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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리랑카의 시기리야(Sigiriya)

봉들레르 2010. 1. 1. 23:40

 

             스리랑카 - 시기리야(Sigiriya)

Y! 스리랑카(Sri Lanka)의 수도 콜롬보(Colombo)에서 5시간을 달려 시기리야에 닿았습니다. 지나온 곳은 내륙지방인지라 지난해 말 있었던 쓰나미의 흔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검게 탄 어깨에 삶을 짊어지고 차창 밖을 스쳐갑니다. 이곳은 4월14일이 새해 첫날, 말하자면 설날이니 5월 초면 우리로선 대보름 근방쯤 됩니다.
시기리야 ‘바위 왕궁’으로 오르는 계단은 끝이 없습니다. 계단을 오르며 ‘하나 둘 셋’ 세다가 200을 못넘기고 잊어버립니다. 가이드는 모두 1,200 계단이라고 합디다. 섭씨 30도에 습도까지 높으니 금세 구슬땀이 등을 간지르며 굴러내립니다. 힘이 들면 초입부터 뒤따라오는 남자에게 몸을 맡기십시오. 끌어주고 밀어주며 올라갔다 내려오면 5달러 달라고 합니다. 깎으면 2달러반입니다.
서울 남산만큼 높은 바위-높이가 200m로 사자바위(Lion’s Rock)라고 합니다-위에 올라 빨간 진흙벽돌 기초만 남아있는 성벽(城壁) 터에 걸터앉아 숨을 고릅니다. 그 거대한 바위 꼭대기에 세워진 왕궁. 계단을 이루며 평평한 바위 위는 어림으로 3,000평쯤 됩니다. 왕의 침실과 궁녀들의 방, 춤추는 곳, 수영장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중 제일 높은 곳에 왕좌가 있었다지요.
바위벽 따라 구불구불 홈을 파 만든 계단을 왕이 제 발로 걸어 오르내렸을 턱이 없겠지요. 추측이지만, 노예들이 메거나 업고 오르내렸겠지요. 바위 위 왕궁이라니, 미친 짓이지요. 하긴 피라미드든, 만리장성이든 ‘모든 유적은 독재자가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다시 쓰겠습니다. 총총.
#다시 시기리야에서
가이드가 들려준 시기리야에 얽힌 얘기는 이렇습니다. 5세기 말, 시기리야가 포함된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지역을 통치했던 왕에겐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천민 여자가 낳은 장남 카샤파(Kasyapa), 왕족 출신 둘째 마누라가 낳은 차남 목갈라나(Moggallanna). 카샤파는 왕족 출신 동생이 왕위를 차지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내쫓고 왕이 됩니다. 동생 목갈라나는 인도로 망명을 가지요. 카샤파는 동생의 보복이 두려워 아무도 쳐들어올 수 없는 곳, 바로 여기 길도 없는 절벽 바위에 성을 만듭니다. 여느 나라 신화와 전설처럼, ‘선의 축’인 동생 목갈라나가 군대를 끌고와 ‘악의 축’인 카샤파 왕은 죽고맙니다.
함께 온 일행이 이 신화를 나름대로 해석해 들려줍니다. 인도의 불교세력과 실론(스리랑카의 옛이름)의 토착종교 세력 사이의 싸움이라고요. 그는 목갈라나가 불경에 나오는 목건련, 혹은 목련존자라고 합니다.
내려와 다시 시기리야를 올려다 봅니다. 혹시 이 바위성은 왕이 쉬러다녔던 이궁(離宮)은 아니었을까. 카샤파는 신(神)이 되고 싶을 때 이곳을 찾았던 건 아닐까. 바위 벽에 석회와 꿀과 달걀을 입힌 뒤 그려놓은 500명의 미녀-프레스코 벽화로 이젠 18명의 모습만 남아있습니다-는 자신이 거느리려 했던 500명의 천녀는 아닐까. 바위에 굴을 뚫고 150개의 부처상을 모신 석굴사원(Cave Temple)이 있는 담불라(Dambulla)로 나오니 ‘왜 이렇게 늦었냐’는 듯 노을이 상기 얼굴을 붉히고 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풉니다. 창밖엔 어둠에 잠긴 정글 그림자만 무성합니다. 총총.
#담불라를 거쳐 캔디(Kandy)에서
담불라엔 사슴과 원숭이가 어슬렁거리는 바위산 석굴사원이 있습니다. 계단을 또 수없이 오릅니다. 5개의 동굴엔 저마다 다른 표정의 150개 부처가 앉거나 누워있습니다. ‘신들의 왕의 절(Deva Raja Vihara)’이란 동굴이 가장 오래됐지요. 15m쯤되는 부처가 누운 채로 평화롭게 열반에 들었습니다. 화순 운주사 와불이 떠오르더군요. 일어나 앉으면 세상이 바뀐다는 그 와불 말입니다. 여기라고 늘 태평성대는 아니었을텐데 우리처럼 그런 전설은 없습니다. 담불라 석굴엔 수많은 부처들이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동안 대덕고승들은 앉아 수행하고, 앉아 열반에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게 사람일진대 아, 저렇게 누워 열반에 들면 얼마나 편안할까요. 경내 돌확엔 연꽃도 부처 흉내를 내 가부좌를 틀고 떠있습니다.
