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Silk road(2010.Jul.)

[스크랩] Re:<실크로드의 악마들>....

봉들레르 2010. 8. 30. 20:49

‘제17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 
 
   
 
 
3) ‘제17굴’- ‘장경동(藏經洞)’의 발견

 그러나 이런 자연스런 명성보다도, 정확히 한 세기 전에 일어난, 한 드라마틱한 사건은 그 동안 격변의 역사 속에서 잊혀져 가던 뚠황을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이목을 받게 만들었다. 이는 실크로드가 가진 강열한 매력과 뚠황 석굴의 은밀한 이미지가 합해져서 상승작용을 하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치 금광을 찾아 ‘엘도라도’를 찾아 헤매던 시절처럼, 많은 호사가들을 사막으로 몰려들게 하여 ‘보물찾기 붐’을 일게 하였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닌 ‘제17굴’, 즉 속칭 ‘장경동(藏經洞)’ 유물의 발견을 말하는  것인데, 이미 너무나 알려져 있어서 별로 신선할 것이 없는 그 사건을 다시 들먹이는 것은 혜초란 위대한 세계인을 따라 나선 우리의 여행과 깊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북위시대의 삼존불.
 
  그럼 왜 이런 세계 최대의 유물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가 20세기 초에 홀연히 나타나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것일까?

 그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 하나는 11세기 고비사막 건너에서 일어난 서하(西夏)왕조가 침입한다는 소문이 뚠황에 퍼지자 약탈을 두려워 한 승려들이 장시간의 토의 끝에 손타기 쉬운 불상, 경전, 회화 종류 등을 한곳에 모아놓고 그 입구를 밖에서 밀봉하여 흔적을 없애 버리고 피난을 떠났다는 것과 또 하나는 10세기 카슈가르에서 일어난 이스람의 카라한 왕조가 서역남로의 코탄까지 밀려들어오자 역시 약탈과 훼손을 두려워하여 역시 입구를 봉한 다음 피난을 갔다는 설이다. 그러나 전란이 지나간 뒤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 감춘 사실 자체가 잊혀져 버렸다. 그러니까 어느 설이 사실이든지 장경동 유물의 시대적 하한선은 적어도 약 11세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것이니 제작년도로 가치를 따지는 골동품적 가치는 천문학적 숫자에 가까운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이 출토된 막고굴 17동굴.

 그렇게 천년의 침묵이 흐른 뒤, 1900년 6월 22일 홀연히 드디어 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었던 그 유물들은 기연(奇緣)을 만나 드디어 햇빛을 보게 된다. 도교의 태청궁(太淸宮) 도사 왕웬루[王圓?]에 의해, 한 석굴에서 비밀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 발견 일화도 또한 드라마틱하여 듣는 이들로 하여금 몽환의 세계로 잡아끌게 하는 마력이 있다.
 
 왕도사가 인부를 사서 한 석굴을 수리하던 중에 벽 안이 빈 것을 발견하고 벽을 뜯어보니 사방 3m의 방이 나타났는데 그 속에는 흰 천으로 쌓인 물건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설은 왕도사가 사경생(寫經生)을 한 사람 고용했는데 그가 일하는 자리가 마침 제16굴의 입구였었다. 그는 사경을 하면서 틈틈이 마약을 피웠는데 그 연기가 벽 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두드려 보니 벽이 비어 있었기에 허물어 보았다는 것이다.

 이쯤해서 당연히, 그럼 그 석굴이 어떻게 생긴 구조였기에 천년이란 시간 속에서 인간의 눈길이 닿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약도를 참고해서 독자제위도 그 유명한 석굴 속으로 들어가 우리의 혜초스님의 체취와 아울러「왕오천축국전」의 묵향을 맡아보기로 하자.

