 절터의 발굴은 92년 12월 윤무병 충남대 박물관장이 시굴조사에서 유구·유물들을 발견함으로써 시작됐다. 이 절터는 능산리 고분군(사적 14호)과 부여나성(夫餘羅城·사적 58호) 사이의 작은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원래 계단식 논이었는데, 능산리 고분군과 함께 백제고분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증가 추세에 있었다. 부여군은 이 절터 부근에 주차장을 마련하려 했고, 유구·유물 확인을 위해 사전시굴조사를 진행했던 것이다. 본격발굴을 위한 조사 예산을 따는 데는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 노태섭 과장(현 문화재청장)의 공이 컸다.

원래 92년 시굴조사에서는 건물터와 재를 비롯한 불 탄 흔적, 그리고 금속유물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건물터가 금속제품을 만드는 공방 정도의 건물로 판단됐지, 사찰터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굴단의 고민은 컸다. 당장 주차장 공사를 중단시킬 결정적인 유구·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가 발견되는데 고고학도의 양심상 그냥 공사를 강행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현 국립중앙박물관 유물부장)의 회고.

“시굴조사 결과 결정적인 중요한 유구가 없기에 그냥 공사를 강행했다면 그만이었죠.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뭔가 예감이 이상했던 윤무병 선생 등 전문가들이 ‘딱 한번만 파보자’고 건의했어요. 당시 노태섭 과장은 군말없이 수용했고, 2천만원이 넘는 발굴비를 배정했지요”.

그때 만약 “무슨 소리냐”며 중장비로 싹 쓸어 주차장을 조성했다면 우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이는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자행되는 유적정비에서 철저한 사전조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큰 교훈을 안겨주었다.

 

◇물구덩이에서 잡은 고고학적 ‘월척’=우여곡절 끝에 발굴이 시작됐지만 현장은 최악이었다. 발굴지역이 계곡부인 데다 항상 습기와 흘러내리는 물 때문에 이런 곳에 백제시대의 중요한 시설이나 유물이 묻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발굴단은 추위와 싸우면서, 발굴구덩이에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으로 물이 흐르도록 임시방편으로 고랑을 마련하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래도 조사지역은 여전히 물로 질퍽거려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12월12일 오후 4시30분.

발굴을 담당하던 김종만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사(현 학예실장)는 그야말로 발굴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월척’을 낚는다.

“물구덩이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드러났어요. 이상한 뚜껑 같은 것이었는데 그게 향로인 줄은 상상도 못했죠. 처음엔 광배편 같은 유물인 줄 알았어요. 꽃삽으로 천천히 노출시켜 나가는데 뭔가 예사롭지 않은 유물이 분명하다는 것만 느꼈죠”

김종만씨는 즉시 김정완 학예실장과 신광섭 관장에 보고했다. 신관장의 말.

“이미 인부들이 보았으니 보안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밤 사이에 도굴 등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야간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뭔지도 밝혀지지 않은 유물에 대한 입소문이라도 나면 작업에 지장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히 있어 인부들은 일절 참여 못하게 귀가 조치하고 학예연구직들만 모두 모여 오후 5시께 작업에 들어가 전등을 밝혀 놓고 8시 30분께야 완벽하게 향로를 발굴했지요”

한없이 쏟아지는 물을 스폰지로 적셔내면서 1m20㎝가량의 타원형 물구덩이를 손으로 더듬거리며 뻘같은 흙을 걷어냈다. 추운 날씨에 손이 틀 듯 시리고 아팠지만 그야말로 미친 듯 땅을 팠다.

“아!”. 발굴단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야말로 넋을 빼놓을 정도의 감동의 물결이었다. 비록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수습됐지만 아마도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유물.

“자, 다들 정신차려. 빨리 마무리해야 해”. 신관장의 명령에 발굴단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온전하게 발굴해 들어내 놓고도 사실 감상할 엄두도 못 냈습니다. 뭔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내 손으로 발굴해 냈다는 자부심보다도 작업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겨울 하늘, 총총한 별들. 가슴이 얼마나 벅찬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뒤에 가서야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는 원래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던 구유형 목제 수조가 놓였던 곳이었고, 향로는 칠기에 넣어서 묻었던 것임을 알게 됐어요. 정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사실이지요”

 

◇차츰차츰 드러나는 찬란한 백제의 역사=사실 작업인부를 모두 귀가시킨 뒤 야간작업을 택한 것은 1971년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 발굴의 재판이 된 셈이다. 세계 고고학 발굴사에 남아 있는 독일 슐리만 부부의 트로이 유적 발굴 당시 중요유물이 발견되자 바로 인부들에게 보너스를 주어 며칠간 강제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물론 중요 유물발굴은 슐리만 부부가 했다. 이 야간작업은 엄청난 발굴 때 혹 일어날 수 있는 불상사를 미연에 막기 위한 전통인지도 모른다.

