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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에서 가장 작은 10개 나라

봉들레르 2009. 6. 28. 08:15

[바티칸]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1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1위~10위

01위 바티칸(0.44) 유럽
02위 모나코(1.95) 유럽
03위 나우루(22) 오세아니아
04위 투발루(26) 오세아니아
05위 산마리노(60) 유럽
06위 리히텐슈타인(160) 유럽
07위 마셜(171) 오세아니아
08위 세인트크리스토퍼 네비스(269) 중앙아메리카
09위 몰디브(298) 아시아
10위 몰타(316) 유럽

바티칸시티 [Vatican City]

(이) Stato Della del Vaticano.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 교황이 지배하는 독립국.

로마 시내의 티베레 강 서안에 있다. 산피에트로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면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6개의 입구 중에서 광장, 대성당 정면의 종탑 아치, 북쪽 성벽에 있는 바티칸 박물관 입구 등 3개의 입구만이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이 성벽들 안은 작은 나라이다. 가장 인상적인 건물은 4세기에 지어 16세기에 개축한 성베드로 대성당이다. 바티칸시티는 독자적인 통신체계, 은행기관, 화폐를 비롯해서 우체국, 라디오 방송국, 100명 이상의 스위스인 수비대, 백화점, 의료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식량·물·전기·가스를 포함한 대부분의 물자는 수입해야 한다. 소득세가 없고 자금의 유입이나 유출에 대한 규제가 없다. 자금이 어떻게 조성되고 운영되며 또 어떻게 지출되는지는 비밀에 가려져 있다.



바티칸시티는 1929년 라테란 조약에 따라 당시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이 나라의 통치권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선출된 교황이 행사한다. 교황은 바티칸시티 안에서 행정·입법·사법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갖는다. 또한 바티칸 정부의 각료들을 임명하는데, 이들은 교황청 인사들과는 달리 성직자가 아니다. 교황은 교황청의 바티칸시티 위원회에서 통치권을 행사하며, 행정권은 중앙협의회의 보좌를 받는 지사에게 위임된다.

이곳의 문화는 교황들이 이탈리아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던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많이 쇠퇴했다. 그러나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보르지아관(館)에 있는 핀투리키오의 프레스코, 라파엘의 방 등은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비평가, 미술가 및 수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바티칸 도서관은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와 그리스도교 시대의 진귀한 사본들을 소장하고 있다. 바티칸시티에서는 영향력있는 일간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 L'Osservatore Romano〉를 발행하고 있으며, 이곳의 인쇄소는 그루지야의 교회언어로부터 인도의 타밀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모든 언어로 책이나 소책자를 발행할 수 있다. 인구 900(2003 추계)

[한국과의 관계]

1949년 4월 한국을 승인했으며 1963년 12월 외교관계를 공식 수립함에 따라 서울의 교황사절단이 공사관으로 승격되었다.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1966년 9월로 1974년 4월에는 한국에서 바티칸 주재 상주대사관을 개설했다. 교황청이 한국의 교회와 정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조선을 독립된 교구로 설정하면서부터이다.

교황 요한네스 파울루스(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과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교황청에 체류하는 한국인은 모든 수녀와 신부같은 성직자들이다. 1991년의 대한수입은 2만 달러이며,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바티칸시티라는 또 하나의 독립국가가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이며 전 세계 가톨릭의 집결지이다. 현재 역대 로마 교황들이 수집한 조각, 회화, 공예품 등의 진귀한 문화유산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성당, 박물관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 교과서에서 보았던 예술작품들을 직접 눈으로 감상할 수 있다.

피냐 정원 피냐 정원에는 바티칸의 상징이 되는 높이 4m의 거대한 청동 솔방울이 있다. 정원의 한가운데에는 넓은 녹색 잔디가 깔려있고 찢어진 듯 보이는 금색 지구본(파괴되어가는 지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기념하여 만들어졌으며 지구환경을 생각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구로써 손으로 돌리면 쉽게 돌아간다.

바티칸 박물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인접한 바티칸 박물관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의 유명한 화가들의 프레스코 벽화로 유명하다. 바티칸 관광 때에는 소매가 없는 민소매 티셔츠나 배꼽이 보이는 티셔츠를 입고는 입장할 수 없으니 주의해야 한다.



성 베드로 성당 성직자 베드로를 위해 세워졌으며 그의 무덤 또한 그 안에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은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성 베드로 광장과 합해지면 열쇠모양이 된다. 열쇠는 베드로의 상징으로 성당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회랑 위에는 140명에 달하는 성자와 순교자들의 대리석상이 세워져 있다.



성 베드로 광장 성 베드로 광장은 유명한 건축가 베르니니가 설계한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솟아있고 광장옆쪽으로는 성 베드로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모나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2

모나코 [Monaco]

공식 이름은 모나코 공국(公國) (Principauté de Monaco).
프랑스령 지중해 연안지역인 코트다쥐르 휴양지대의 중간지점으로,
지중해를 굽어보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독립공국.

암반 위에 있는 모나코의 옛 도시
니스 시(市)가 서쪽으로 14㎞ 떨어진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 8㎞ 되는 곳에 이탈리아 국경이 있다. 면적이 매우 작지만 보기 드문 특징들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관광휴양지로 손꼽히게 되었으며 나라 크기를 훨씬 능가하는 명성을 얻었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연평균기온이 16℃이고 1년에 60일 정도만 비가 내린다. 월평균기온은 9월의 10℃에서 8월의 24℃에 이르는 분포를 보인다.



모나코의 석기시대 취락유적이 선사인류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고대에는 페니키아·그리스·카르타고·로마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191년 제노바인이 점령했다. 1297년 그리말디가(家)에 의한 오랜 통치가 시작되었는데 그리말디가는 스페인의 보호 밑에 있던 1524~1641년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1793년 프랑스 혁명 정권이 그리말디가를 추방하고 모나코를 프랑스에 합병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그리말디가는 복귀했고 빈 회의(1815)에 따라 모나코는 사르데냐 왕국의 보호하에 놓였다. 1848년 영토를 프랑스에 잃음으로써 크기가 축소되었으나 1861년에 체결된 프랑스-모나코 조약으로 독립을 되찾았으며 1865년에는 양국간에 관세동맹이 맺어졌다. 1918년 프랑스와 체결한 또다른 조약은 그리말디 왕가의 대가 끊길 경우, 모나코가 프랑스 보호 밑에서 자치국가가 될 것이라는 조항을 포함했다.



총면적 1.95k㎡로 바티칸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모나코는 나라라기보다는 프랑스의 한 휴양도시 같은 느낌을 줍니다. 프랑스와 국경도 따로 없고, 통화도 프랑스 프랑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모나코에는 1911년부터 헌법이 있었으나 1959년 대공인 레니에 3세가 헌법 일부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국민회의를 해산시켰으며, 대신 1961년에 국회를 임명·구성했다. 1962년 프랑스와 관계가 악화되자 그는 다시 국민회의를 부활시키고 새로운 자유주의 헌법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국민회의는 보통선거에 의해 5년 임기로 선출되는 18명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행정은 프랑스 시민권을 지닌 국무장관 1명과 3명의 국가자문위원들이 맡는데, 이들은 공식적인 모나코 수반인 대공의 권한 밑에 있다. 입법권은 대공과 국회가 함께 갖는다. 1819년부터 모나코의 사법체계는 프랑스 사법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2명의 파리 판사로 구성된 상소법원이 있다.



모나코가 자국 거주민과 국내에 본부를 설치한 국제기업들에 대해 소득세 부과를 거부함으로써 1962년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에 양국간에 타협을 한 결과, 거주 기간이 5년 이내인 국내 프랑스 국적을 가진 사람에게는 프랑스 세율이 적용되고 사업활동의 25% 이상을 국외에서 하는 모나코 회사들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오늘날 국가의 수입총액 가운데 상당 부분은 무역거래에 부과되는 세금에서 얻어지며 추가적인 수입은 라디오·텔레비전·카지노 독점판매권, 담배·우표 국영독점산업, 판매세, 1962년 이래 부과된 각종 세금 등에서 나온다. 모나코는 주요산업이 관광업이며 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휴양지로 손꼽힌다. 한때 겨울 명소였으나 지금은 이곳 해변과 확장된 정박시설을 찾아 여름에도 관광객이 몰려든다. 몬테카를로의 사교계는 카지노 궁(Place du Casino) 주변에서 형성된다. 1861년에 세워진 이 카지노는 1967년 영업권이 국가로 넘어갔다. 관광업을 육성하는 국가답게 인구의 소수를 차지하는 모나코 원주민에게는 도박 행위가 금지되어 있으나 이들은 세금을 면제받고 있다.



모나코 인구는 대부분이 프랑스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보다 적지만 이탈리아인도 상당수를 차지해서 겨우 15% 정도만이 모나코 원주민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민 대부분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며 공식어는 프랑스어이다. 모나코를 이루는 4개 구역은 바다로 튀어나온 돌출부('암반')에 옛 도시가 자리잡은 모나코 시, 만 서쪽에 있으며 천연항을 지닌 라콩다민,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카지노와 수많은 호텔이 있는 몬테카를로, 보다 최근에 조성된 지역으로 여러 가지 경공업이 발달한 퐁비에유이다. 주요건물로는 로마 가톨릭 성당, 제노바·르네상스 양식의 왕궁, 1910년에 건립된 모나코 해양박물관이 있다. 카지노 건물 안에 들어 있는 극장은 샤를 가르니에가 설계한 것으로서 몬테카를로 오페라단의 근거지이다. 1920년대에 유명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가 이곳에서 많은 작품을 초연했으며 그밖에 몬테카를로 국립관현악단이 있다. 모나코에서 열리는 몬테카를로랠리와 모나코그랑프리 자동차경주는 매우 유명하다. 면적 : 1.95㎢, 인구 32,400(2003 추계).