 문제의 석굴은 북단 근처 3층 누각으로 된 1층에 있어서 찾기는 어렵지는 않다. 제 16굴은 상당히 넓고 크다. 복도를 따라 가다보면 양쪽으로 보살상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한 가운데는 약10m 하는 본존불이 자리 잡고 있다. 사방의 벽화는 전체적으로 푸른색을 띠고 있는데, 서하(西夏)시대 새로 덧칠해서 그린 것이라는 안내인의 말이다. 사주였던 뚠황은 토번에서 해방되어 잠시 당조에 귀의하였으나 곧 당조가 망하자 금산국(金山國)이란 이름으로 독립적인 왕국 행세를 하였으나 후에 송나라 때 오르도스 지방에서 건국하여 남으로 내려온 서하왕국에게 1034년 병합되고 만다. 그러나 서하도 실크로드를 중요시 했고 또한 불교를 장려했던지라 뚠황은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이 제16굴은 개창은 그 직전인 당나라 말기 당 선종(宣宗) 때 때였다. 70년간의 토번(吐蕃)의 지배에서 막 벗어난 때였다. 파미르고원 너머의 소발율국[小勃律國, Gilgit]으로부터 뚠황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전 지역을 장악하며 막강한 군사력을 떨치던 토번제국이 붕괴를 시작할 때였다. 바로 혜초가 뚠황을 지나간 직후였다.

 막강하던 토번이 내부적 갈등으로, 마지막 임금인 랑다르마가 암살당하고 이어서 벌어진 내전으로 쇠약해지자, 라싸에서 후원군이 오지 않는 것을 기회로 호족이었던 장의조(張議潮)가 반기를 들어 토번군을 몰아내고 뚠황을 수복하고는 당으로의 귀의를 선언하였다. 모든 자료들은 뚠황의 수복을 당 선종(宣宗) 대중(大中) 2년(848년)으로 보는 것에 이의가 없다. 그러니까 뚠황이 토번에게 점령당한 기간은 약 70년으로 계산된다. 이에 당에서는 크게 기뻐하며 장의조를 ‘귀의군절도사(歸依軍節度使)’로 임명하여 뚠황의 통치를 위임하였는데, 장의조는 수복기념으로 당시 제 16굴을 만들었다. 

 제16굴의 입구에서 5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오른쪽에 작은 입구가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제17굴인 장경동의 입구이다. 입구 옆에는 흰색의 조그만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 아래에는, ‘C 151’, 즉 장따치엔[張大千]의 분류번호가, 위에는 ‘만당(晩唐) 821/900AD’라는 연구소의 분류번호가 쓰여 있다. 그 유명한 장경동 안은 어두웠고 생각이상으로 상당히 좁았다. 준비해간 손전등으로 비추어보니 방 가운데, 한 선사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드러난다. 바로 홍변대사의 소상(塑像)이다. 그리고 그 뒤의 벽에는 보리수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오른 쪽으로는 커다란 부채를 든 비구가, 왼쪽으로는 지팡이를 든 풍만한 몸집의 여인이 각기 좌우로 서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으로 앞의 소상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은 구도를 하고 있지만, 가운데 있는 이 소상이 제17굴의 비밀을 쥐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이상 안에서는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이 없다. 역시 홍변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문헌적인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이야기를 다시 뚠황이 수복되었을 때로 돌리자. 장의조는 토번군을 몰아낸 후 먼저 장안에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았는데, 이 때 의논 상대자가 바로 막고굴의 주지였던 고승 홍변이었다. 당시 장안으로의 길에는 아직 토번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이 많았던지라  위험부담이 있었기에 홍변의 현직 승려 제자들이 이일을 맡았다. 고생 끝에 장안에 도착한 이들 사신 일행은 황제를 만나 뚠황의 수복사실을 아뢰었다. 이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여 장의조에게 ‘귀의군절도사’를, 홍변에게는 ‘하서도승통(河西都僧統)’이란 벼슬을 내렸다. 황제에게서 큰 벼슬을 받은 장의조는 그 공을 홍변에게 돌려 그를 위해 석굴을 만들어주었는데, 그 것이 천년 뒤에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경동이 된, 즉 제17굴이란 일련번호가 붙여진 바로 그 석굴이었다. 물론 장의조 자신도 제156굴을 파서 그 벽에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라는 거창한 개선행진 벽화를 그리게 한 것을 보면 한 개인을 위해 석굴을 만드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던 듯하다.