굴 천장엔 스리랑카의 역사가 있습니다. 불교를 믿는 싱할리족(Sinhalese, 전체 인구의 74%)과 힌두교를 믿는 타밀족(Tamil) 사이의 전쟁이 벽화로 남아 있습니다. 싱할리족은 인도아리안계이고 타밀족은 주로 영국식민지 때 품 팔러온 인도에서 건너온 드라비다계 인종입니다. 두 민족의 분쟁-아쉬우나마 평화협정을 맺었습니다만-은 아직도 스리랑카의 고민입니다.
캔디로 와서 짐을 풀었습니다. 저녁 늦게 부처님의 치아를 모셨다는 불치사(Dalada Maligawa:Temple of the Tooth)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19세기 초 영국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300년 동안 싱할라족의 수도였지요. 그래서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로 불립니다. 이곳 출신은 아직도 우리 신라시대로 따진다면 ‘진골(眞骨)’로 쳐줍니다. 날이 밝은 뒤 불치사를 다시 찾기로 했습니다. 버스를 오래 타니 피곤하군요. ‘밤이 목거지에 달아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하는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를 떠올리며 총총.
#캔디에서
불치사를 아침 일찍 다시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양손에 연꽃을 들고 무리지어 불치사를 찾습니다. 부처에게 올린 크고 작고 동그란 꽃접시. 아하, 그러고보니 제물 없이 찾아뵐 수 있는 신(神)은 없습니다. 굽은 허리로, 혹은 아이 목마 태워 나온 가족들이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신발을 벗어놓습니다. 사원에선 신을 신을 수 없습니다. 늙은이가 신발을 지켜줍니다. “투딸라(2달러)”입니다. 또 반바지 차림으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담불라의 석굴사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천을 빌려 치마처럼 둘러 다리를 가려야 사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치마는 1달러에 2개 빌려준다고 합니다.
어젯밤에도 맨발로 불치사를 돌아다녔지만 부처의 치아는 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는 자신의 이가 경배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골고다에 못박힐 때 입었던 옷과 최후의 만찬 때 포도주 잔이 그렇게 될 줄 몰랐던 예수처럼 말입니다.
하긴 부처의 치아를 본들 뭣하겠습니까. 예수가 그랬다던가요. “만지지 않고도 믿으라”고요.
Y! 그래요. 당신을 만지지 않고도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이곳의 부처는 모두 스리랑카 사람들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물론 당연한 일이겠지요. 총총.
#콜롬보(Colombo)에서
이곳은 사시사철 몬순입니다. 같은 몬순이지만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가 여행하기 제일 좋다고 합니다. 콜롬보의 노을은 우락부락합니다. ‘몬순’이 몰고온 먹장구름은 아름다움을 시샘해 지는 해를 자꾸 가로막습니다. 먹장구름 사이, 잠시 얼굴 디밀었다 이내 물러서는 홍시빛 낙일(落日). 어두움과 빛남이 서로 맞부딪쳐 뒹구는 콜롬보의 노을. 문득 사람살이도 그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보니 콜롬보의 노을이 안타깝도록 아름답습니다. 이곳 스리랑카의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그려보일 글재주가 없는 게 한스럽습니다. 첨부한 엽서를 보시고 짐작하시옵소서. 총총.
#추신
Y! 당신과 혹시 배낭을 메고 찾을 날 있을까 해서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배낭 메고 온다면 어떻게 다녀야지요?” “거, 웬만하면 서울에서 여행사 따라 오세요. 배낭 메고 왔다가 낭패볼 수 있으니까요.” 가야 여행사(www.kayatour.co.kr. 02-536-4200)에 4박5일짜리 스리랑카여행 상품이 있다고 합디다. 그래도 우기자, 가이드는 콜롬보 시외버스 정류장에 시기리야 가는 버스가 있다는군요. 시기리야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또 버스를 타고…. ‘툭툭이’(오토바이를 개조한 세발택시)는 대개 30분 이내의 거리만 타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상 타면 덜컹거리는 통에 엉덩이가 초주검이 된다는군요. 네발 택시요? 기사 딸려서 1㎞에 50센트 정도라는군요. 아무래도 이 엽신보다 제가 먼저 당신에게 도착할 것 같군요. 뒤늦게 도착한 엽서를 같이 보며 낄낄거리는 것도 재미있을 겁니다. 혼자, 그리고 같이. 총총.
〈스리랑카|윤성노기자 ysn04@kyunghyang.com
 