[한국과의 관계]

1991년의 대한수입은 170만 달러, 대한수출은 56만 달러이며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 때 17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북한과는 수교를 맺고 있지 않다.

 

 

[나우루]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3

나우루 [Nauru]

하와이에서 남서쪽으로 약 3,900km 떨어져 있는 남서태평양상의 공화국.
타원형의 섬으로 둘레가 19km이며, 수도는 야렌이다. 면적 21.2㎢, 인구 12,600(2003 추계).

[자연환경]

산호초가 융기해 이루어진 섬으로, 평균고도 60m의 중앙고원이 있고 최고봉의 높이는 65m이다. 풍부하게 퇴적한 구아노를 주체로 하여 형성된 인회암층으로 덮여 있으며, 누수(漏水)에 의해 주기적으로 물이 채워지는 함몰지인 부아다 초호(礁湖)가 있다. 고원 아래에는 폭 150∼300m의 비옥한 평지가 섬을 둘러싸고 있어 정착과 제한된 농업이 이루어지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모래해변 건너편에는 거초(礁)가 하나 있다.

해안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서 부두로 사용할 만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대체로 고온다습한 기후로 낮 평균기온이 30℃에 달하지만 바닷바람 때문에 견딜 만하다. 가끔 극심한 가뭄이 들기도 하지만 연평균강우량은 2,000㎜이다. 서쪽에서 계절풍이 불어오는 시기인 11∼2월이 가장 습기가 많은 때이다. 토양이 극히 다공질(多孔質)이기 때문에 식생은 주로 코코스야자, 판다누스, 각종 덤불과 관목 활엽수에 국한되어 있다. 부아다 초호 주위의 작은 옥토와 관목이 자라는 광산 매립지를 제외하고는 식물은 대부분 좁은 해안지역에서만 자란다. 1970년대말 3,900만t의 인광석이 고원에 남아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현재의 생산량 기준으로 2000년경까지 채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

나우루 주민의 약 3/5은 폴리네시아·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계의 나우루 원주민이다. 또한 주민 중 1/4은 키리바시·투발루·필리핀 및 다른 여러 섬에서 온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중국 화교와 유럽인들이다. 많은 외국인들은 광부로서 광산을 따라 이동한다. 국어인 나우루어는 폴리네시아어·미크로네시아어·멜라네시아어가 섞인 특이한 방언인데, 영어가 널리 쓰이며 학교에서도 영어로 가르친다. 종교는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며, 나우루 조합교회와 나우루 독립교회 및 로마 가톨릭 교회가 많다. 인구밀도는 1㎢당 376명인데 거의 해안지대에 밀집해 산다. 1,000명당 19.8명인 출생률과 4.5명인 사망률, 그리고 연평균 자연증가율 1.3%는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남부해안의 메넹 지구와 야렌 지구에 인구가 가장 많으나 이 섬에 도시는 하나도 없다.



nauru island

[경제]

거의 인광석에만 의존하는 나우루의 경제는 1981년 통계에 따르면 국민총생산이 1억 5,540만 달러이고, 1인당 국민총생산이 2만 1,400달러로 태평양에 있는 국가 가운데 가장 높았으며, 전세계적으로도 최고 대열에 들었다. 농업은 전체 국토면적의 약 15%에 해당하는 해안지대와 부아다 초호 주변지역에서만 이루어진다. 이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기르고 코코넛·바나나·파인애플·야채도 재배하지만 이것으로는 자체 수요도 충당하지 못한다. 어업도 마찬가지로 자체 수요를 충당하는 데 불과하다. 나우루의 경제를 좌우하는 것은 인산염 채광이다.

세계에서 인산염의 농축도가 가장 높은 인광석이 대지에서 노천 채굴되어 처리공장까지 협궤철도로 수송되며, 고온에서 소광법(燒鑛法)으로 분쇄·건조·정제된다. 그렇게 해서 생기는 제품을 나우루 소광석이라고 하며, 이 소광석은 서해안의 양고르 부근에서 암초 경계표의 지시에 따라 멀리 정박하지 않으면 안되는 선박에 컨베이어 벨트와 캔틸레버의 복잡한 기구를 통해 선적된다. 그 모든 작업을 나우루 국영인광석회사가 관리하며, 판매수입 중 절반은 중앙정부에 돌아가고 나머지는 나우루의 지주와 지방정부 및 장기신용기금으로 배분된다. 여기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광석을 다 캐낸 지역은 궁극적으로 농경지로 전환하기 위하여 쓰레기나 폐기물로 매립한다. 인광석을 다 캐고 난 뒤 이에 대체할 수 있는 산업은 어업뿐이기 때문에 나우루 정부는 수익금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부동산, 국영선박회사, 태평양·아시아·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로 취항하는 국영항공사, 장기현금투자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개발 전의 인광석(燐鑛石) 산지: 인광석은 심하게 풍화된 산성토양에서 효과적이어서 농업에서의 인(燐)은 중요한 요소이다.

1980년대초에는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를 방문하는 일본인들이 주요 관광객이었다. 나우루의 노동력은 대부분 정부기관이나 나우루 협동조합에 동원되고 있다. 계약이민 노동자들은 1년 단위의 갱신가능조건으로 인광석 광산에 고용되어 일한다. 이들에게는 영주권을 주지 않으며 인광석회사의 발전 혜택은 나우루인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러나 이주자들은 가족을 데리고 올 수는 있으며 임금에 추가하여 식료품과 거처는 무료이며, 잔업의 기회도 있다.

나우루는 특별 영연방 회원국으로 태평양지역 여러 기구에 소속되어 있으나 국제연합(UN)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화폐단위는 오스트레일리아 달러(A$)로, 1984년에 환율이 1A$가 미국 달러로 0.93달러였다.

나우루 섬의 해안을 따라 해안순환도로가 완전히 포장되어 있으며, 나우루 주민의 약 3/4이 자동차나 모터사이클을 갖고 있다. 야렌 부근에 국제공항이 있다. 인광석 수출액이 수입총액보다 훨씬 많다. 주요 수입품은 식료품·연료·물이며, 주요 교역상대국은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영국·일본이다.



Anibare Bay

[정치·사회]

나우루의 국가 수반인 대통령은 18명의 나우루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며, 국회의원은 3년마다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들에 의해 선출되는데, 선거에서 투표권은 의무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대통령은 5∼6명으로 이루어진 내각을 구성한다. 14개의 지구를 대표하는 나우루 지방행정참사회는 행정기능을 할 뿐 아니라 선박회사도 운영한다. 사법기관으로는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과의 합의에 따라 나우루 대법원이나 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의 허가를 받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상소할 수 있다. 국방은 오스트레일리아가 담당한다.

2개의 현대식 병원과 산모 및 유아진료소에서 무료로 진료와 치과검진을 해주며, 특별한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내며 그 비용은 나우루 정부가 부담한다. 필라리아증을 제외한 대부분의 열대성 질병들이 사라져서 일반 사망률과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낮아졌다. 강우량이 일정하지 않아 주기적으로 물이 부족해서 때때로 식수용 물을 수입해야만 한다. 6∼16세까지는 무상 의무교육이며 정부에서 유아학교를 세워 운영한다. 정부와 로마 가톨릭 선교회에서 각각 운영하는 중학교가 2개 있다. 기숙사가 있는 외국의 중학교에 다니거나 상급학교로 진학해 정부로부터 학비 일부를 보조받을 수도 있다.

나우루는 1975년에 위성 지상수신국을 설치해서 세계 각국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현대식 전화체계와 더불어 텔렉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민간 자본으로 발행되는 주간지와 정부가 격주로 발행하는 신문이 각각 하나씩 있다. 라디오 방송국이 하나 있으나 청취지역은 제한되어 있다.

[역사]

독특한 합성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나우루에는 여러 시대에 태평양의 여러 섬의 주민들이 표류하다가 정착했던 것 같다. 1900년까지는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두 민족이 구분되었으며 12개의 씨족들이 각기 다른 방언을 갖고 있었다. '헌터호'를 탄 영국의 항해가 존 펀이 1798년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섬에 발을 디뎌 원주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고 섬의 이름을 '유쾌하다'는 뜻의 '플레전트'라 했다. 1830년대부터는 고래잡이 어부들이 이곳에 가끔 들렀으며, 해변가에 백인 부랑자들이 많이 살았다. 유럽인들이 들여온 무기가 도화선이 되어 1878∼88년에는 씨족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졌고, 이에 견디다 못한 독일인 정착민들이 독일령 마셜 제도에 이 섬을 편입시켜달라고 청원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888년에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독일은 무장함 '에베르호'에 판무관을 실어 보내 섬 주민들에게서 무기를 압수하고 독일 무역사무소를 설치하여 주요행정기능을 담당하게 하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1899년에 들어왔으며 로마 가톨릭은 1903년에 소개되었다. 1899년 인광석을 발견한 후 1906년 영국의 한 회사가 인광석을 마구 채굴하여 얄루이트게젤샤프트라는 독일회사와 이익금을 나누어가졌다. 1907년 인광석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온 중국 노동자들이 이질과 소아마비, 결핵을 퍼뜨려 나우루 주민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1914년 오스트레일리아가 나우루를 점령했다. 1919년에는 국제연맹이 나우루를 영국·뉴질랜드·오스트레일리아의 공동 위임통치국으로 인정했다. 초대 오스트레일리아인 행정관이 처음으로 인광석의 수익금 일부를 나우루인들에게 나누어주기로 결정했다. 1940년 독일 폭격기 2대가 폭탄을 투하하여 인광석 수송선박 5척을 침몰시켰다.

