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Peru(2014 Dec)

7-2 화산도시 아레키파(Arequipa)

봉들레르 2015. 1. 28. 18:22

 

 

 

해발2380  Arequipa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레키파는 칠리 강 유역 해발 2,300m가 넘는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잉카 제국 때에 쿠스코에서 해안으로 연결되는 주요 길목이었다.

1540년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명령에 따라 이 지방에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재건된 곳으로,

원래 지명은 누에스트라세뇨라데라아순시온델바예에르모소(아름다운 계곡에서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였다.

아레키파 시는 꼭대기가 눈으로 덮인 해발 5,822m의 미스티 화산 기슭에,

눈덮인 몇몇 다른 산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체로 화산활동이 있을 때 발생하는 지진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1960년대에 심한 지진이 있었다. 연강수량은 약 100㎜, 연평균 기온은 14℃이다.

주변 지역의 기름진 땅에서는 곡류와 목초를 비롯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생산한다.

아레키파는 페루의 양모가공처리 중심지이며 다양한 산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페루 남부의 상업·정치·군사 중심지로서 전국 각지와 연결되는 비행기·철도·고속도로 등의 교통편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 지방에서 나는 백색 화산암인 실라로 지은 건축물이 즐비한 아레키파 시는 페루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대주교 교구 소재지이며 스페인 식민지시대에 세운 대성당(1612) 하나와 교회가 여러 개 남아 있다.

 

 

 

 

 

 

 

도심중앙에는 스페인과 똑같은 풍의 광장이 있다.

 

Plaza de Armas

식사를 위해

 

 

 

 

 

 

 

 

2층 레스토랑 베란다.

 

 

 

 

 

 

 

The Church of the Company in the historic center of Arequipa, Peru.

조개모양의 부조물에 눈이간다.

 

 

 

 

 

 

 

 

 

 

 

 

 

 

 

태양의 신이 새겨진 기둥

 

 

 

 

 

 

 

 

 

 

1540년, 페루를 정복한 스페인 용병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남부의 거점
도시 아레키파에 발을 딛는다.
그리고 백색 화산암으로 성당과 교회, 광장을 세웠다.
21세기 아레키파의
풍경은 피사로가 마지막으로 본 풍경과 다르지 않다

피사로 이전에도 아레키파의 역사는 있었다.

최초의 아레키파는 잉카의 4대 황제 마이타 카팍Mayta Capac 시대에 건설됐다고 전해진다.

완공된 도시를 둘러본 황제가 “아리 케파이Ari Quepay(이곳에 머물겠다).”라고 선언한 것이 지명의 유래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마라 인디언족의 정착이 아레키파 역사의 시작이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그들의 언어로 아레are는 ‘산의 정상’, 키파quipa는 ‘뒤에 놓여 있다’는 뜻.

실제로 아레키파는 장엄한 규모의 화산 엘 미스티El Misti의 뒤에 위치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아레키파는 잉카 시대에도 부유한 도시였다.

수도 쿠스코Cusco에서 항구도시 리마Lima로 향하는 거점 도시였던 까닭이다.

이 도시에 흐르는 부와 활기는 피사로의 구미를 자극했다.

그리하여 아레키파는 피사로가 이끌고 온 스페인군에 의해 유럽식으로 재건됐다.
   
1687년, 아레키파는
또 다른 불청객을 맞이한다. 지진과 화산. 이 엄청난 지변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백지가 된 도시는 굴욕의 역사를 지울 절호의 기회였다. 아레키파엔 변함이 없었다.

1687년에도 페루는 스페인의 치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재건의 주체가 스페인이었다는 뜻이다.

1821년 7월, 페루는 독립을 이뤘지만 식민지 시대의 흔적을 지울 겨를도, 생각도 없었다.
   
1868년 300년 세월이 응축된 도시 아레키파는 또다시 최악의 지진을 만난다. 금번의 재건에도 경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초기 식민지 시대 건축물 위에 19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신고전주의 양식이 더해지면서

도시는 16세기부터 19세기를 아우르는 독특한 미관을 갖게 된다.

거기에 더해진 페루 특유의 문화, 잉카의 후예들이 뿜어내는 오라가 오늘날 아레키파를 기묘한 매력의 도시로 만들었다.

사실 콜로니얼 시티colonial city의 이국미는 유럽의 지배를 받았던 남미와 아프리카, 동, 서남아시아에도 흔하다.

아레키파가 유독 신비로워 보인 건 안데스의 햇빛을 머금고 빛나는 백색 건축물 때문이다.

이 도시에 발 들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같은 생각을 한다.