홍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실론 티의 나라 스리랑카.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더욱 번성시킨 이 나라는 대표적인 불교 국가답게 국화도 연꽃이다.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든지 불심을 느낄 수 있는 이 나라에서 부처는 고향에서 느끼지 못하는 안식을 구하며 ‘편안하게 누워’ 있는지도 모르겠다. <편집자 주>




수많은 프레스코화가 석굴 사원의 벽과 천장을 장식하고 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희미한 광원(光源)의 빛을 받은 무광택의 금이 보일 때까지는 몇 초가 걸린다. 피부로는 쾌적한 냉기가 느껴지고, 코로는 약간 눅눅한 석굴의 공기를 맡을 수 있다. 이것이 석굴 사원에 들어서면서 받게 되는 순간적인 인상이다. 몇 초가 더 흐르면 지나간 시대로부터 신비한 인사라도 하듯이 엄청난 크기로 평화롭게 누워 있는 부처상과 연꽃에 앉아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상, 그리고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는 채색화인 템페라로 뒤덮인 석굴의 둥근 천장이 화려한 전모를 드러낸다. 마치 자기도 모르게 어느 궁전의 보물창고에 이르는 비밀 문으로 들어선 느낌이다.

사람들은 기원전 2세기나 3세기에 지은 사원의 잔재를 보수해서 지금처럼 아름답게 꾸민 이가 12세기의 니산카말라 왕이라고 생각한다. 전시에는 늘 왕들이 이곳에 피난처를 마련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담불라의 석굴에서는 심지어 대관식도 행해졌다고 한다.

누워 있는 14미터의 거대 부처상

현재 석굴의 하늘을 덮고 있는 대부분의 템페라의 모습은 약 1천 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된다. 마야 부인의 태몽에서부터 시작해 악귀 마라의 유혹에 이르는 부처의 삶에서 나온 장면들을 보여주는 프레스코화 하나하나의 제작 연도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서로 다르다. 몇몇 전문가들은 가장 화려한 색조를 보이는 그림들은 20세기 초에 덧칠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 역시 보존된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그림의 제작 연도가 적어도 500년 이상 됐다고 추정한다.

사원에서 가장 큰 부처상은 14미터 길이로 첫 번째 석굴에서 바로 만날 수 있다. 불교의 창시자는 여기서 제자 아난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주고 있어서 편하게 누워 쉬고 있다.