1942∼45년 일본이 이 섬을 점령한 뒤 당시 나우루 주민의 2/3에 해당하는 1,200명을 강제로 추방했는데, 1946년 1월 31일 737명만이 돌아왔으며, 그후 이 날을 '해방일'로 기념해오고 있다. 1947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가 관리하는 유엔 신탁통치지역이 되었으며 1951년 지방행정참사회가 구성되었다. 주민들은 1967년 협정에 따라 인광석 채굴권과 판매권을 갖게 되었다. 1965년에 나우루 국회가 설립되었으며 1966년에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68년 완전히 독립했으며 초대 대통령에 해머 드로버트가 선출되었다. 1969년 영국연방의 준회원국이 되었다. [蔡奎元 옮김]

 

 

[투발루]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4

투발루 [Tuvalu]

옛 이름은 Ellice Islands.
태평양 중서부에 있는 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입헌군주국.

공식 명칭 : 투발루(Tuvalu)
인구 : 9,600
면적 : 26 ㎢
수도 : 퐁가팔레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영국 국왕/총리
독립년월일 : 1978. 10. 1
화폐단위 : 투발루달러(Tuvalu dollar/$T)
국가(國歌) : Tuvalu mo te Atua("Tuvalu for the Almighty")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북동쪽으로 4,000km 떨어져 있다. 이 제도의 해안에서 370km 해상으로 뻗어 있는 경제수역을 포함하면 130만㎢에 이른다. 수도는 푸나푸티 환초에 있는 퐁가팔레이다. 총육지면적 25.6㎢, 인구 10,200(2003 추계).



[자연환경]

투발루 제도는 니울라키타에서 나누메아까지 북서쪽으로 676km 정도 뻗어 있다. 나누망가·니우타오·바이투푸·니울라키타의 4개 섬은 산호섬이고, 나머지 섬들은 초호가 있는 환상산호섬이다. 면적은 5㎢로 가장 큰 바이투푸에서 0.4㎢의 니울라키타까지 다양한 크기의 섬들이 있다. 모든 섬들은 대체로 지대가 낮은데, 가장 높은 곳도 6m 이하이다. 기후는 1년 내내 따뜻하며 습도가 비교적 높다. 낮기온은 27∼29℃이나 남동무역풍이 우세해서 시원한 편이다.

연평균강우량은 북부 제도가 2,500㎜, 남부 제도가 3,200㎜인데, 대부분 세찬 소나기로 내린다. 정기적으로 심한 가뭄이 들며, 드물게(1894, 1972) 태풍이 몰아치기도 한다. 산호로부터 생긴 다공성의 척박한 토양 때문에 식생은 30여 가지로 제한된다. 코코스야자·브레드프루트나무·판다누스·카수아리나 및 염분에 저항력이 있는 약초·이끼류·목초가 대부분이다.

조류와 야생생물도 제한적인데, 폴리네시아쥐·도마뱀·거북이 주요 야생동물이다. 대조적으로 바다동물은 풍부한데, 캐스터오일피시·참치·줄삼치류·날치류 등이 풍부하며, 문어·게 및 기타 다양한 물고기가 있고, 모래톱과 초호에는 갑각류 동물이 서식한다. 광상은 없다. 토양이 다공성이어서 담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식수공급이 늘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며, 코코스야자가 식수로 이용된다.

바다에 잠기는 남태평양 낙원 ‘투발루’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의 수도 푸나푸티의 항공사진. 섬 측면이 바다에 잠겨 파도가 바로 집 앞까지 들이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아름다운 산호섬이 지구상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국민]

90% 이상이 폴리네시아인으로 대부분이 키리바시미크로네시아인인 누이 섬 주민들을 제외하고는 사모아인·토켈라우인과 혈통적으로 연관이 있다. 유럽인이나 다른 외국인은 이곳에 거의 살지 않는다. 누이 섬을 제외한 투발루의 언어는 사모아어와 관련된 폴리네시아 방언이다. 누이에서는 키리바시(길버트) 방언이 통용된다. 영어는 공식어로서 섬 전체에서 널리 사용된다. 모든 투발루인들은 회중교회 전도단에서 파생된 투발루 교회의 신자이다. 소규모의 종교집단으로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바하이교, 로마 가톨릭이 있다. 인구밀도는 매우 높은 편이고, 인구의 약 1/3이 도시에 산다. 대부분의 인구가 행정·상업 중심지인 푸나푸티 환초에 집중되었다. 출생률과 사망률이 비교적 높지만 취업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인구증가율은 낮다(→ 폴리네시아 지리적 인종, 폴리네시아어군).

[경제]

투발루 경제는 주로 자급농업과 어업에 기초해 있고, 환금작물의 생산은 한정적이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오세아니아의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낮은 편이다. 척박한 토양 때문에 섬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지표면에서 1.8∼3.6m 이하의 지하수면까지 도랑을 파서 작물을 재배했다. 타로토란·바나나·사탕수수 등이 기름진 토양의 작은 언덕에서 재배된다. 이 언덕은 3∼6m 너비의 도랑 안에 토양수분의 증발을 방지하기 위해 나뭇잎으로 뿌리덮개를 해서 만든 것이다. 도랑 사이의 둑에서는 빵나무와 포포나무가 자란다. 코코스야자와 판다누스가 제도 곳곳에서 자라며, 코프라는 유일한 환금작물로서 코프라 협동조합에 의해 판매된다. 이 나라는 땅을 가족단위로 소유하거나 공동체가 함께 소유한다. 니울라키타에는 대부분 니우타오에서 온 사람들이 일하는 대농장에서 코코스야자가 재배된다. 돼지와 닭은 이 나라의 유일한 가축으로 코코넛 부스러기를 먹고 자라며 가족단위나 공동으로 가축을 기른다.

어업은 주로 내수를 위해 이루어지며, 몇몇 섬들에서는 광삼(光蔘)을 수출하고 있다. 한국·미국·타이완은 투발루의 배타적인 경제수역 안에서 어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이 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생산하던 여러 색상의 돗자리, 파나마 모자, 바구니, 판다누스 잎으로 만든 가방 등을 제외한 다른 제조업은 없다. 상업활동은 각 섬에 있는 협동조합과 푸나푸티 환초에 있는 몇몇 기업들의 활동 정도로 제한되어 있고, 우표를 만들어 외국에 팔아서 약간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화력발전소에서만 전력이 생산되며, 푸나푸티·바이투푸 섬으로 공급된다. 1980년대의 정부 개발계획은 코코넛 농업의 현대화, 수경농업의 개발, 염분에 저항력을 갖는 작물 도입, 원양어업의 실시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발은 대부분 영국·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등의 원조로 이루어진다.

이 제도의 노동력 가운데 4/5는 자급농업과 소규모 어업에 종사하며, 나머지는 상업·서비스업·정부기관에 종사한다. 투발루 노동력의 10%는 외국(주로 나우루인산염회사)에서 일하거나 원양어업에 종사하는데, 이들이 송금하는 돈은 투발루 외화획득의 주요원천이다. 비정기적으로 섬에 들어오는 선박과 항공(푸나푸티에 공항이 있음)이 가장 주요한 운송수단이다. 그러나 2개의 섬에만 초호 안으로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가 나 있고, 주요항구로는 푸나푸티가 있다. 1979년 뉴질랜드의 도움으로 누이 섬의 초호 안을 통과하는 수로를 뚫는 폭파가 진행되었다. 투발루의 수입품은 일반적으로 그 가치에 있어 수출품의 약 10배에 해당된다. 수입품의 약 1/4을 차지하는 식량과 식료품은 주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영국에서 수입되며, 기타 수입품으로는 제조업제품·기계류·운송설비·광물연료 등이 있다.

[정치·사회]

투발루는 영국 연방으로서, 1978년 헌법에 따라 영국의 여왕이 투발루의 국가수반이고, 총독으로 뽑힌 투발루인이 이를 대신한다. 단원제 의회는 12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들은 보통선거에 의해 4년에 1번씩 선출된다.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하고 총독은 총리의 조언을 받아 국회의원 가운데에서 내각을 구성한다. 사람이 거주하는 각 섬에 있는 민사·형사 법원과 함께 대법원이 사법부를 구성한다. 대법원에 대한 상소는 피지 상소법원이나 영국 추밀원의 사법위원회로 보내진다.

푸나푸티에는 현대적인 병원이 있고, 각 섬에는 진료소가 있다. 사람들의 건강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1975년 사상충에 의해 생기는 열병이 세계보건기구(WHO)의 치료 프로그램에 의해 퇴치되었다. 그러나 유아사망률은 지금도 상당히 높다. 평균수명은 남자 57세, 여자 60세로, 오세아니아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약간 낮은 편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8개의 각 섬에는 무료 초등학교가 있고, 바이투푸에는 중등학교가 있다. 1979년 푸나푸티에 선원훈련학교가 세워졌다. 직업훈련생들은 피지와 다른 섬으로 보내져 고등교육을 받는다. 사람이 사는 8개의 섬에는 전신·전화 업무가 개설되어 있다. 푸나푸티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투발루어와 영어로 방송을 하며, 정부신문이 격주로 발행된다.

[문화]

푸나푸티는 약간 현대화되었으나, 투발루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으며, 지방의 관습이나 수공기술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역사]

19세기 그리스도교 선교단들이 투발루의 전통을 기록한 것에 의하면, 사모아나 통가에서부터 온 폴리네시아인이 투발루에 처음으로 정착했다고 하는데, 투발루의 언어가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가계 족보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약 1325년에 정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70년대말 고고학자들은 300∼500년경 이 제도에 처음 정착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후에 누이 섬에는 지금의 키리바시에서 온 미크로네시아인들이 정착했다. 스페인의 탐험가 알바로 데 멘다냐 데 네이라가 1568년 누이 섬을, 1595년에는 니울라키타 섬을 탐험했다. 이 제도의 옛 이름인 엘리스 제도는 1819년 푸나푸티를 방문했던 아렌트 데 페이스테르 선장이 타고 있던 '레베카호'의 소유주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제도 주변의 바다에서 고래잡이가 성했던 1820∼70년에 많은 난파자들과 백인 부랑자들이 이곳에 정착해 투발루인과 결혼했다. 이들 중에는 코프라와 코코넛 기름을 수출하는 중개인·상인이 된 사람도 있다. 페루의 노예잡이들은 푸나푸티와 누쿨라엘라에에서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유괴했다. 몇 년 후 1865년 런던 선교회 목사들은 전도단을 앞세우고 원주민들을 급속도로 개종시켰다.