 문제는 어떤 석굴의[母窟] 복도에서 연결된 일종의 부속실로[子窟] 만든, 그런 종류의 석굴은 전 뚠황석굴을 다 뒤져도 실례가 없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천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특수한 석굴의 제작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아니면, 만약 그 입구만 교묘하게 가려진다면, 그런 곳에 석굴이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기에, 앞에서 이야기한 피난사건이 지난 후에, 그  막대한 유물을 감춘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뚠황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면, 타인들이 그 장소를 찾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켜보았던 홍변대사의 소상은 왕도사가 유물을 팔아먹으려고 제17굴을 들락거릴 때 거추장스러웠는지 모굴(母窟)인 이웃 제16굴로 옮겨 놓았었는데, 근래에 연구소 측에 의해 도로 제 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왕도사가 몰래 장경동의 유물들을 처분한다는 소문은 바람결에 온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로 퍼져 나갔다. 그리하여 1905년 먼저 러시아의 오브르체프가 와서 두 다발의 문서를 가져간 다음, 1907년 3월 12일 영국 국적의 스타인(A.Stein, 1862~1943)이 찾아왔다. 그는 13세기에 이곳에 와 「동방견문록」에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Marco Polo) 이후 처음으로 이곳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 첫 서구인으로 다음과 같은 감회를 남겼다. 

 비록 외관이 몹시 붕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동굴사원들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성소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더욱 그 인상을 깊게 한 것은 일년에 한번 있다는 축제일, 즉 5월 중순에 열리는 석가모니 붓다의 탄신일에는, 전 돈황의 주민 수 천명이 이 성지에 모여들어 축하행사를 여는 광경이었다.

 스타인은 모래 폭풍을 무릅쓰고 뚠황에 도착하였다. 스타인이 뚠황에 가기로 결심했을 때만 해도 그곳에서 연구나 발굴작업을 할 생각이 없었다. 중앙아시아 탐험의 선두주자였던 러시아 장군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는 이미 1879년 뚠황을 찾았고, 헝가리 지리탐사대원들도 뚠황석굴을 방문한 다음 스타인에게 한번 찾아가볼 곳을 권유하기도 했었기에 그래서 그는 단지 그 유명한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뿐이었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했을 때 소문 속의 그 석굴은 닫혀 있었고 왕도사라는 사람은 만날 수조차 없었다. 당시에도 석굴에는 경비를 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젊은 불교 승려였지만 친절하게도 자기 암자에 있던 필사본 몇 개를 스타인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스타인은 그것들이 대단히 뛰어난 가치가 있는 고문서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는 중국인 조수에게 탐문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석굴에는 확실히 많은 분량의 문서들이 있는데 지방 관청의 지시로 왕이 자물쇠를 채워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래서 왕도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남은 시간을 뚠황으로 올 때 보았던 성벽과 고탑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그는 고탑의 잔해에서 글자가 적힌 판자를 발견하여 그곳이 2천 년 전에 축조된 거대한 성벽 중 서쪽 일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일 동안의 발굴 끝에 마침내 중국의 수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던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의 잔해와 옛 보급창고 유지를 찾아냈다. 

  1907년 5월 21일, 마침내 스타인은 석굴 근처에서 문제의 도교승려를 만났다. 하지만 첫눈에 스타인은 그가 결코 만만치 않은 느낌이 들어 중국인 조수 장과 함께 서서히 그의 신뢰를 얻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유명한 현장법사의 이야기를 꺼내 왕도사의 호감을 얻었다. 왕도사의 거처에서 현장법사의 벽화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바로 효과를 발휘하였는데, 바로 그날 저녁 왕도사가 두루마리 하나를 법복 밑에 감추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렇게 점차로 석굴을 가리고 있던 장벽이 제거되었다. 드디어 스타인은 그 석굴로 들어가 왕도사가 밝혀주는 등불 아래에서 처음으로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을 스타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그 좁은 공간에서 본 광경은 내 두 눈을 끄게 뜨게 하였다. 흐릿한 불빛 아래 나는 필사본 묶음들이 정돈되지 않은 채 약 3미터 높이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후에 재보니 그 문서더미는 거의 500세제곱피트 분량이었다.

