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Silk road(2010.Jul.)

8-5 향비묘(香妃墓)

봉들레르 2010. 8. 19. 08:16

  

박물관을 나와 향비묘로 간다.

멀리 차를 세우고 백양나무사이로 들어가니 향비묘가 나온다.

 

카슈가르시 동북쪽 5㎞ 거리에 있는 이슬람교식 고대 건축군으로 1640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슬람 최고의 성자이자 지도자인 아팍호자와 카슈가르 이슬람교 백산파의 수장 및 그 후예들 72명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1956년 지진으로 58기의 묘가 남아있다.

 

제 1대는 阿吉買買提 玉素甫霍加이지만, 그 장자인 아팍호자가 더 유명하여 전체 능묘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또한 청조 말기 건륭제의 “香妃”가 묻혔다는 전설에서 “향비묘”라고도 불리운다.

향비묘입구 좌측에는 보수작업이 한장이다.

보수작업도 오래된 느낌을 갖게 하려고 애를 쓴다

청색의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한 정문을 통과하기 전에 

위로 올려다보니 위구르어 문자같기도하고 기하학적인 문양같기도한 장식이 눈길을 끈다 

조금더 올려다 보아도 지금까지 이런 독특한 형태의 장식을 본적이 없다.

이럴때는 위그루어를 알었으면 하고 후회를 해 본다.

 

정문우측에는 여러가지의 안내판이 있다

향비묘 평면도 

정문 왼쪽

정문 벽돌에 남은 위구르 여인네들의 손자국이 깊게 파여 손때가 묻은 상태로 남아있는데

이것은 오랜 세월 여성들이 청진사 문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사원 안을 바라보며

기둥을 손톱으로 긁은 흔적이라고 하니 그네들의 쓰라린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여성들에게 가혹해 보이는 것만 같은 이슬람교는 위구르족의 정신적인 지주이며 삶 그 자체인 것 같다.  

 

 

 高低寺院( Upper and Down Mosque)이라 불리는 이 사원이 돋보이는 이유는 아래쪽(Down)사원의 기둥이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로 되어있으며 마치 불교사원의 단청처럼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채색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상징인 반달 

초승달의 의미는 이슬람에서 "진리의 시작"인데 깜깜한 그믐이 지나고 처음 떠오르는 달이 초승달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을 믿는 국가들의 국기에는 초승달이 많이 들어간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코모로                                                     튀니지
몰디브                       아제르바이잔                                                    터키
말레이지아                                           파키스탄

  

  

 

 

들어와서 안에서 본 정문

 고저사원은 여름에는 위쪽(Upper)사원을 기도처로 사용하다가 겨울에는 입구의 이 작은 아래쪽(Down)사원을 사용한다 .

 

 


 향비묘 옆의 모스크로 이슬람교 유일신 코란 이맘 (imam) 을 읽고 제사를 지낸후에 묘지로 간다.

 아름다운 당초무늬가 새겨진 나무기둥 54개가 세워졌고 녹색융단이 깔려있고 메카방향의 벽감이 새겨져있다.

오아시스를 상징하는듯 녹색계통의 건물과 나무기둥의 무늬는 마음의 안정을 준다.

나무기둥의 질감과 채색이 멋들어졌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뿐만 아니라 처마 밑을 연결하는 작은 보 하나까지 이슬람식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영락없는 우리네 단청과 다르지 않다.

 

 아팍호자묘와 향비묘라고 동시에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는 높이 40미터에 아름다운 모자이크 첨탑과 원형 아치지붕이 궁전을 연상시킬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주위의 장미정원과 함께 어우러져 아주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며 

문루, 소예배실, 대예배실, 교경당, 주묘실 다섯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외부 벽면은 각종 도안과 무늬가 그려져 있는 녹색 타일로 붙여 놓아 햇빛에 반사되면 마주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다. 

향비묘 앞에서는 의상을 빌려주고 향비가 되어 사진을 찍어준다. 물론 돈을 받고

이여인도 향비에서 나던 향기가 나는지 확인을 해 볼껄

화려하게 치장한 낙타를 타고

잠시나마 향비가 된 여자

향비묘 건물입구에 양옆으로는 각종 문양으로 장식되어있다 

 

 

중국 청나라의 제6대 황제(1711~1799). 본명은 홍력(弘曆). 묘호는 고종(高宗). 건륭은 연호.

인도차이나, 대만, 티베트 등지를 평정하여 강한 국가를 형성하였다.

《대청일통지》, 《사고전서》 따위를 편집하도록 하여 청나라의 융성기를 이루었다. 재위기간은 1735~1795년이다

 중국 청나라 때 건륭제의 후궁이었던 향비는 ‘몸에서 좋은(보리수나무) 향기가 난다’는 이름을 가진

위구르족 여인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28년 간 화제의 여자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황제와 결혼을 한 후에도 위구르족의 전통복장과 치장을 고수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위구르족들의 향비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아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이 앞장서서 이 아바쿼훠쟈의 가족묘에다가 그녀를 묻어주었는데

그때부터 아바쿼훠쟈의 묘지를 향비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장군복장을 한 향비의 초상화.