미국은 1856년의 구아노 법령을 통해 투발루 남부 4개 섬의 소유권을 요구했으며, 1890년대 초엽부터 니울라키타에 있는 구아노 광산을 채굴했다. 1892년 영국이 길버트 제도에 대한 보호령을 선포하자, 영국 군함 '로열리스트'의 선장인 E.'H.'M.'데이비스는 투발루 제도를 여행하면서 영국 보호령을 받아들이도록 원주민을 설득했다. 투발루 제도는 1916년 길버트엘리스 제도 식민지가 되었다. 푸나푸티 환초는 행정중심지이자 항구의 출구가 되었다. 또한 1897∼98, 1911년에 이 환초에서 다윈의 환초발전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과학적 시추작업이 있었다. 1942년 일본이 길버트 제도를 점령한 후 미국은 엘리스 제도를 점령하고 3개의 섬에 활주로를 건설했다.

길버트 제도는 1943년에 해방되었다. 많은 투발루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취업을 위해 길버트 제도에 있는 타라와 섬으로 이주했는데, 이렇게 이주한 투발루인들과 키리바시인들 간의 반목이 심했다. 1967년 투발루인들은 식민지 정부에 대표를 파견했고, 1974년 길버트 제도와의 분리를 투표로 결정했다. 1975∼76년의 분리 이후로 1977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이때 선출된 의회는 1978년 10월 1일 투발루의 독립 이후 투발루 의회가 되었다. 1979년초 투발루와 우호조약을 맺은 미국은 남부의 4개 섬에 대한 권리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이 건설한 군사기지를 포기했으며, 그 대가로 다른 나라가 투발루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요구했다. 독립 이후 1981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한국과의 관계]

1978년 독립한 투발루는 1978년 11월 15일 한국과 공식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반공·친서방 노선으로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한국과 어업협정(1980. 6)이 체결되어 있으나 교역관계는 서로 미미한 편이다.

 

 

[산마리노]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5

산마리노 [San Marino]

공식 이름은 산마리노공화국(Most Serene Republic of San Marino).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 지방과 마르케 지방 사이에 위치한 작은 공화국.

공식 명칭 : Most Serene Republic of San Marino
인구 : 29,400
면적 : 61 ㎢
수도 : 산마리노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집정관 2명/집정관 2명
공식 언어 : 이탈리아어
독립년월일 : 855
화폐단위 : 유로(euro/??)

아드리아 해에서 가까운 티타노 산 기슭에 있는 이곳은 4면이 이탈리아에 둘러싸여 있다. 이 나라는 유럽에서 바티칸시티와 모나코 다음으로 작은 독립국가이며, 나우루의 독립(1968)이 있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었다. 면적 61.2㎢, 인구 29,200(2003 추계).



[자연환경]

영토는 북동쪽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최장길이가 13km인 불규칙한 직사각형 모양을 이루고 있다.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마라노·아우사 천(川)과 마레키아 강으로 흘러드는 산마리노 천이 이 나라를 가로지른다. 자연경관은 거대한 석회암 덩어리인 티타노 산(739m)이 중심을 이루는데 남서쪽에는 이 산으로부터 구릉들이 펼쳐져 있는 반면, 북동쪽 지역은 로마냐 평야와 아드리아 해를 향해 경사가 완만하게 져 있다. 3개의 정상에 고대의 삼중 요새가 서 있는 티타노 산의 윤곽은 수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다.

기후는 온대성으로 여름최고기온이 26℃, 겨울최저기온이 -7℃이다. 연강우량은 560∼813㎜이다. 식생(植生)은 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지중해 연안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올리브나무·소나무·참나무·서양물푸레나무·포플러·전나무·느릅나무 등과 많은 종류의 풀·꽃들이 자란다. 가정과 농장에서 키우는 동물 외에도 두더지·고슴도치·여우·오소리·담비·족제비·산토끼 등이 발견된다. 또 이곳이 원산지인 조류와 철새들이 많이 살고 있다.



타임머신 없이도 갈 수 있는 중세 마을

지도상으로 이탈리아 북동부 지역에 작은 점으로 표시된 산마리노 공화국은 실제로도 보통 크기의 도시 2~3개 정도를 합친 크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산마리노는 중세에 세운 여러 유적지와 유물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국민]

선사시대와 로마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흔적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티타노 산과 산기슭에 촌락이 생긴 분명히 알려진 때는 성 마리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도착한 이후이다. 인구의 상당수가 본토 주민이 아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중 다수가 이탈리아인이다. 2만 명 이상의 산마리노 국민이 이탈리아·미국·프랑스·아르헨티나 등 해외에 거주한다. 주민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공식 언어는 이탈리아어이고 널리 사용되는 방언은 로마냐 방언 및 피에몬테·롬바르디아 방언과 유사한 켈트골어(語)이다.



[경제]

수세기에 걸친 티타노 산의 석재 채석과 그것에 의존한 수공예업으로 광물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산마리노에는 광물자원이 없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경제는 전적으로 주민의 활동에 달려 있다. 주요산업을 그 중요도순으로 보면 공업·관광업·상업·농업·수공업이다. 20세기 후반부에 기초부터 새로 도입된 제조업을 통해 건축자재·페인트·니스·종이·금속공예품·섬유·의류·가구·고무·가죽신발류·도자기·식품·과자제품·리큐어(달고 향기로운 독한 술)·화장품·위생제품 등을 생산한다. 한편 관광업은 신장력이 가장 큰 부문으로 주민의 부(富)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전통적인 소풍관광과 더불어 현대적인 호텔 시설의 발달을 기초로 한 계약형 관광과, 아직 미미한 수준이긴 하지만 민박관광이 증가하고 있다.

산마리노의 농업은 이제 더이상 주요경제자원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산량이 크게 준 것도 아니다. 주요농작물은 밀·옥수수·보리이며, 낙농업과 가축사육업 역시 중요하다. 전통적인 수공예품에는 도자기 제품과 주철물, 그리고 현대식 가구와 재생가구가 있다. 우표 등을 만드는 정밀 인쇄업도 유용한 수입원이다.

[정치·사회]

1600년의 제정법을 기초로 한 산마리노 헌법은 회의제(會議制) 정부를 규정하고 있다. 대평의회(大評議會)는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이고 대평의회 의장인 2명의 집정관(執政官)이 주도한다. 장관들의 회의인 국가회의는 대평의회가 자체 구성원들 가운데서 임명한 10명으로 구성되며 집행권을 행사하는 주된 기구이다. 그 구성원은 각각 하나의 부처를 책임진다. 군대는 없으나 군단(대평의회 호위대·제복민병대·요새경비대)이 있어서 국가축제행사 때의 의식에서 행진을 한다. 공공질서는 헌병대가 유지한다.

산마리노 주민을 위한 사회복지계획은 광범위하다. 개인업체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 정부가 일거리를 찾아준다. 사회복지세를 내는 대신 모든 주민들은 무상의 포괄적인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으며, 질병·사고·노령에 대한 보조금과 가족수당을 받는다. 국가는 건축계획을 통해 주민들의 주택소유를 지원한다. 교육은 14세까지 무상이며, 그 이상을 넘는 수준의 교육을 위해서 국가가 대학교와 산마리노 외부의 교육기관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수도인 산마리노는 티타노 산 서쪽면으로, 산 정상의 요새 아래쪽에 높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3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기슭의 더 아래쪽에 있는 보르고마조레는 수세기 동안 산마리노의 상업 중심지였다. 말라테스타가(家)의 성채 아래쪽에 있는 세라발레는 농업과 공업이 발달한 곳이다. 9개 지구 대부분이 농촌의 모습을 유지하지만 공업시설들이 수세기 동안 이어진 농촌 생활 속으로 밀려들고 있다.

도로망이 산마리노와 주변의 이탈리아 지역들을 연결해준다. 각 지구들과 리미니를 연결해주는 장거리 버스 노선이 여름에는 직접 아드리아 해안가와 연결된다. 보르고마조레에서 수도까지 케이블카가 운행



[역사]

산마리노의 기원은 4세기 초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성(聖) 마리누스와 그리스도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12세기에 이르러 산마리노는 자체의 법령과 콘술(집정관)에 의해 통치되는 자치체로 발달했다. 이 자치체는 고립된 위치와 산의 요새 덕택에 이웃한 주교와 영주들의 침범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근처 해항(海港)인 리미니를 지배하던 말라테스타 가문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우르비노를 지배하던 그 가문의 경쟁자 몬테펠트로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15세기 중엽에는 가문들의 집회인 '아렌고'에서 뽑힌 60명으로 구성된 대의회가 통치하는 공화국이었다. 16세기 체사레 보르자에 의한 점령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의 격렬한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르네상스 시대가 지난 후에도 이탈리아 자치 도시국가의 한 유물로 존속할 수 있었다. 18세기에는 과두정치와 교황령에 합병시키려는 시도로 인해 한동안 국력이 쇠퇴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이 공화국의 독립을 존중했으며, 영토를 넓혀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1797).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에 열린 빈 회의(1815) 역시 이 나라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했다. 19세기의 이탈리아 통일운동 기간에 산마리노는 주세페 가리발디를 비롯한 혁명가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이탈리아가 민족국가가 된 후 일련의 조약들(최초의 것은 1862)을 통해 독립을 승인받았다.