이곳과 연결된 석굴에는 부처의 좌상과 입상, 사만과 같은 힌두교 신들의 모상(模相) 그리고 남인도 드라비다족의 침략을 피해 몇 년간 이곳 담불라의 승려들 사이로 몸을 피했던 신할리족의 왕 우풀반의 모상이 있다. 약 7미터 높이의 천장은 완전히 부처로 장식돼 있다. 석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을 커다란 대접에 모으고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땅 밑에서 산 위로 치솟아 흐르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강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물방울이라고 한다.

불교국 스리랑카 여행의 백미

담불라에서는 방문객들이 예를 갖춰 입장하는 것에 상당히 신경을 쓴다. 맨살의 어깨를 드러내서는 안 되며, 짧은 바지를 입고 다리를 드러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엄격한 사원 경비원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잠잖은 색조의 긴 옷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황금 석굴 사원에서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약 122미터 높이의 길게 뻗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특히 귀찮게 구는 것은, 바로 사원 입구의 계단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손에 잡히는 것이나 먹을 만한 것은 모조리 훔치는 것으로 악명 높은 원숭이들이다. 성소 밖에서는 날마다 새롭게 찾아오는 돈 잘 쓰는 관광객들을 기다리는 잡상인들과 뱀 부리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담불라는 스리랑카 여행에서 관광의 백미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어디에나 부처가 있는 듯하다. 담불라로 가는 도중이나 택시를 타고 짧게 섬을 돌아볼 때 특히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모터를 켜놓은 채 사원 앞에 서 있는 자동차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운전사가 잽싸게 뛰어나와 몇 초간 묵상을 할 때다. 이들은 기도가 끝나자마자 코코넛이나 몇 루피를 공양으로 바치고는 곧바로 떠난다.

택시 기사 칸드라는 “염불을 드려야죠. 누구나 운전 중에 안전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하고 말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례적으로 근처에 불교 성소가 없으면 가까운 기독교회나 힌두교 사원에서 간단하게 염불을 왼다. 이 또한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인 불교의 표현이다.