수습을 끝내고 사진작업 등 연장작업을 마무리한 발굴단은 이 유물을 곱게 싸서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그제서야 유물의 올바른 모습이 드러났다. 신관장을 비롯한 발굴단의 일성이 터졌다.

“이거 박산로(博山爐·중국 한나라때 향로·박산은 중국인들의 이상향) 아니야?”. 이렇게 잘 만든 물건이라면 응당 ‘중국 것’이라는 문화패배주의가 은연중 배어나왔다. 하지만 중국 것은 이 ‘물건’처럼 섬세하지도, 크지도 않다. 분명 중국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진정 백제의 것이란 말인가.

발굴단은 미지근한 물에 담근 ‘면봉’(귀이개)으로 향로에 묻은 이물질을 닦아냈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그 자태를 드러내는 향로의 참얼굴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신선이 있는가 하면, 코끼리가 있고, 동자상이 있는가 하면 도요새와 호랑이가 있는 등 숱한 진금이수(珍禽異獸)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발굴 10년 금동대향로 下

“정말 기적이었어요. 1,300여년이나 지났는데도 녹이 슨 흔적도 없다뇨. 원래 청동제품도 시간이 지나면녹이 스는데, 이 향로는 오랜 세월동안 물속에 잠겨 있어 부식을 피한 겁니다” 다음날 새벽 부리나케 현장으로 달려간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숨도 멎는 듯했다. 향로는 10일간의 철저한 긴급보존처리를 마친 뒤 22일 현장설명회를 통해 공개됐다.

 

◇살아숨쉬는 듯한 용과 봉황=향로의 이름은 정양모 관장이 지은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였다.

“향로의 받침엔 龍, 꼭대기엔 鳳이 장식됐잖아요. 또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蓬萊·方丈·瀛洲) 중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향로는 크게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를 세분하면 뚜껑장식인 꼭지와 뚜껑, 몸체와 받침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뚜껑 꼭지는 봉황 한 마리가 턱 밑에 여의주를 안고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모습. 봉황의 목과 가슴에는 향을 피울 때 연기가 나가는 구멍, 즉 배연공(排煙孔) 3개가 마련돼 있다. 뚜껑의 정상부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琴), 완함(阮咸), 동고(銅鼓), 종적(縱笛), 소(簫) 등 5가지의 악기를 실감나게 연주하고 있다. 또한 뚜껑 전체가 4~5단의 삼신산의 형태이다. 신선들만 살고 있다는 전설의 중국 봉래산을 연상케한다. 이는 첩첩산중의 심산유곡을 이룬 자연세계를 표현한 것.

그곳에는 온갖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즉 74개의 산과 봉우리, 6그루의 나무와 12곳의 바위,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이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현실세계의 호랑이·사슴·코끼리·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지닌 16명의 인물상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물·동물상은 오른쪽~왼쪽으로 진행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몸체는 연꽃잎 8개씩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꽃잎의 중앙과 연꽃잎 사이 사이에는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돼 있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는 물고기·신조(神鳥), 신수(神獸) 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했다. 각 연판은 그 끝단이 살짝 반전돼 있는 게 얼마나 절묘한지. 하부 맨 아래 받침대 부분은 마치 용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받들고 하늘을 오르는 모습이다. 특히 승천하는 듯, 몸을 빳빳이 세운 격동적인 자세의 용은 백제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는 백미이다.

 

◇흥분한 한·일 언론=유물이 공개되자 12월23일자 주요 일간지는 향로기사로 도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언론들도 이 사실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며 흥분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향로는 물론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체 높이 62.5㎝가 넘는 이 엄청난 대형 향로가 발견된 예는 없었다. 그러니 능산리 출토 향로는 분명 세계 최대의 금동향로였다. 향로는 인도·중국 등 동양 여러 나라에서 냄새를 제거하거나, 종교의식을 행하거나, 아니면 구도자의 수양정진을 위해 향을 피웠던 그릇. 중국에서는 훈로(薰爐) 또는 유로(鍮爐)라고도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백제의 이 금동향로는 중국의 박산 향로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해석한다. 박산(博山)은 중국 동쪽에 불로장생의 신선과 상서로운 동물들이 살고 있다는 상상의 이상향. 박산향로는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박산, 즉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향로를 말한다.