 

 

[리히텐슈타인]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6

리히텐슈타인 [Liechtenstein]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있는 유럽의 작은 독립주권 공국(公國).
수도는 파두츠이다. 면적 160㎢, 인구 34,100(2003 추계)

공식 명칭 : 리히텐슈타인공국(Principality of Liechtenstein)
인구 : 34.500
면적 : 160 ㎢
수도 : 파두츠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공/총리
공식 언어 : 독일어
독립년월일 : 1806. 7. 12
화폐단위 : 스위스프랑(Swiss franc/Sw F)

[자연환경]

동부의 2/3는 중앙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레티콘 대산괴의 험준한 산기슭에 있는 언덕들로 이루어져 있다. 산들의 높이는 1,800∼2,623m이다. 고도가 낮은 사면들은 상록수림과 고산지대 꽃나무들로 덮여 있으며, 벌거벗은 산꼭대기에는 눈이 덮여 있다. 이 산맥에는 3개의 큰 계곡이 있으며, 자미나 강이 흐른다. 서부는 라인 강 유역의 범람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은 일 강 유역과 더불어 북쪽으로 넓어지는 삼각주 저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강유역은 한때 습지대였으나, 1930년대에 만든 강 수로 덕분에 비옥한 토양을 농업에 이용하기가 매우 적합해졌다. 기후는 온화하며 푄이라고 하는 따뜻한 남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연강우량과 적설량은 지역에 따라 914∼1,143㎜에 이른다. 겨울에는 기온이 -15℃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여름에는 낮 평균 최고기온이 20∼28℃를 나타낸다.

이러한 기후조건으로 인해 산악지대에서 잘 자라지 않는 포도와 옥수수 재배가 가능하다. 이 나라에는 매우 다양한 식물들이 자란다. 갈대·새눈무늬앵초·난초류뿐만 아니라 수생 서양톱풀과 쇠뜨기말을 찾아볼 수 있다. 숲은 유럽산너도밤나무, 보통 단풍나무, 노르웨이단풍나무, 플라타너스, 참피나무, 느릅나무, 서양물푸레나무 등이 자라는 복합삼림지대로 이루어진다. 동물로는 붉은 사슴, 몸이 작고 날쌘 노루, 영양, 산토끼, 마아못, 검은 멧닭, 꿩, 갈색 뇌조, 자고새, 여우, 오소리, 담비, 족제비, 흰담비 등이 있다.



[국민]

국민들은 500년 이후 이 지역에 들어온 알레마니족의 후손들이다. 공식 언어는 독일어이나, 국민들은 아직 발음과 어휘가 이 나라 특유의 형태로 변화한 알라만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스위스의 발레 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의 후손인 발지인들은 13세기말 트리젠베르크에 정착했으며 아직도 아주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국민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을 믿는다.



리헤텐슈타인은 인구가 3만 명 밖에 안 되지만 한 해동안 국제 특허를 1천건이상 출현할 정도로 독창성이 아주 중요하다. 세계에서 상기 좋은 나라를 선정할때마다 스위스와 함께 1,2위를 다툴만큼 경치가 수려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 여름철이나 겨울철에 휴양지로 사랑을 받고 있다.

[경제]

상업성이 있는 천연자원이 전혀 없으며, 목재를 포함한 거의 모든 원자재는 수입해야만 한다. 따라서 산업화가 되었는데도 아직 다른 선진국들이 갖는 공해 문제를 겪지 않고 있다. 산맥의 사면지대 생태계를 보존하고 침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삼림지역은 보호구역으로 되어 있다. 중공업은 없고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전국에 퍼져 있다. 제조업으로는 금속세공, 의약품, 광학 렌즈, 전자 장비, 식품 가공, 소비재 생산 등이 있다. 1921년 스위스 통화를 채택했으며, 1923년 스위스 관세동맹에 가담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적고 그나마 감소하고 있는데도 농가 규모는 점차 커지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축 사육과 낙농업이 중심이 된다. 오래전부터 재배해온 작물로는 옥수수와 감자가 있고, 곡물과 야채 생산량이 증가하고 있다. 포도원은 거의 없으며 있는 것은 그나마 작은 규모로 분산되어 있다. 고산식물이 자라는 사면지대는 여름에 방목지로 쓰인다.

관광업은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주변의 여러 유럽 국가에서 오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이 주로 찾는 곳은 파두츠 시 부근이다. 여러 외국기업들이 이곳에서 사업자 등록을 함으로써 이 나라의 조세수입에 도움을 준다. 또한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은행 거래의 비밀이 절대적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금융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웃 여러 국가와 연결되어 있는 훌륭한 도로망이 갖춰져 있다. 파리와 빈 사이의 특급 노선의 일부인 철도가 북부지역을 지나며 공항은 없다. 공업이 발달한 남쪽의 라인 강 상류 지방에는 파두츠·발저·트리젠·트리젠베르크·샨·플랑켄 등의 행정구가 있다. 북쪽에 있는 라인 강 하류 지방은 에셴·마우렌·감프린·루겔·셸렌베르크 등의 행정구로 이루어져 있다. 전후에 산업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주민들이 보다 큰 행정구로 이주하고 있다. 가장 인구가 많은 행정구는 행정·상업 중심지인 파두츠와 주요공업지역인 샨이다.



[정치·사회]

입헌군주국으로 행정권은 왕과 국민들이 공동으로 갖는다. 왕위 계승은 부계로 세습되며, 왕가의 규율에 따라 결정된다. 1921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4년의 임기로 선출되는 15명의 의원이 단원제 의회를 구성한다. 선거권은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에게 주어진다. 1984년 20세 이상의 여자들에게도 전국 단위의 투표에 참가할 수 있는 선거권을 주었으나, 아직도 지방 단위의 투표에는 참가할 수 없다. 행정부는 총리 1명과 부총리 1명, 의회의 발의에 따라 4년 임기로 왕이 지명하는 3명의 장관들로 구성된다. 11개의 시는 3년 임기로 선출되는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하나 중앙정부의 감독을 받는다. 정부는 약간의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으나 상비군은 1868년 해체되었다.

공중보건 문제는 국가 의료담당관이 책임자로 되어 있는 공중보건위원회가 관장한다. 여러 소규모 의료기관들 외에 리히텐슈타인이 지원하고 있는 부근의 우수한 스위스 의료기관들로부터도 혜택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의무적 보험제도를 통하여 사회보장을 실시하고 있으며, 이러한 종합적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재정은 고용주·피고용인·정부가 공동으로 부담하나, 모든 재정적자는 정부가 부담한다. 교육은 국가 교육원이 감독한다. 학제는 초등학교 8년, 중등학교 3년, 직업학교, 문법학교, 상업고등학교, 음악학교, 기술대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7세 이상의 모든 국민들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문화]

파두츠의 중심부에 있는 잉글랜드 하우스에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히텐슈타인 왕들의 예술 소장품 가운데는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여러 화가들이 그린 유명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국립 예술박물관(1969)도 있다. 우정박물관(1930)에는 1912년 이후 국가에서 발행한 우표를 포함하여 많은 우표들이 전시되어 있다. 파두츠에 있는 리히텐슈타인 국립박물관에는 주로 로마 시대와 그 이전의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1년 리히텐슈타인 국립도서관은 공공재단으로 세워졌다.

[역사]

라인 평야는 항상 정착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수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에서 독립한 두 군주국인 파두츠와 셸렌베르크가 라인 강 유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 두 군주국으로 이루어진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1719년에 세워졌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1806∼15년 라인 연맹에 가입했고 1815∼66년에는 독일연맹에 참가했다가, 1866년 독립했다. 유서깊은 파두츠와 셸렌베르크 지역은 아직도 각각 라인 강 상류 지방과 라인 강 하류 지방으로 구별되면서 별도의 선거구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체로 이웃 유럽 국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고 고요한 전원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주 급격하게 산업화가 이루어졌다.

[한국과의 관계]

양국은 아직 외교관계가 수립되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은 외교·군사·재정을 스위스에 일임하여, 스위스에 유일한 대사관을 두고 있을 뿐이다.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 22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1991년 11월 현재 대한수입은 1만 달러이고, 대한수출은 70만 달러이다.

 

 

[마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7

마셜 제도 [Marshall Islands]

정식 이름은 마셜 제도 공화국(Republic of the Marshall).
중앙 태평양에 있는 자치공화국.

공식 명칭 : 마셜제도공화국(Republic of the Marshall Islands)
인구 : 54,600
면적 : 181 ㎢
수도 : 마주로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 언어 : 마셜어·영어
독립년월일 : 1986. 10. 21
화폐단위 : 미국달러(U. S. dollar/U.S.$)

평행으로 달리는 2개의 환초열도인 동쪽의 라타크 또는 일출열도(日出列島)와 서쪽의 랄리크 또는 일몰열도(日沒列島)로 이루어져 있다. 두 열도는 약 200km의 간격을 두고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약 1,290km에 걸쳐 뻗어 있다. 크고 작은 섬 수가 1,200개 이상이며, 29개의 나지막한 환초와 5개의 산호섬 중 표고가 고조선(高潮線)에서 6m를 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섬들은 해저로부터 융기된 순상화산 위에 산호가 쌓인 것들이다. 마셜 제도의 섬들은 태평양의 약 46만 6,000㎢에 이르는 면적에 걸쳐 흩어져 있다. 그중 가장 큰 환초는 콰잘런이고, 주요섬은 훌륭한 항구가 있는 잘루이트이며, 수도는 마주로 섬에 있는 대리트울리가달랍(D. U. D.)이다. 비키니·에니위탁 환초는 미국의 핵무기 시험장으로 이용되었다(1946∼58).



기후는 열대성으로 모든 섬의 연평균기온이 28℃이다. 강우량은 섬마다 다른데, 북쪽 환초에서는 500∼800㎜이고 남쪽 환초에서는 4,060㎜이다. 마셜 제도의 환초는 보통 길이가 약 40km이다. 하나의 초호를 둘러싸고 있는 불규칙한 타원형의 산호초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호초를 따라 작은 섬들이 자리잡고 있다. 토양은 주로 모래성분으로 비옥도가 낮다.