화려하게 채색된 14미터 길이의 와불이 신왕의 석굴을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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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Sigiriya]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유적지.
이곳은 6세기경 절벽 위에 세워진 사자산(獅子山)이라는 고대 성채의 유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채가 세워진 암석절벽은 경사가 급하며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어 있다. 정상부의 해발고도는 349m이며, 주변 평야를 기준으로 한 높이는 180m에 이른다. 477년에 카시야파 1세는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상부의 평지에 궁전을 세웠다. 정상에 오르려면 거대한 사자(sinha)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쳐야만 한다. 시기리야라는 이름은 사자산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 모양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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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  스리랑카의 SIGIRIYA(시기리야).
Kasyapa왕 시대에 18년 왕치에 7년동안 지었다는 데 한판의 큰 바위에 조각한 것입니다.
3개의 정원이 있고 물을 이용하여 만든 The Water Garden,돌로 만든 The Boulder Garden,
계단식 The Terraced Garden이 멋지게 펼쳐졌습니다.
코끼리, 사자, 코브라 3개의 동물상이 있으며 여름궁, 겨울궁, 5세기에 분수시설 까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The Mirro Wall에 비쳤다는 Fresco는 여체의 나신들이 즐비했습니다.
역사학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시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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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 지도 입니다. 문화삼각지대란 세 도시를 이어보니 삼각형이 되어서 그렇게 명칭으 붙였습니다.
고대 스리랑카의 문화 즉 불교 유적이 고스란히 숨쉬고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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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리야 록은 산정상에 왕궁터가 남아 있는데 그 모습 전체를 담을려면 항공기를 동원해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이후 보시는 시기리야 록의 전체 모습을 담은 사진은 모두다 항공기에서 찍은 사진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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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밑으로 보이는 잘 정돈된 건물들은 바위산을 오르기 위해서 입장을 하면
바로 나타나는 지상에 건설된 유적의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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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중간쯤에서 바라본 지상의 잘 정된 유적...
시기리야 록 으로 오르기 전에 넓게 정원처럼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조그맣게 관광객들이 오고 가시는 것이 보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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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면에서 찍은 바위산의 모습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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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중간쯤 보이는 광장의 유적지는 정상에 있는 왕궁으로 오르는 문을
사자의 발톱으로 장식한 입구가 있는 곳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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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사장가 입을 벌리고 있는듯한 전체 모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자입으로 들어가는 형상이었겠지요.
지금은 올라가는 계단과 발톱모양의 발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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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모습 입니다.
바위를 중간쯤 올라오다 보면 이렇게 정상에 있는 궁전으로 오르는 넓은 지역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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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문을 통해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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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바위로 오러는 곳곳에는 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설명이 지상에서 바위로 올라가는 순서대로 되지 않고 위 사자문 입구부터 된 것 같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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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옆구리로 길이 나 있습니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성을 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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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올라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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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바라다 본 모습.바위 옆으로 길이 나 있으며 길게 성을 쌓아서 사람들이 떨어지지 않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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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시기리야 록을 세계적인 명물로 만든 프레스코화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상에서 계단을 다 올라가서 바위옆으로 난 길이 나타나면 바로 바위에 그려진 18명의 여인들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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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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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남아 있는 왕궁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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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곳은 왕궁이 세워지기 전에는 수도승들의 수행터로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11년간의 역사가 끝난뒤 다시 수행승들의 수행터로 되돌아 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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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앉은 자리라고 합니다. 돌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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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mbulla에서 북동으로 22km 떨어진 Sigiriya에 위치한 거대한 바위 요새는
스리랑카의 주요 볼거리 중의 하나이면서 문화삼각지(그 외 Polonaruwa, Anuradhapura)의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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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이야기로는…
477년 후궁의 아들(? Palace consort) Kasyapa가 그의 아버지 Anuradhapura의 왕 Dhatusena를 폐위시키고 산채로 벽에 가두었다. Dhatusena에게는 복수를 맹세하면서 India로 날아간 아들(by his true queen)이 하나 더 있었는데, Kasyapa가 이를 두려워 하여 Sigiriya의 거대한 바위 위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지었다고 한다.
드디어 491년 그 아들이 복수를 하러 왔는데, Kasyapa는 요새에 숨어있지 않고 그의 코끼리 부대의 선봉에 섰다. Kasyapa는 이복동생이 이끄는 군대의 측면을 치려 하였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그만 늪에 빠져 버렸다. (저런~) 그의 군대는 그를 구하지 않았고, 거기서 그는 죽었다.
후에 Sigiriya는 승려들의 은신처가 되었으며, 16, 17세기에는 Kandyan 왕조의 전초 지점이었으나 폐허로 변했다가 영국 식민지 기간에 고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Sigiriya를 단지 요새로만 설명하기에는 타당하지 않다. Kasyapa는 바위의 200m 꼭대기에 우기를 보낼 궁을 지었다. 일종의 5세기 펜트하우스. 또한 Sigiriya는 중요한 도시 지점으로 고대의 건축, 공학, 도시 계획, 수력 기술, 정원술과 예술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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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올라가는 길의 절반쯤의 나선형 계단은 반듯한 바위 표현 속에 감춰진 갤러리로 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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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영국 고고학자가 2개의 거대한 사자 발을 발굴했다.
과거에는 바위의 끝에 벽돌 모양의 사자가 있어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사자의 발'에서 '사자의 입'으로 들어 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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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정상은 약 1.6헥타르에 이른다.
한 때 이곳은 건물들로 덮여 있었으나 현재는 그것들의 최하부만 남아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이곳이 요새라기 보다는 궁에 가깝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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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m*21m 이르는 거대한 인공연못은 비록 그것이 물탱크로만 쓰였다고 해도 현대의 수영장처럼 보여진다
 
