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만 해도 마을 전체가 생활사박물관
강경역 네거리에서 복개천 다리(옛 소화다리) 건너 경찰서 로터리 쪽으로 걷는다.
곳곳에 대형 간판을 내건 젓갈집들이 눈에 띈다. 강경읍엔 논산 경찰청사와 검찰청사가 자리잡고 있다.
번성하던 옛 강경의 잔영인데, 수시로 청사 이전설이 나돌아 주민들을 긴장시킨다고 한다.
젓갈가게를 하는 한 주민이 말했다. “욍긴다는 얘기 나오면 난리가 나부리지유.
전 읍민이 들고일어나 현수막 수백개를 내걸구는 결사적으루다 반대운동을 펼친다니께유.
한번 쇠퇴의 길을 걸어본 경험 때문에 그런 거유.”
강경읍사무소 지나면 학교 거리다. 왼쪽에 중앙초등학교가 있고, 오른쪽으론 강경고·강경여중·강경상업정보고교가 이어진다.
강경여중은 스승의 날 발상지①다.
1960년대 초부터 학생들이 해마다 은사를 찾아 꽃을 달아 드린 것을 계기로 1964년 스승의 날이 제정됐다.
상업고의 강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른바 ‘강상’(강경상고·현 강경상업정보고)으로 간다.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1931년 건립한 교장 사택②이 남아 있고, 이 학교 출신 김관식(1934~1970) 시인 시비도 있다.
1905년 개교한 중앙초등학교로 들어가 우아한 붉은 벽돌 건물을 만난다.
체육관으로 쓰는, 1937년 세워진 강당 건물(등록문화재)③이다.
정문 위쪽 벽에 한국전쟁 당시 포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이 남아 있고, 반대편 벽엔 전투기 기총소사 흔적이 뚜렷하다.
학교를 나와 걷는 골목길은 수십년 전 거리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미장원과 교회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상점들과, 2층 일본식 집들이 힘을 모아 나그네 발길을 오래된 풍경 속으로 빨아들인다.
텅 빈 집, 낡은 간판, 깨진 유리창, 먼지 낀 창틀이 도열한 거리로 어르신들은 천천히 자전거 바퀴를 굴리고, 지팡이를 옮겨 짚는다.
논산시 문화유산해설사 유제협(64)씨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20년 전까지도 읍내는 박제화된 생활사박물관을 방불케 했죠. 골목이고 건물이고 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60년대까지의 거리 모습이었어요.”
옛 강경장터로 들어선다. 일제강점기 옥녀봉 밑에 있던 윗장터와 함께 인파로 들끓던 아랫장터가 이곳이다.
허름한 주택들이 들어차 옛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한편에 옛 남일당 한약방 건물(등록문화재)④이 남아 옛 장터 모습의 일부를 엿보게 한다.
1923년 지은 목조건물로, 거의 완벽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 유숙지⑤ 팻말을 만난다.
상하이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0월12일 금강을 통해 강경포구에 들어와 2주일 정도 머물렀다는 집터다.
옛집은 사라졌으나, 바로 옆에 그 집보다 오래됐다는 민가가 남아 있다. 중앙교회 옆엔 ‘신사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가 있다.
한 골목 돌아 덕유정(향토유적 1호)⑥으로 간다. 덕유정은 1793년(정조 17년) 세운 활터다.
100년이 넘은 역대 사백(회장) 명단, 회원명부와 회칙·성적, 회칙을 어긴 회원을 징계하던 방망이까지 보관돼 있는 유서 깊은 국궁장이다.
덕유정에선 지금도 70여명의 회원들이 매일 오후 3시 활을 쏘며, 덕으로써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
덕유정을 나와 옥녀봉 오르는 골목길로 접어든다. 단층 한옥 교회 건물로는 유일하다는 북옥감리교회(등록문화재)⑦가 이 골목에 있다.
옥녀봉⑧ 오르는 길 옆 형제전기상사 뒤 산자락에는 옛 정자터와 샘터, 동굴 그리고 바위에 새겨진 여러 글씨들이 남아 있다.
해설사 유씨는 “이 주변은 일제강점기 법원·경찰서 고위 공무원들의 사택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일몰 19:00
옥녀봉으로 오른다. 커다란 느티나무와 봉수대가 있는 정상에 오르기 전, 옥녀를 만난다.
담배패가 달린 구멍가게에 옥녀씨가 사신다. 옥녀씨를 만나려면 우선 옥례씨를 만나야 한다.