마셜 제도의 원주민들은 미크로네시아인들이다. 가장 인구가 많은 환초는 마주로와 콰잘런으로 마셜 제도 전체 인구의 약 60%가 이 두곳에서 살고 있다. 주민들은 주로 전통적인 마을을 이루면서 살고 있으며 주민 대부분이 그리스도교도이다. 마셜어와 영어가 통용된다.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과 어업, 돼지·가금(家禽) 사육이 주요경제활동이고, 주요작물로는 코코넛·판다누스·빵나무·타로토란·칡 등이 있다.

수출용 코프라 케이크, 야자유 생산, 미국 미사일 기지에 대한 콰잘런 토지임대료가 주요수입원이다.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선박들이 관광객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섬 사이를 운항한다. 마주로에는 민간조선공업 단지가 하나 있으며 초호 안에 훌륭한 정박소가 있는 환초들이 많다.

마주로와 콰잘런에는 국제공항이 있으며 국내선 비행기 몇 편이 환초들 사이에 취항하고 있다(→ 미크로네시아 지리적 인종).



콰잘린(kwajalein)섬의 활주로

1529년 스페인의 항해가 알바로 사베드라에 의해 발견된 마셜 제도는 자본이 부족하여 자원개발을 촉진시키지 못했다. 1885년 독일이 마셜 제도를 보호령으로 선포했고 1914년에는 일본이 점령했으며 1919년 이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콰잘런과 에니위탁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은 뒤 미국이 점령했으며 1947년 미국 관할의 국제연합 태평양제도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1958년 핵실험이 중단되었으며 정화사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비키니와 에니위탁은 1980년대초만 해도 주민들이 되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주거지 재조성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콰잘린 환초(環礁_kwajalein atoll)

1979년 마셜 제도 주민들이 헌법을 승인함으로써 자치공화국이 되었다. 1982년 마셜 제도는 미국과 자유연합협정을 맺었고, 이는 1983년 국민투표를 통해 승인되었다. 이 협정에는 미국이 마셜 공화국 내의 안보와 국방을 담당하며 공화국에 재정지원을 제공하기로 규정되어 있다. 신탁통치는 1986년에 해제되었으며 마셜 제도 공화국은 미국과 자유연합체제 속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비키니 환초(Bikini atoll)

정부는 33명으로 구성되는 단원제 국회인 니티젤라가 선출하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다. 이로지('추장'이라는 뜻) 평의회는 주로 전통법규와 관습에 대해 자문하는 기능을 갖는다. 의료는 마주로에 있는 병원과 다른 6개의 섬에 있는 진료소에서 담당하며 공립학교와 교회가 운영하는 사립학교들이 있다. 면적 181㎢, 인구 56,400(2003).

 

 

[세인트키츠네비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8

세인트키츠네비스 [Saint Kitts and Nevis]

Saint Christopher and Nevis라고도 함.
공식 이름은 세인트키츠네비스 연방(Federation of Saint Kitts and Nevis).
카리브 해 동쪽 소(小)앤틸리스 제도에 속하며 2개의 섬으로 구성된 주권 민주국가

공식 명칭 : Federation of Saint Kitts and Nevis
인구 : 46,300
면적 : 269 ㎢
수도 : 바스테르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영국 국왕/총리
공식 언어 : 영어
독립년월일 : 1983. 9. 19
화폐단위 : 동카리브달러(Eastern Caribbean dollar/EC$)



[자연환경]

지형학적으로 세인트키츠 섬과 네비스 섬은 두 섬의 중심부를 차지한 화산대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길이 37km, 폭 8km의 세인트키츠 섬은 남동쪽의 길고 좁은 반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타원형을 이룬다. 섬의 북쪽 절반은 산악지대로, 최고봉인 리아무이가 산(1,156m)의 숲이 우거진 분화구에 호수가 형성되어 있다. 세인트키츠 섬 남동쪽에는 폭 3km의 내로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네비스 섬이 있다. 원형을 이루는 네비스 섬은 면적이 93㎢이며 둘레에는 산호초가 늘어서 있다. 네비스 섬은 거의 전체가 하나의 산으로 형성되었으며, 네비스 산(985m) 북쪽 사면에 해발 309m의 새들 산이 있다. 해변가에는 세인트키츠 섬과 마찬가지로 길게 뻗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무역풍대에 자리잡은 이들 열대 섬은 기후가 온화하다. 때때로 21℃ 이하이거나 32℃ 이상인 경우도 있으나 연평균기온은 27℃ 정도이다. 연평균강우량은 세인트키츠 섬이 1,397㎜, 네비스 섬이 1,219㎜이지만 지역과 고도에 따라 다양한 분포가 나타난다. 카리브 해에서 발생하는 허리케인의 길목에 위치하여 가끔 심각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울창한 초목들이 산지가 많은 내륙을 덮고 있지만, 식생의 종류와 범위 역시 고도에 따라 다양하다. 고도가 높은 곳은 풀만 자라고 있어 방목지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경사면도 목초로 덮여 있으나 아래로 내려가면서 울창한 열대우림 지역까지 이어진다.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많은 야생식물들이 인공재배 식물들로 대치되고 있다.

[국민]

평화로운 원주민이었던 아라와크 인디언을 침략한 카리브 인디언들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주의자들에게 다시 침략을 당했다. 현재 인구는 4만 3,000명 가운데 대부분이 세인트키츠네비스에 노예로 끌려왔던 아프리카 흑인들의 후손이다. 유럽인과 아프리카계 흑인 사이의 혼혈이 소수를 차지하며, 유럽계와 아시아계도 약간 있다. 종교 분포를 보면 영국성공회와 감리교도를 포함한 개신교 계통이 우세하고, 모라비아교, 로마 가톨릭, 바하이교 교도들도 있다. 공용어는 영어이다. 주민 대부분은 인구 1만 8,500명(1985)의 수도 바스테르와 1,700명(1985)의 찰스타운에 몰려 산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구증가율이 0%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다. 높은 유아사망률, 자연사망률, 이민율로 지역 전체의 연인구증가율은 낮은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경제]

세인트키츠네비스는 정부의 제조업 장려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경사회의 양상을 띠고 있다. 설탕 생산은 식민지시대 이래로 지금까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국가경제 상황이 설탕시장의 변동세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다. 네비스 섬에서는 주로 면화·채소·코코넛 등을 생산한다. 과일 및 채소 재배와 가축사육도 주된 농업활동이다. 계절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관광업도 경제에 큰 몫을 한다. 제조업은 제당업을 비롯해서 건축·전자·의류·음료 부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은 설탕이 가장 중요한 수출품목으로 최근 수년 동안에도 수출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밖에 당밀·의류·신발류·전자기계·음료 등도 수출하며, 식품·연료·화학제품·기계류·금속제품·건축자재 등을 수입한다. 교역국은 주로 미국, 영국, 트리니다드토바고, 푸에르토리코,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캐나다 등이다. 국민총생산(GNP)은 인구에 비해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이지만, 1인당 GNP는 카리브 해 연안국가 가운데 낮은 편에 속한다. 설탕무역과 관광업에 역점을 두어 교통이 상당히 발달했다. 도로 포장률은 약 40%이며, 바스테르 근처의 골든록 공항과 네비스 섬의 소규모 뉴캐슬 공항 등 공항시설이 두 군데 있다. 주요항구인 바스테르는 1981년에 심해항만 설비를 개선하여 수출입 및 관광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철도교통은 설탕 제조업체가 운영하는 구간(58km)에 한정되어 있다.

[정치·사회]

세인트키츠네비스 연방은 입헌군주국이며 영국 연방의 일원이다. 최고 국가원수인 영국 국왕이 임명한 총독이 왕실을 대신하여 통치권을 행사한다. 행정부의 수반인 총리가 다른 각료들과 함께 내각을 구성한다. 의회는 국왕과 입법부 의원으로 구성되며, 의원 가운데 일부는 임명된다. 네비스 섬 의원은 의석의 1/3을 차지한다. 선거권은 18세부터 주어진다. 네비스 섬은 연방 입법부 대표를 두는 한편 자체 입법권을 가지며, 연방제 내에서 어느 정도 자치권을 행사한다. 헌법에도 네비스가 연방으로부터 탈퇴할 경우에 대해서 언급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1838년의 노예해방 이후 세인트키츠 섬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토지 대부분은 여전히 설탕농장주들이 소유하고 있다. 신생국가에서의 만성적인 주기적 실업과 부적절한 거주환경은 이곳에서도 문젯거리이다. 네비스 섬에서는 가파른 지형 때문에 사탕수수 농사가 실패했고, 1838년 이후로 섬 전체에 널리 퍼진 해도면 소작 역시 1970년대에 이르러 많은 땅이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관목림지대로 변환되면서 어려워졌다. 국민을 위한 보건시설이 정부 차원에서 마련되었으며, 열대병은 사실상 퇴치되었다. 교육은 5∼16세 아동들에게 의무적으로 실시된다. 현재 성인 인구의 90%가량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정부가 소유한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시설이 세인트키츠 섬에 있으며, 현대식 통신망이 연방 전체에 갖추어져 있다.

[문화]

바스테르의 공공도서관에는 서인도제도 문화에 관한 훌륭한 귀중본들과 한때 세인트키츠 섬에서 융성했던 당시의 카리브 해 문화 유물들이 소장되어 있다.

[역사]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카리브인이 차지하고 있던 이곳을 방문했다. 콜럼버스는 이곳에 자신의 수호성인 이름을 따서 세인트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그 이름은 1623년 영국에서 온 정착민들에 의해서 세인트키츠로 짧아졌다. 이들 영국인은 서인도제도에서 처음으로 서해안에 있는 올드로드에 영국 식민지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네비스라는 이름도 1493년 콜럼버스가 방문했을 때, 구름이 걸린 섬의 산봉우리를 눈[雪]에 비유하여 '라스 니에베스'(눈)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네비스 섬은 1628년 영국인들에 의해 정착이 이루어졌다.