향로는 중국 전국시대 말에서 한나라 초인 기원전 3세기대부터 만들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박산향로로 부르게 된 것은 남북조 시대인 6세기쯤부터였다. 그렇다면 이 향로는 언제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과연 백제가 만든 향로인가 등 갖가지 궁금증을 낳았다.

발굴단은 언론에 공개할 당시 6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고 밝혔고, 당시 아울러 일본의 모 학자는 5세기 말~6세기 초 설을 주장했다.

그후 백제의 불교예술전성기와 도교가 융성할 시기가 부여에 천도한 후 안정기를 맞은 7세기대 전반기에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어 제작 역시 중국산이라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다만 발굴 당시의 모습을 볼 때 백제가 패망할 당시 긴급히 묻고 떠났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일치하고 있다.

 

◇중국향로 수준 뛰어넘는 세계 최대·최고의 걸작=1995년 발견된 창왕명석조사리감(昌王銘石造舍利龕)은 금동대향로의 제작 연대를 추론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이 사리감 제작시기가 위덕왕 때(서기 567년)임이 밝혀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리감은 목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심초석(心礎石)에서 발견됐다. 이로써 그때까지 공방으로 추정하던 건물터가 사실은 백제왕실의 명복을 비는 사찰 터였음을 밝혀낸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향로가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후의 백제왕들 내지는 최고의 귀족급 무덤들이 있는 능산리고분군과 접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향로를 받치고 있는 용의 힘찬 기상과 용의 발톱이 5개라는 점은 백제왕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중국 천자를 상징하는 용의 발톱이 5개, 우리나라 임금은 4개, 일본은 3개라는 설이 고건축 전문가들 사이에 그럴듯하게 퍼져 있다.

이제 조심스럽게 추론하자면 이 향로는 어디까지나 중국 박산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 오히려 중국의 수준을 뛰어넘은 작품임이 분명하다.

연대는 역시 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6세기 후반, 즉 위덕왕(재위 554~597년)때 만들어 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향로의 해외반출 절대불가’=금동대향로를 둘러싼 일화 한토막. 지난해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념하는 ‘국보급 유물 교환 전시전’을 열 때 일본측은 일본에 전시할 우리측 보물 중 백제금동대향로를 첫손으로 꼽고 이 유물이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해외전시를 위해선 문화재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게 당연한 이치.

그런데 위원회에 참석, 한·일양국의 교환유물 목록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안휘준 선생(서울대 교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됩니다. 우리도 해외전시를 금지시킬 중요한 유물 한 두 점은 보유해야 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와 임금님의 초상화인 영조어진은 안됩니다”. 이난영 선생(동아대 명예교수) 등도 ‘해외반출불가론’에 합류했다. 일본의 경우 이른바 천황의 초상화 등 천황 관련 유물은 해외전시를 불허한다. 전시 포스터 모델로 ‘백제금동대향로’ 사진을 놓고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치려던 일본측이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그만큼 일본도 백제금동대향로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굴 10년이 지났어도 아직 이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오는 11월 13~15일 대전과 부여에서 발굴 1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다. 이번 기회에 베일에 싸인 백제금동대향로의 신비를 한꺼풀씩 벗겨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관 련 기 사] 숱한 화제·이야깃거리 낳아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가치만큼이나 숱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다. ‘10·26 개토제 및 고유제’ ‘12·12 발견’이라는 얄궂은 탄생사도 비운의 백제역사를 닮았고, 그 이름을 둘러싼 논쟁도 만발했으며 역동적인 봉황·용 조각은 “요즘 대통령의 고유문양을 바꿔야 한다”는 논의까지 일었다.

정양모 당시 중앙박물관장의 회고. “향로 꼭대기, 역동적인 봉황문양을 보고는 ‘대통령의 문양’을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향로 봉황과 비교하면 대통령 봉황문양은 어쩐지 맥빠진 느낌이 들잖아요. 그래 장관에게 ‘좀 바꾸는게 어떠냐’고 제안했는데 그 뒤로 흐지부지됐어요”. 어느 전문가의 솔직한 말.