건륭 시기에 궁정에는 이탈리아 선교사이면서 중국에 서양화법을 전한

유명한 화가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朗世寧)가 있었는데, 그는 여러 작품을 남겼다.

건륭제는 카스틸리오네에게 향비의 모습을 그리도록 했는데, 그 중 서양복장을 한 모습, 무장한 모습,

2개의 그림을 그려 궁궐 벽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카스틸리오네 작품으로, 투구를 쓰고 무장을 한

여성을 그린『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는 찬자(撰者) 불명의 ‘사략(事略)’이라는 글이 첨가되어 있다.

거기에 “향비는 위구르의 왕비로 자색이 뛰어난 인물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내가 나,

그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향비라 불렀다. 혹은 그녀의 아름다움이 북경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위구르 지역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신장위구르을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칭동링(清东陵)에 향비의 무덤에는 향비의 초상화가 4폭 있는데

차오푸상(朝服像, 옛날 군신이 조례 때 입던 예복을 입은 초상화)이 향비의 진짜 초상화라 볼 수 있다.

 청나라 때 도둑을 맞아 향비의 진짜 얼굴에 대해 역사적으로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으나

자오청원(赵成文)교수가 벗기유골 사진을 구해서 복원작업은 처음으로 완성했다 

 

드라마 황제의 딸이 건륭제와 향비의 이야기다

황제의 딸에서 향비역으로 나온 유단

몇년전에 총알택시로 촬영장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

 안에는 58개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다양한 색깔의 천으로 덮여 있다.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남자의 묘지는 여자의 것보다 크게 만든다.

따라서 향비가 살아서는 귀한 신분이었지만 고향에 돌아와서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묘지가 작게 만들어졌다

안으로 들어서니 크고 작은 무덤들이 가득했다. 울긋불긋, 알록달록 각기 다른 색상의 비단이 덮인 무덤만도 총 58개나 됐다.

 이슬람 전통에 따라 남자무덤은 여자무덤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었고 뒤편 사이사이로 보이는

아주 작은 무덤은 아이들 무덤이라고 했다.  

 1640년에 완성된 이 묘는 1948년 지진으로 묘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묘실이 파괴되었지만 1974년에 다시 복구하였다.

지금도 아바흐 호자 가(家)의 5대에 걸친 72명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다.

뒤편의 붉은 비단을 두른 관이 향비의 묘이다

천정의 둥근 돔이 17m이고, 높이가 31m로 이 묘는 내부에 기둥이 없이 정교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이 묘를 만든 호자의 묘가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 구석으로 향비가 묘가 있는데

다 붉은 비단에 휘감긴 채 안치되어 있다. 지붕위에 구멍은 영혼이 왕래할 수있게 한것이다.

 입구의 왼쪽에 향비의 시신을 운구할 때 사용했다고 하는 나무로 만든 가마가 놓여 있다.

아마도 향비가 정말 이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현지 웨이우얼족은 베이징에서부터 5100㎞에 이르는 머나먼 카스까지 1년이 훨씬 넘는 기간에 걸쳐

 향비 시신을 운구했다고 이야기한다

청나라의 사서에는 향비의 가족을 허쭤씨라고 기재하고 있다. 1758년 카스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삼촌 어써이와 오빠 투얼뚜가 반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청조에서는 그 공을 인정해 보국공으로 봉하고, 건륭 25년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베이징으로 초대했다. 이 때 향비는 26세였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아 처음엔 `귀인'으로 후에는 `용비'로 봉해졌다. 그녀는 황실에서도 이슬람 전통에 따라 생활하고 웨이월족의 전통 옷을 입었다. 향비는 입궁한 지 28년 되는 건륭 53년에 병사했다. 향비는 죽은 다음 카스로 옮겨지지 않고 하북성 준화의 청동릉에 묻혔다. 이 능을 발굴한 사람들에 의하면 향비의 관 위에 금색의 아라비아문자가 쓰여 있었으며 향비의 유골과 의복, 머리카락 등의 잔해가 발견됐다고 한다. 

 향비묘는 청에 정복당한 위구르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한 대리만족 수단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카슈가르에 향비묘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때로 신념은 믿음을 만들고 믿음은 또다른 신념을 부르는 법.

위구르인들에게 향비 설화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다.

 

 

 

 

 

 

 

 아치형의 돔 위에는 정교한 모양의 탑루가 있으며 탑루의 꼭대기에는 금빛 초승달이 도금되어 영롱한 빛을 반짝이며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요즘에도 카슈가르 사람들은 죽은 뒤에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한다.

그래서 모스크의 바로 옆에는 위구르족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는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크기가 큰 것은 어른의 묘, 작은 것은 아이들의 묘,

꽃 봉우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부부가 합장된 묘

 성묘 뒤쪽에 있는 여러 무덤 중에 파헤쳐진 무덤이 하나 있는데 위구르 사람들은 그 무덤을 아쿱 벡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청군이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불태웠다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다만 위구르인들의 좌절된 독립의지와 영광을 흔적을 부여잡기 위한 또 하나의 향비묘일 뿐이다.

어른의 묘 

향비묘를 나오니 

냉장고에  보관이 안된 음료수를 판다. 

 

이 위구르인들도 향비묘에서 무슨생각을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