1627년 프랑스인들이 세인트키츠 섬에 정착했다. 그후 17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이 심화되기 시작하여 100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1782년 브림스톤힐에서 영국이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물리친 후 세인트키츠 섬의 영국 통치가 확립되었다. 1783년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세인트키츠 섬과 네비스 섬은 완전히 영국 소유가 되었다. 앵귈라를 포함한 근처의 섬들은 1882년에 통합을 이루었다. 1958년에 서인도 연방에 가입하여 1967년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남아 있었다. 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앵귈라 섬들은 1967년 2월 27일 영국의 연방주가 되었다. 섬들은 하나의 단위로서 내정자치권을 지녔지만, 국방 및 외교 문제는 영국이 관할했다. 앵귈라 섬 사람들은 세인트크리스토퍼 섬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1967년 7월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영국이 개입하여 1971년 7월의 앵귈라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앵귈라는 영국의 직속 통제를 받게 되었다. 앵귈라와 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와의 연합 관계는 1980년에 공식적으로 단절되었다. 1982년 런던에서 제헌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네비스에 관련된 특별 조항에 대해 논쟁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1983년 9월 19일 세인트크리스토퍼네비스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1988년 국명이 공식적으로 세인트키츠네비스 연방으로 바뀌었다.

[한국과의 관계]

세인트키츠네비스는 1983년 9월 19일 한국과 외교를 수립했다. 같은 해 11월 29일 케네디 A. 시몬스 총리가 방한했으며 1985년 4월 22일에는 아린델 총독 부처가 비공식 방문했다.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관계가 깊어질 전망이다.

 

 

 

[몰디브]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09

몰디브 [Maldives]

Maldive Islands라고도 함. 정식 이름은 몰디브 공화국(Republic of Maldives/Divehi Jumhuriyya)
인도양에 있는 제도.

공식 명칭 : 몰디브공화국(Republic of Maldives)
인구 : 289,000
면적 : 298 ㎢
수도 : 말레
정체·의회형태 : 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 언어 : 디베히어
독립년월일 : 1965. 7. 26
화폐단위 : 몰디브루피야(Maldivian rufiyaa/Rf)

1,300여 개의 작은 산호섬과 사주(砂洲)가 포도송이 모양 또는 환초(環礁)를 이루고 있으며, 그중 202개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 남북으로 820km, 동서로 130km 이상 퍼져 있다. 가장 북쪽에 있는 환초는 인도 본토에서 남남서쪽으로 약 600km 떨어져 있으며 수도가 있는 말레 섬을 포함한 중심지역은 스리랑카 남서쪽 약 645km 지점에 있다. 면적 298㎢, 인구 285,000(2003 추계).



[자연환경]

고대의 해저화산 산맥 꼭대기에 산호가 쌓여 형성되었으며 섬들 전체가 저지대로, 해발높이가 모두 1.8m 이하이다. 보초(堡礁)로 둘러싸여 있어서 극심한 계절풍의 피해는 없다. 5∼8월의 우기에는 남서계절풍이 불어오며 12∼3월은 북동계절풍으로 인해 건조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연평균기온은 24∼30℃이고. 연평균강우량은 약 2,130㎜이다. 환초에는 모래해변과 초호가 있으며 빵나무, 열대성 관목과 함께 야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보초와 초호, 제도 부근의 바다에는 물고기가 많다. 바다거북을 잡아 식용으로 하며, 그 기름은 이 지방 고유의 약으로 쓴다.



[국민]

몰디브인들은 혼혈민족으로 공용어는 인도유럽어족의 하나인 디베히어이며 아랍어·힌디어·영어 등을 사용한다. 처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BC 5세기 인도 남부와 실론(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온 불교를 신봉하던 드라비다인과 싱할라인들이었다고 한다(→ 드라비다 지역인종). 아랍 여러 나라와 말라야·마다가스카르·인도네시아·중국의 상인들이 수세기에 걸쳐 이 제도를 찾아왔으며, 12세기에 지금의 국교로 되어 있는 이슬람교가 채택되었다. 몰디브에서 유일하게 비교적 큰 정착지인 말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주민들은 산재하는 환초들 가운데의 작은 섬들에서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다. 약 20개의 섬에 1,000명 이상의 주민들이 있으며 남쪽에 있는 섬들이 북쪽에 있는 섬들보다 주민이 더 많다. 출생률은 비교적 높으나 사망률은 아주 낮다. 총인구 중 2/5 이상이 15세 이하이다.



[경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몰디브는 어업·관광·해운업을 기반으로 경제를 꾸려가고 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주민들은 대부분 화폐경제와는 무관하게 어업과 야자 채집, 기장·옥수수·참마·사탕수수 재배로 살아간다. 작은 섬들에 흩어져 있는 경작지는 극히 적으며 주식은 거의 전부 수입된다. 예부터 경제의 기반이 되어 온 어업은 아직도 가장 중요한 분야로서 외화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체 노동력의 약 절반이 여기에 종사하고 있다. 참치가 가장 많이 잡히는데 어선의 상당수가 기계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낚시로 잡는다. 어획고의 대부분은 냉동과 수출용으로 외국회사들에게 판매한다.

몰디브 국영 선박관리회사는 국가가 운영하는 선박 회사로 몰디브 최대 영리단체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관광업은 급속도로 발전하는 경제부문이다. 수많은 섬 휴양지와 말레에 있는 현대식 호텔에는 겨울철에 찾아오는 서유럽 관광객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공업은 대체로 수공업이나 가내공업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야자 껍질로 만든 섬유와 그 제품의 제조·선박건조·건설이 있다(→ 코이어). 수입품으로는 식품(주로 쌀)과 같은 소비재와 직물, 의약품, 석유제품이 있다. 물고기가 수출품의 태반을 차지하는데, 주로 가다랭이를 산 채로 또는 말려서 수출한다. 싱가포르·타이·스리랑카·일본·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다. 예부터 무역수지의 적자가 극심했다. 선박이 환초 사이의 중요한 수송수단이 되고 있으며 스리랑카·싱가포르·인도로 가는 정기선박편이 있다.

[정치·사회]

국가의 수반은 대통령이며 시민의회(마즐리스)의 지명을 받아 5년 임기로 일반투표에 의해 선출된다. 단원제인 시민의회는 40명의 시민대표와 대통령이 지명하는 8명의 대표로 구성된다. 40명의 시민대표는 말레 섬에서 2명, 행정구역으로 구분한 19개의 환초 집단에서 각각 2명씩 5년 임기로 선출된다. 재판관들은 대통령에 의해 지명되며 이슬람 교리에 따라 사법권을 관할한다. 대부분의 몰디브인들은 재래식 방법으로 병을 치료한다. 주로 위장염·장티푸스·콜레라·말라리아 등의 질병에 잘 걸리며 평균수명은 약 59세이다. 말레에는 작은 병원이 하나 있다. 몰디브에는 〈코란〉의 낭독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학교(마크타브스)와 디베히어 학교, 영어로 가르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등 3가지 공립교육기관이 있다. 영어학교에서만 표준 교육과정을 가르치며 중등학교 수준의 교육을 시킨다. 취학 적령 아동 중 약 2/3만이 학교에 다닌다.

[역사]

이 군도에는 일찍이 BC 5세기부터 실론과 인도 남부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순회설교하던 이슬람교 성인이 1153년에 이곳 주민들을 이슬람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포르투갈인들은 1558년부터 1573년 추방되기 전까지 말레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17세기에 이 제도는 실론을 지배하던 네덜란드인의 보호를 받는 술탄 군주의 영토였으며, 1796년 영국이 실론을 점령한 뒤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그것은 1887년의 협정으로 공식화되었다(→ 대영제국). 행정권은 대부분 술탄이나 술탄의 왕비에게 있었으며 1932년 처음으로 민주헌법이 선포되었으나 통치권은 여전히 술탄에게 있었다. 1953년 공화국으로 선포되었으나 그해에 다시 이슬람교 군주국으로 복귀되었다. 1965년 정치적으로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으며, 1968년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되고 이전의 이슬람교 군주제도는 폐지되었다. 이슬람교는 계속 국교로 남았다. 1976년 3월 29일 마지막 영국 군대가 철수한 뒤 이 날을 독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몰디브는 아시아의 낙원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인도에서도 남서쪽으로 적도 가까운 곳에 있으며, 1,000여 개 이상의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약 90개의 섬이 리조트와 각종 휴양지로 사용되고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천혜의 관광지답게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존하여 깨끗한 환경 속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입니다.

 

 

[몰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10

몰타 [Malta]

공식 이름은 몰타 공화국(Repubblika T Malta/Republic of Malta).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작은 군도(群島).

공식 명칭 : 몰타공화국(Republic of Malta)
인구 : 401,000 면적 : 315 ㎢
수도 : 발레타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몰타어·영어
독립년월일 : 1964. 9. 21
화폐단위 : 몰타리라(Maltese lira/Lm)
국가(國歌) :Lil din l'art helwa, l'Omm li tatna isimha

몰타는 사람이 살고 있는 3개의 몰타·고초·코미노 섬과 4개의 작은 무인도로 이루어진 국가로서 시칠리아 남쪽으로 9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전략적으로 중요해서 지중해 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북아프리카·중동의 고대문화와 부상하는 유럽 간의 상호작용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수도는 발레타이다. 면적 316㎢, 인구 399,000(2003 추계).



[자연환경]

몰타 공화국 전체 면적 가운데 78%를 차지하는 몰타 섬의 핵심부는 서쪽에서 높이 185~245m에 달하는 높은 산호질 석회암 고원인데, 그 주위를 둘러싼 검푸른 점토질의 경사지는 남쪽으로 높이 125m인 글로비게리나(해양 원생동물) 석회암 지역으로 낮아지고 있다. 이같은 지질학적인 조건들은 물이 여과되어 지하수로 저장되기에 유리하다.