“어때요? 대통령 상징 봉황 꼬리를 보면 꼭 공작꼬리 같잖아요? 백제대향로 같은 역동적인 봉황이나 용을 보면 꼭 살아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봉황이나 용은 임금이 선정을 베풀 때 출현하는 상서로운 동물. 그러니 요즘과 같은 난세에 한번 대통령의 봉황문양을 백제향로의 힘찬 봉황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발굴 향로가 ‘백제금동대향로’라는 이름을 얻은 사연도 재미있다. 발굴단은 신선사상의 영향을 강조하며 ‘용봉봉래산대향로’로 이름 붙이려 했다. 그러나 불교미술 전공자들은 향로 몸체에 연꽃문양이 있으며, 뚜껑에 장식된 74개의 봉우리는 불교의 성산인 수미산으로 보았다. 결국 ‘수미산(須彌山)향로’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도 골치아프니 문화재위원회가 “차라리 ‘대(GREAT)’자를 붙여 금동대향로로 하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조용중 전주박물관 학예사는 역시 상상의 별천지 삼신산(三神山)을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향로의 인물상을 보면 낚시하는 자, 멧돼지를 향해 활을 당기는 자 등의 장면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사상과는 다르다는 것. 또 바위 위에서 명상하는 자, 머리감는 도사 등은 신선사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선사상에 빠진 진시황제가 순행(巡行)때 동남동녀를 데려고 다녔는데 이 향로에서도 코끼리를 탄 신선은 바로 그런 동자(童子)가 아닌가. 조용중씨는 “악사들의 머리모양을 볼 때, 머리를 땋아 뒤쪽으로 틀어 얹어 한가닥으로 늘어뜨린 백제 처녀들의 헤어스타일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신광섭씨는 “무왕(636년)이 연못을 만들고는 연못 속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면서 “백제향로는 삼신산 중 바로 그 방장산을 모방한 것이 아닐까”하고 추정하고 있다.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관 련 기 사]허망한 백제멸망 상징

왜일까. 그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왜 사찰의 공방지 바닥에 있는 나무물통에 은닉된 채 발견됐을까. 발굴을 총지휘했던 신광섭 당시 부여박물관장의 추측.

600년 무렵 창졸간에 나·당 연합군의 약탈·유린이 시작되자 스님들은 임금의 분신과도 같은 향로를 감춘다. 그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며칠만 숨겨 두면 괜찮을 것이라는 요량으로 황급히 향로를 공방터 물통 속에 은닉하고는 도망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조국은 허망하게 멸망한다. 나·당 연합군은 백제 임금들의 제사를 지낸 절을 철저히 유린한다. 절이 전소되고 공방터 지붕도 무너진다. 백제의 혼을 담은 ‘대향로’도 깊이깊이 잠든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과연 무엇인가.

향로가 발견된 지 2년 만인 1995년, 이 절터 목탑지 밑에서 또하나의 깜짝 놀랄 유물이 발견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조사리감’. ‘昌’은 27대 위덕왕(재위 554~598)의 본명. 명문은 위덕왕 13년(정해년·567년)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따님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다.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재위 523~554)은 한성백제 몰락과 공주 시대의 정치적인 위기를 극복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맡는다. 그는 불교를 백제중흥의 기반으로 삼는다. 그러나 성왕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뒤를 이은 위덕왕은 아버지를 기리며 국가적 추복불사(追福佛事)의 일환으로 이 목탑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기단만 남아있는 이 목탑지를 발굴하다보니 이상한 현상이 목격됐다. 목탑의 심주(心柱)가 도끼로 처참하게 잘려 있었고, ‘창왕’ 명문 사리감도 비스듬히 넘어져 있었다. 이는 절을 유린한 적군들이 목탑의 사리장치를 수습하려 마구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 틀림없다.

스님들은 조국이 멸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터. 그만큼 백제가 강대국이었다. 642년, 의자왕은 신라 미후성을 비롯, 40여개 성을 함락시키는 등 신라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오죽했으면 651년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그만 괴롭히고) 빼앗은 신라의 성을 돌려주어라”라고 의자왕에게 조서를 내렸을까.

신광섭씨는 “막강한 백제는 외교실패와 내부갈등으로 속절없이 멸망했다”면서 “나무물통 속 금동대향로는 바로 그 비운의 왕국 백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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