왜 도시 전체에 하얀 건축물을 세웠을까? 이유는 단순하다. 지척에서 구할 수 있는 건축재가 흰색 돌이라서.

아레키파 인근의 화산에는 실라sillar로 불리는 화산암이 많다. 무게가 가볍고 촉감이 부드러우며 내열성, 내구성까지 뛰어난 건축재다.

오랜 시간 동안 아레키파를 괴롭혀온 지진에 적절히 대응하는 물성인 데다

연분홍 빛깔(자세히 보면 흰색이 아니라 분홍색이다)이 우아한 분위기를 낸다.

건축가들의 입장에서 실라를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실라 덕에 아레키파는 ‘화이트 시티white city’라는 예쁜 별명을 갖게 됐다.
  

아레키파는 페루와 스페인의 특색이 창조적으로 섞인 도시다.

지진과 화산이라는 자연적 조건의 불리함을 극복하는 과정은 이 도시의 풍광을 더욱 걸출하게 만들었다.

풍파로 점철된 고단한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아레키파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창을 안겼다.

아레키파 관광의 출발은 아르마스 광장에서 시작된다. 시민들의 사랑방 같은 공간이다.

아레키파 시의 주요 행사, 시위, 공연 같은 것이 이곳에서 열린다.

아레키파뇨의 ‘월화수목금토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광장 한쪽의 아레키파 대성당Arequipa Cathedral 아레키파 대성당은 17세기에 스페인이 바로크 양식으로 건립했다.

그러나 17세기 말 이 도시를 강타한 지진 때문에 흔적 없이 무너졌다.

19세기 중반, 그 폐허 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건한 것이 지금의 건축물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15미터 높이의 벨기에 파이프 오르간이 시선을 압도한다. 

광장을 둘러싼 2층짜리 건물엔 석양을 관망하기 좋은 바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레스토랑에서  ‘피스코 샤워’ 마셔야한다

페루 사람들의 영혼의 술, 피스코에 레몬과 라임, 설탕을 넣고 달걀흰자 거품을 올려 마시는 칵테일이다.

피스코 샤워는 하늘색보다 더 달콤하여 아레키파의 풍경만큼이나 초현실적인 순간과 오버랩된다. 
  

 


페루 남부에 위치한 백색의 도시 아레키파(Arequipa)는 해발 2,300m의 고산 지대에 위치한 페루 제2의 도시다.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1540년대에 건설됐으나, 수차례의 지진을 거치면서 도시는 독특한 아레키파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 후 1824년에는 페루 수도의 후보로써 당당히 겨루다가 아쉽게도 리마에 그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
스페인 식민지 시대와 잉카 제국의 양식이 혼합되어 아레키파만의 독특한 형태로 다양한 건축물이 건설되다 보니 도시를 도착한 첫 느낌은 '아 지극히 유럽스럽구나'였다. ​도착 전엔 상상하지 못 했던 아레키파의 모습이었다. 이렇듯 아케키파에서만 나는 독특한 백색의 화산암을 이용한 건물로 도시가 이루어진 것이 인정을 받은 것인지, 아레키파 역사 지구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이미 등재되어 있기도 하다. ​
아레키파 시내를 걷다 보면 다양한 건축 양식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로운데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경험주의, 그리고 모던주의가 결합되어 있어 무척 이국적이다. ​마치 꿈을 꾸듯 과거와 현재의 시대를 오가며 이전엔 그 어디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특별한 ​마법의 도시를 걷고 있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레키파의 중심에는 남미의 대부분 도시가 그러하듯, 아르마스 광장이 펼쳐진다. 광장을 기준으로 그 주변에는 시청, 대성당, 라 콤파냐 교회, 산타 카탈리나 수도원, 산 프란시스코, 산토 도밍고​ 등이 자리하고 있는데 화이트톤과 원색이 묘하게 어우러져 있고, 그 규모 또한 웅장하고도 거대한 건물들이 많아 ​​거리를 걷는 내내 감탄이 이어지고, 손에서는 연신 카메라를 놓지 못해 분주해진다.

아레키파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내 시선을 가장 잡아끌었던 건, 저 멀리 올려다 보이던 거대한 활화산이었다. 미스티(El Misti)와 차차니(Chachani) 산은 모두 높이 6천 미터 급의 고산이다.

그 활화산 안에서 발견한 미이라 또한 그대로 보전이 되어 박물관에서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아레키파의 찬란했던 과거를 설명해주고 있었으니, 이 또한 유구한 역사의 한 단면이 느껴져 놀랍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제물로 바쳐진 어린아이의 시신을 보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기 때문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