송옥례(76) 할머니는 25살에 시집와 45년째 이 집에 살고 있는 둘째 며느리다.
옥녀씨는, 옥녀봉에서 반평생을 살아오신 유옥녀(110·사진) 할머니다.
귀 어두워지고 이 다 빠져 잇몸으로 버티시는 옥녀 할머니는, 개발과 보전 사이에서 불편하게 낡아가는 근대문화유산을 닮았다.
가게 건물은 일제강점기 옥녀봉에 있던 신사를 관리하던 관리사였다.
옥녀봉은 온통 바위투성이인데, 바위들은 온통 선인들이 새긴 글씨투성이다.
옥녀봉·영포대·잠영대·산주 등의 글씨와 옥녀봉의 내력을 적은 듯한 마모된 장문의 글도 보인다.
가장 눈길을 끄는 글은 정상 서쪽 절벽 ‘구암’ 옆 바위에 새겨진 ‘해조문⑨’이다.
1860년 새긴 “밀물·썰물이 생성되는 이치와 물의 높낮이를 수치로 풀이해 놓은 글”이다. 일종의 조수표인 셈이다.
옥녀봉을 내려가 금강 지류의 갑문과 배수펌프장으로 간다.
일제강점기부터 50년대까지 이 하천은 전국에서 모여든 배들로 메워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엔 지금 오염물질을 빨아들이는 식물 부레옥잠이 깔려 있다. 갑문은 홍수 때 금강물의 역류를 막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옛 한일은행(등록문화재)⑩ 건물 거쳐 부두노동조합사무실(등록문화재)⑪로 간다.
부두노동자들은 전국에서 모여든 배들이 싣고 온 해산물 등을 내리거나,
부두 옆에 있던 다카하시 정미소에서 나온 쌀을 배에 싣는 일을 맡았다. 염천교 건너 금강 둑 쪽으로 걷는다.
제방을 따라 옛 강경포구의 명성을 증거하듯, 고깃배들을 줄줄이 전시해 놓았다.
대형 선박 모습의 강경젓갈전시관⑫에선 강경의 옛 사진 및 젓갈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
옥상에 올라가면 금강 물가로 이어지는 황산 줄기가 도로 등으로 잘려나간 모습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여기서 나온 바위를 깨 제방 쌓는 데 썼다고 한다. 돌산 옆 물가의 등대처럼 보이는 흰 탑은 복원한 수위측정탑이다
옥녀봉에는 옥녀씨가 살고 있다네
황산대교 쪽으로 잠시 걸으면 죽림서원에 이른다.
1626년 황산서원으로 지어져 1665년 죽림서원으로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조광조·이퇴계·이율곡·성혼·김장생·송시열 여섯 분을 모신다.
서원 옆 계단을 올라 아름다운 정자 임리정⑬을 만난다. 사계 김장생이 1626년 지은 정자로 여기서 우암 송시열 등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원 옆길을 따라 오르면 황산 중턱에 임리정과 똑같은 모습의 정자 팔괘정⑭이 있다.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따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황산 정상엔 전망대⑮가 있다. 92개의 계단을 올라 둘러보면
부여군 세도면 들판과 전북 익산 일대, 멀리론 계룡산과 대둔산 줄기까지 시원하게 눈에 잡힌다. 강경역에서 여기까지 5㎞ 남짓 걸었다.
강경은 젓갈 말고도 예부터 황복과 웅어회(우여회·우어회)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80여년 전통의 황복전문식당 황산옥(041-745-4836), 명복식당(041-745-1157) 등에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황복탕 1인분 1만5000원. 황복을 내는 식당들에선 웅어회도 함께 낸다. 우여회로 더 익숙한 웅어회 무침 3인분 3만원.
달봉가든: 강경읍내 황산리 젓갈시장의 황해도젓갈상회(www.jgal.co.kr 041-745-5464)가
다양한 강경젓갈을 두루 맛보도록 한 상에 차려내는 맛깔스러운 젓갈반상(사진). 7000원. 041-745-5565
만나식당: 젓갈백반
◇금강둑길 ▽구간: 강경역∼강경시장길∼금강체육공원∼화산대교(아래)∼금강둑∼상포마을∼화산(나바위 성지)
▽거리: 편도 4.3km ▽소요 시간: 한 시간 ▽난이도(1∼5): 가장 쉬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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