몰타 섬과 사람이 거주하는 다른 섬들의 해안선은 항구, 만, 백사장, 암석투성이의 작은 만 등으로 들쭉날쭉하다. 또, 이들 섬에는 영구적인 강이나 호수가 없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으로 무덥고 건조한 여름과 서늘하고 비가 많은 겨울, 그리고 서리·눈·안개가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강우량은 약 500㎜이다. 기온이 높고 일정한 강이 없기 때문에 토양 형성이 느리며, 따라서 자연적인 식생(植生)이 드물다. 담수 부족을 다소나마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에서 염분을 제거하는 공장이 건설되었다.



[국민]

몰타를 구성하는 주민은 이탈리아·아랍·영국·페니키아계 혼혈이 많다. 대부분의 주민이 현지 태생이며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공용어는 영어와 몰타어이다. 인구 증가율은 계속하여 상향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전체적인 자연증가율이 비교적 낮아 전형적인 선진국 수준을 밑돌고 있다. 낮은 인구 자연증가율과 일맥상통하게 몰타에서는 인구의 노령화현상이 두드러진다. 보건관리가 개선됨으로써 영아사망율이 전형적인 선진국가의 수준으로 감소했으며 평균수명 역시 이를 반영하고 있다. 과거에 몰타를 떠났던 많은 이주민들이 1975년 이후에 돌아오고 있어서 사회적·경제적으로 부담을 주고 있다. 전인구의 4/5 이상이 도시에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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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대체로 관광업·경공업·해운업·농업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체제이다. 마르삭스록 만에 새로 생긴 항구는 특히 지중해의 주요 적환지(積換地) 기능을 하여 몰타의 무역을 크게 신장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인구 증가율보다 더 빠른 비율로 증가하고 있는 1인당 국민총생산은 세계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전국토 면적의 약 44%가 경작 가능한 땅으로 채소·곡물·감자·감귤류를 포함한 경작물 대부분이 계단식으로 된 좁고 긴 지대에서 재배된다.

몰타는 농산물을 자급자족할 수 있지만 농업생산이 국민총생산(GN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4%에 불과하다. 광물자원은 빈약하며 광업은 주로 글로비게리나 석회암 같은 건축용 자재 생산에 한정되어 있다. 제조업은 GNP의 1/4 정도를 차지하며 섬유·의류·신발·전기기구·플라스틱 등을 수출한다. 정부는 몰타개발공사를 통하여 공업발달을 도모하고 있다. 관광업은 몰타의 주요산업이자 외화 수입원인데 관광객 대부분이 영국에서 온다. 1979년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정부 수입이 급격히 감소했고 재정적자가 초래되었다.

현재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정부 재정은 국민보험·소득세·관세·소비세가 최대 수입원이고 지출은 주로 국민보험수당·의료·교육에 할당된다. 국가의 기본설비는 매우 잘 갖춰져 있어서 거의 모든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 드라이독이 1973년에 국영화되었고 선박 건조·수리가 중요한 산업이다. 몰타의 주요항구와 국제공항은 발레타에 있다. 국제수지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및 중반에 적자를 기록했다. 1980년대초에 섬유산업이 유럽공동체(EC)의 보호주의 정책으로 불리한 영향을 받았다. 최대 무역상대국은 독일·영국·이탈리아이다.

[정치·사회]

1974년에 기존의 1964년 헌법이 개정되면서 몰타는 영연방의 구성국이 되었다. 단원제 의회가 입법권을 행사하고, 헌법상의 국가수반인 대통령이 5년 임기로 의회에 의해 선출된다. 또한 대통령은 다수의석을 차지하는 당의 총수를 총리로 임명한다. 주요정당들로 사회민주주의 계열인 몰타 노동당과 기독교민주주의 계열인 국민당이 있다. 1854~73년에 성문화된 몰타 법은 대체로 나폴레옹 법전과 나폴레옹 1세 시대의 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몰타 주민은 높은 생활수준을 누린다. 일련의 사회보장법에 따라 질병·상해·실직·취업불능에 대해 보상금이 나오고 가족·자녀 수당, 노후·장애자 연금 등이 보장된다. 공공 의료기관에서 다루는 입원과 특정한 개인 공공의료는 무료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심각한 문제였던 주택부족현상은 전에 영국군과 그 가족들이 쓰던 주거·사무실 지역을 전환하여 이용함으로써 상당히 줄어들었다. 교육은 6세부터 16세까지 의무교육이며 공립학교에서 무상교육이 이루어진다. 옛날의 구(舊)대학교와 신(新)대학교가 1980년에 몰타대학교로 통합되었다. 인구가 적은데도 영어와 몰타어로 된 출판활동이 매우 활발하며 정기간행물이 특히 많은데 그중 정치적 성향을 띤 것이 많다. 영어와 몰타어로 다중 방송되는 텔레비전은 프로그램 대부분이 지역적으로 편성된다.

[문화]

민속전통은 주로 축제를 중심으로 발달해 왔으며 이 축제의 특징은 마을 수호신을 기리는 불꽃놀이와 행렬이다. 몰타에는 독특한 신석기시대 유적 외에도 17∼18세기에 꽃피웠던 건축유파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들이 있다. 이탈리아 화가들인 카라바조와 마티아 프레티가 이곳에서 수년을 보냈으며 마티아 프레티가 그린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많은 교회를 장식하고 있다. 몰타 문학은 민족시인이었던 둔 카름의 시들로 해서 가치가 높아졌다.

[역사]

몰타에 남아 있는 가장 초기의 고고학적 유적은 그 기원이 BC 38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페니키아인(人) 취락의 증거로 여겨졌던 거석 유적들은 현대 고고학계에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세운 것으로 밝혀져서 사실상 지중해지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손꼽히고 있다. BC 8세기 또는 7세기초에 카르타고인이 이 섬에 상륙한 증거가 있으며, 이들은 섬 주민을 가혹하게 지배하면서 많은 공물을 징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218년에 로마 지배 밑으로 들어간 뒤 자치도시의 특권을 부여받았다. AD 60년에 사도 바울로가 난파당했던 만(灣)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섬 주민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395년 로마 제국이 분열하면서 동로마 제국에 할당되었으며, 그후 870년 아랍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1091년 당시 시칠리아 백작이었던 노르만 귀족 루제로 1세가 소규모의 일행과 함께 몰타에 상륙하여 아랍인들을 물리쳤다. 이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권이 재수립되고 주교들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점차 강화되는 봉건적인 관례로 몰타는 16세기 초반까지 봉건영주들이 계속 지배하게 되었다. 1530년에 몰타는 구호기사단에 양도되었다. 16~18세기에 투르크의 무역을 집요하게 방해한 이들 기사단은 몰타 섬 원주민과는 관계가 소원하여 별다른 사회적·경제적인 접촉이 없었다. 이들에 의한 통치는 1798년 6월 나폴레옹이 몰타 군도를 점령했을 때 끝났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몰타 군도는 구호기사단에게 반환되었으나 몰타인들은 이에 저항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지되고 '몰타인의 권리선언'이 존중된다는 조건으로 대영제국의 국왕을 몰타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 조건들은 1814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에 의해 수용·승인되었다. 영국 지배 밑에서 몰타의 정치적 지위는 계속 헌법이 허용·정지·폐지되는 일련의 변천을 겪었다. 경제는 이곳 군사시설에 대한 영국의 필요성에 따라 좌우되었고 유명한 조선소가 발달해서 경제적 대들보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몰타는 지역 수비대를 구성했고 많은 해군을 차출했다.

영국이 몰타의 장관들과 함께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긴 했지만 몰타는 1921년에 자치정부를 이루었다가, 1936년에 다시 식민지 정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가 참전한 뒤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폭격기들로부터 심한 공중 폭격을 받았다. 1942년 4월 15일 조지 6세는 몰타 군도에 영국 최고 시민훈장인 조지 십자훈장을 수여했는데 이 훈장이 영연방에 속한 지역에 수여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1964년 9월 21일 영연방에서 독립한 몰타는 1974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1979년 영국과의 동맹관계가 끝나자 몰타는 다른 나라들과의 협정을 통해 중립을 보장받으려고 애썼다. 1981년 10월 소련이 몰타의 중립적 지위를 지지한다는 협정에 서명했으며, 미국과의 협정체결도 계속 모색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1965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나 1971년 노동당 정권 발족 이후 양국관계는 동결상태에 있다. 한국에 직물의 심류를 수출하고 면직물·철강제품·차량부품·플라스틱 등을 수입하고 있다. 1991년 대한수입은 1,666만 달러, 대한수출은 1,270만 달러이다. 이곳에 한국 교민은 거주하지 않지만, 북한과는 1971년 12월 외교관계를 맺었고 1984년 5월 평양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했다.



바다의 요정 칼립소의 유혹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태풍을 만난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표류하다 우연히 칼립소의 섬에 다다르게 됩니다. 바다의 요정 칼립소는 첫눈에 오디세우스에게 반하게 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칼립소의 유혹에 빠져 7년 동안 섬을 떠나지 못하던 오디세우스는 제우스 신에게 간청한 후에야 간신히 이곳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를 사로잡았던 바다의 요정 칼립소가 살던 섬이 바로 몰타 공화국입니다. 그리스 신화의 무대가 된 곳이었던 만큼 섬 전체에서 신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몰타, 고조, 코미노 섬과 3개의 무인도를 포함해 총 6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4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몰타 공화국은 제주도의 6분의 1 크기로 전체 길이가 316km입니다. 이는 섬 전체를 돌아보는데 자동차로 하루가 채 걸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입니다. 또한, 몰타어와 영어, 이탈리아어가 통용되기 때문에 여행이 쉬운 편입니다. 항구와 도심 곳곳에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중세 건축물이 즐비하며, 외곽 쪽에는 유사 이전 인간이 만든 가장 오래된 유적과 구조물이 들꽃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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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녹색마당
글쓴이 : 녹색마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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