 
도대체 누가, 왜 이 200m가 넘는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지었을까. 5세기 당시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던 다투세나왕의 장남 카샤파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카샤파는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이복동생 목갈라나와 달리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탓에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몹시 우려했던 것. 복수를 다짐한 목갈라나가 인도로 건너가 군대를 키워 반격을 해오자 카샤파는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이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시기리야 벽화 덕분이다. 벽화를 보려면 바위산 입구에서 낭떠러지 바위틈에 쇠줄을 매달아 만든 원통형 철망이 둘러쳐진 철제 계단을 20분 정도 올라야 한다.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위험천만한 철제 계단을 오르면 가슴을 훤히 드러낸 그 유명한 시기리야 벽화 미인이 시간을 뛰어넘어 미소로 반긴다. 시기리야 벽화는 카샤파왕이 부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의 시녀들이 압 살라라는 요정들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가슴을 드러낸 미인이 왕족이고 옷을 입은 미인은 시녀라 전해진다. 이 시기리야 미인들은 당초 500명이 넘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돼 18명의 모습만이 남아 있다.
시기리야 벽화 아래쪽으로 약 3m 높이의"거울벽"이라 불리는 회랑 벽이 이어진다. 달걀 흰자와 꿀, 석회 등을 이겨 칠했다는‘거울 벽’은 평소에도 은은하게 반짝거리지만 햇볕을 받으면 환상적인 모습으로 빛난다. 벽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노래한 서사시와 시기리야 벽화의 여인을 칭송하는 시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왼쪽으로 계단을 계속 오르다 보면 평평한 바위 광장이 나온다. 그 입구는 사자의 발톱 모양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자의 다리와 머리 모양까지 완벽해 왕궁에 오를 때면 마치 사자에게 삼켜지는 듯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철제 계단을 통해 거의 60도는 될 듯한 아슬아슬한 경사면을 10여분 정도 더 오르면 왕궁이 있는 정상이 펼쳐진다. 1.6ha 면적의 궁전과 연회장, 수영장, 각종 주거지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여m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 수영장이라니? 적지 않은 물이 수영장에 고여 있다. 이 물은 지상에서 공급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나 수로를 찾지 못한 채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곳에 서면 산 아래 밀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창한 날에는 아누라다푸라의 루완웰리세야 대탑까지 보인다고 한다. 권력을 얻기 위해 천륜을 어긴 카샤파는 암벽 꼭대기에서 항상 불안과 초조에 떨며 지내야 했을 것이다. 절벽 위에 왕궁을 짓고 고민 많은 왕을 모셔야 했던 수많은 스리랑카인들의 한숨과 탄식을 전해주듯 사람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스리랑카는 ‘인도의 눈물’이 아니다. 찬란한 고대 불교문화의 정신이 흐르는 불교 성지와 천혜의 자연관광지로 각광받는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스리랑카에는 총 일곱(7)의 세계문화유산이 unesco 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그중 "시기리야 록" 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불교와 관련된 유적들 입니다. 물론 "시기리야" 에 유적을 남긴 왕조도 불교를 믿는 싱할라 족들이니까 직간접적으로 불교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겠지요.
시기리야 rock (록. 바위) 을 위해하기 위해서 간단한 역사 이야기
서기 459-477 년까지 스리랑카를 통치했던 "다투세나 왕(Dhatusena)에게는 장남 이었던 "카사파(Kasyapa)" 와 배다른 이복동생인 "목갈라나(Moggallana)"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위 계승이 혹 배다른 이복동생에게 돌아갈까 두려워 한 "카사파"는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복동생인 "목갈라나"는 이웃나라 인도로 망명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빼앗은 "카사파" 왕은 이곳 시기리야에 있는 바위산 위에다 왕궁을 건설하고 이곳 산위로 왕좌를 가져온채 11년간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인도로 망명한 "목갈라나" 가 군대를 이끌고 "카사파"를 쳐부수기 위해서 싸움이 시작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카파사 왕이 패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후 싸움에서 승리한 "목갈리나" 가 다시 왕좌를 기존의 "아누라다푸라" 라는 곳으로 가져 가고 이 왕궁은 일반인들의 기억속에 잊혀 졌습니다.
시기리야 록을 더욱더 유명하게 만든것은 이 바위 중턱에 새겨진 아름다운 18명의 여인들의 벽화 그림 때문 입니다. 지금도 그 그림은 마치 살아 있는듯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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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blog.empas.sonsan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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