  그곳에는 대략 4만5천 종의 경전류와 관청의 서류들, 그리고 직물류와 회화류들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것들은 3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정치, 경제, 군사, 문화, 종교, 문학, 음악, 무용, 서예, 건축, 의학에 관한 귀한 정보들이 담겨 있는 것들이었다. 천년간이나 숨겨져 있던 것이기에 의심할 여지없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서고(書庫)’였던 그 석굴에는 한자, 산스크리트, 소그디아나, 티베트, 고대 투르크족의 룬 문자, 페르시아 그리고 오래 전에 사멸한 미지의 문자로 쓰인 수많은 문서들이 있었다. 또한  조로아스터교의 배교자들, 그리스도교의 역사와 이단자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제작 연대가 868년으로 확인된 「금강경(金剛經)」 목판본도 있었는데, 당시로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책으로 알려진 것이었는데, 이 책은 일곱 겹의 종이를 겹쳐대어 있고 첫 장에는 뛰어난 변상도(變相圖)도 붙어 있었다. 이 최고의 고적은 현재에도 대영관물관의 자랑거리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음해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Pelliot, 1878~ 1945)가 달려왔다. 당시 그는 28세의 약관이었지만 해박한 학식을 겸비했고 특히 중국어에 능했기에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프랑스의 중앙아시아 탐사대의 대장으로써 카슈가르에 왔을 때 소식을 듣고는 뚠황으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왕도사를 설득해서 장경동의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는 그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오늘과 같은 전통 명절[3월 3일- 삼짇날]을 하루 10시간씩 계속 문서가 가득 쌓인 석굴 속에서 사팔뜨기로 보냈다. 이곳은 사방 3m의 넓이의 좁은 방으로 3방향은 모두 이중삼중으로 책이 산처럼 쌓여있다. 지면에 바로 서지 않는다면 책을 다시 쌓을 수도 없다. 매우 피로하였지만 그러나 결코 이 하루를 후회하지 않는다.

 펠리오는 아직 남아 있는 문헌들을 대충 한번 훑어본 다음, 왕도사가 8년 동안에 수많은 문헌들을 빼돌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것들이 1만 ~ 2만 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앞서 다녀간 스타인이 중국어를 해독할 수 없었고 그의 조수 장은 불교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기에 그들은 상당수의 문헌을 중복 선택했고 더 귀중한 문헌을 일부밖에 추리지 못했던 반면 펠리오는 한문에도 능통했기에 석굴에 며칠동안 틀어박혀 알짜배기들만 골라내어, 남아 있는 유물들의 3/1에 해당되는 총 6천 종- 경전류 24상자, 회화?직물류 5상자를 챙겼다. 그리고 신중하게 유물만을 먼저 배편으로 본국으로 보내놓고는 그는 마치 빈털터리처럼 위장하고 그의 근무처인 베트남의 하노이로 돌아왔다.
 
 펠리오는 그 다음에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 중국으로 가서 견본으로 숨겨두었던 고색창연한 고서들을 안면 있는 학자들에게 보여주면서 감정을 의뢰하는 척 하였다. 이에 중국의 학계가 발칵 뒤집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만 남아 있는 것들을 북경으로 옮기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했다.

 귀국한 펠리오는 그 방대한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앞뒤가 잘려나간 짧은 두루마리의 필사본을 발견하고는, 이것이 바로 당의 헤림(慧琳)이 지은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이름만 전해지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란 여행기의 절약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는 혜초가 한국인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채였지만…

 다음으로 천불동에 나타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1912년에 도착한 오다니[大谷] 탐사대<19>들이었다. 그들도 왕도사가 따로 숨겨두었던 것들 중에서 대략 6백 종의 문헌을 받아갔다. 당시는 청 말기의 혼란기라 중앙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약탈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재미가 들린 스타인이 두 번째로 등장해서 여섯 상자에 필사본을 가득 담아 떠났고 이어서 러시아인 세르게이 올덴부르크가, 마지막으로 미국의 랭든워너(R Wanner)가 찾아왔다. 그는 심지어 한겨울에 동굴 벽에서 접착제가 묻은 천을 벽화에 발라 접착제가 굳으면  벽화를 떼어내는 방법으로 몇 개의 벽화를 훔쳐가기도 했다. 이런 방법은 독일의 르 코크(Le Coq)가 투르판 북쪽에 있는 베제크리그 석굴에서 많은 벽화를 톱질을 해서 절단하는 수법으로 강탈한 것과 쌍벽을 이루는 행위로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시대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잊혀진다. 하지만 그런 약탈 행위는 단지 한 한 나라, 한 세대에 대한 모독으로 그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런 행위는 역사적 감성에 가해진 상처와 같다. 한번의 패배가 영원한 정신적 고통으로 전화하는 것이라는 지적처럼 문화적 후진국들이 겪었던 상처들은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채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 중국이 세워지고 나서 그 후로는 중국 내에서 외국인에 대한 적대 감정이 거세졌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그곳에서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대신 모든 서양인들에게는 “와이꿔 꾸이쯔[外國鬼子]” 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만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이 날강도이냐 도굴범이냐 아니면 학자이냐를 따지기 전에 중국인들의 자세도 지적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과거에 당한 일들은 그렇다고 치고, 그렇게 서양 약탈자를 매도하면서도 천불동 막고굴의 제323호굴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석굴을, 예전도 아니고 바로 얼마 전인 1966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문화혁명 때, 그들 스스로 무참히 파괴했다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이 때 파괴한 유물에 대한 정확한 통계 숫치를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티베트에서 자행한 행동을- 85%에 가까운 사원들을 파괴한 행위- 미루어보아 또한 심지어는 전국의 공자(孔子)의 사당까지도 무차별 파괴한 것을 보면, 나머지 종교적 유물들은 말해 무엇하랴!

 장경동 유물강탈 사건의 당사자인 왕도사의 뒤처리 문제도 그렇다. 1900년에 장경동을 발견한 뒤 그는 스타인이 오기 전에 이미 7년 동안이나 값나가는 물건들을 임의대로 처분한 뒤였다. 그런 왕도사에게 중국정부는 사형을 언도했다지만, 그는 뇌물을 주고 무죄 방면되어 그 뒤로도 ‘유물 부로커’ 노릇을 해가며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막고굴 앞에 그의 부도탑(浮屠塔)까지 당당히 세워져 있다고 하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그런 행위가 지금도 ‘진행형’이라는데 있다. 자신들 스스로 고대유물을 파괴하는 행위는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대 유적은 대개 짚을 썰어 넣어 흙벽돌을 만들었기에 천연비료로는 최고라는 인식이 있는데, 특히 채색벽화를 그린 부분의 흙은 더욱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렇기에 유적이 우연히 발견되어도 신고하지 않고 우선 부셔버린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는 대부분이 이스람교도인 주민들은 고대 석굴이 발견되면 대낮에 석굴로 찾아들어가 몰래 벽화 속의 인물들을 긁어내는데, 특히 눈과 입은 무조건 파낸다는 것이다. 불교유적을 혐오의 대상이라 여기기도 하지만, 밤에 벽화속의 인물들이 살아나서 그들을 해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부터 중국당국은 현상금제도를 시행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종교관이 바뀌기 전에는 실효를 보기 힘든 현실이다. 자기의 조상들이 심혈을 기우려 만들어 놓은 유물을 단지 자기가 지금 믿는 종교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무참히 훼손하는 행위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인가에 대해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물론 흘러간 과거는 ‘만약’이란 가정을 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억지지만 이런 가정을 세울 수는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우리의 「왕오천축국전」의 운명에 대한 문제이다. 만약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기에, 앞뒤도 없는 두루마리 필사본 상태의 「왕오천축국전」이 산더미 같은 서류더미 속에 섞여 있었다면, 당시 그 누가 그것의 가치를 가려낼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기에 어쩌면 행초서(行草書)를 능히 읽을 수 있는 눈 밝은 학자의 눈에 띤 것이 다행이 아닐까하는 가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시양꾸이쯔[西洋鬼子]” 면 어떻고 “와이꿔 꾸이쯔[外國鬼子]”면 어떠하리… 만약 그의 눈에 띠지 않았다면, 최악의 경우 우리의 최고의 국보인 「왕오천축국전」이 휴지나 쏘시개 땔감으로 전락하였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그 뒤 중국의 당대 석학이었던 나진옥(羅振玉)에 의해 가치가 평가되고 1915년에 는 일본의 다카스키[高楠順次郞]가 혜초가 신라인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대일본불교전서」에 실리게 되고 1938년에는 독일의 동양학자 푹스(W. Fuchs)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그 후 최남선(崔南善)에 의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는 후일담은 후에 ‘혜초학’의 현주소 편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우리는 일단 길을 떠나야겠다. 길은 희미하지만 그러나 나그네라면 무조건 떠나야만 하지 않겠는가?

출처 : 한국티베트문화연구소
글쓴이 : 수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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