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부터 이사도라 던컨, 앙리 마티스, 라이너 마리아릴케 등의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사용되었으나 이 저택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로댕이다. 1911년 프랑스 정부는 이 집을 매입하여 로댕이 세상을 떠나던 1917년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하였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로댕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19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은 1908년부터 1917년 사망할 때까지 이 18세기 양식의 비롱 저택에 살았다.
로댕은 국가 소유의 아파트와 작업실을 사용한 대가로 그의 작품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때 헌납한 작품들이 이 저택에 진열되어 있다.
로댕의 작품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때로는 이성적이고, 때로는 관능적인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 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생각하는 사람〉의 이성적인 느낌과 〈키스〉의 관능적인 모습은 인간이 가진 정열과 이성을 보는 이에게 그대로 전달해 준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서 관람에 부담이 없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르느와르, 모네, 고흐의 작품 일부도 전시되어 있다.
정문에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이 있으며, 로댕 미술관은 미술관 자체도 훌륭하지만, 조각품과 울창한 나무가 있는 정원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조각사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오귀스트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과 "키스"라는 걸작을 탄생시켰습니다. 명망 높은 예술가였던 그의 작품들은 프랑스 파리 로댕 미술관 두 곳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로댕의 어린 시절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840년 파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예술을 향한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17세에 로댕은 명문 에콜 데 보자르에 세 번이나 지원했지만, 경쟁적인 입학 시험에서 낙제했습니다. 창작에 대한 열망으로 로댕은 장식용 석공으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1864년 젊은 조각가 로즈 뵈레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 작업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로댕 미술관은 1919년에 개관하여 두 개의 전시관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전시관은 1727년 로카유 양식으로 아름답게 건축된 파리의 건물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페이랑크 드 모라스 호텔(Hôtel Peyrenc de Moras)이었던 이 건물은 현재 비롱 호텔(Hôtel Biron)로 불립니다. 두 번째 전시관은 로댕이 파리 뫼동에 살았던 빌라 데 브리앙(Villa des Brillants)으로 불리는 그의 옛 저택입니다. 빌라에서는 그의 다양한 작업 단계를 보여주는 석고 모형들이 전시된 석고 갤러리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로댕은 빌라 데 브리앙에 거주하는 동안 1908년부터 호텔 비롱을 작업실로 사용했고, 이후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과 함께 자신이 수집한 조각품 컬렉션 전체를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조건은 이 건물을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댕 미술관에는 조각품 6,600점, 드로잉 8,000점, 오래된 사진 8,000점, 그리고 기타 소품 7,000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키스", "지옥의 문", 그리고 로댕과 그의 아내가 잠들어 있는 무덤을 유심히 바라보는 "생각하는 사람" 등 로댕의 주요 작품들이 대부분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파리 중심부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매우 뛰어납니다. 호텔 비롱과 인접한 바렌 지하철역의 플랫폼에는 로댕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이 박물관은 예술 교육을 지속하고 로댕의 유산을 계승하는 데 전념하고 있습니다.
로댕 미술관의 조각 정원은 자연과 조각의 미묘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계절마다 다양한 나무와 꽃들이 만발하는 자연 경관은 로댕의 작품을 가장 돋보이게 합니다. 따뜻한 여름철에는 정원 벤치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요하고 사색적인 시간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조각과 자연
박물관의 7에이커(약 2만 8천 제곱미터) 정원은 다양한 공간과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중앙 안뜰 양쪽에는 장미 정원이 비롱 미술관 (상설 소장품 전시관)을 감싸고 있습니다. 앵발리드와 에펠탑 사이, 회양목 사이 기둥 위에는 생각하는 사람이 앉아 있고, 정원 반대편에는 지옥의 문 (비롱 미술관 옆 별채가 철거된 후 1920년에 설계)이 있습니다.
바렌 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은 칼레 시민 기념비 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우골리노와 그의 아들들의 조각상은 장식용 연못 한가운데에 우아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나무들 사이에 숨겨져 있고, 발자크 기념비는 앵발리드를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습니다.
로댕은 생전에 정원에 조각품을 전시했으며, 로댕 미술관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방문객들에게 조각품이 자연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일년 내내 꽃이 핀다
조각 정원에는 일 년 내내 꽃들이 만발합니다. 겨울에는 크리스마스 로즈가 피고, 2월에는 분홍색 가막살나무 꽃이 피어 첫 벌들을 유혹합니다. 3월에는 눈부신 노란색 개나리가 피고, 그 뒤를 이어 짙은 파란색의 세아노투스가 피어납니다. 5월에는 장미가 만발하여 정원을 수국의 은은한 빛깔로 물들이는 화사한 색채로 물들입니다.
여름에는 라임 나무 향이 정원을 가득 채우고, 9월에는 나뭇잎이 황금빛으로 물듭니다. 앙상한 나뭇가지의 레이스처럼 아름다운 윤곽은 겨울에는 매력적인 향수를 더하는데, 정원에 있는 카페 겸 레스토랑인 로거스틴(L'Augustine )은 추운 날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에 완벽한 장소입니다!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창조자의 상징이 되어 버린 생각하는 사람 동상은 5번의 작품 지옥의 문 시리즈 중 첫 번째로 제작되었다. 지옥의 문 중앙에 있는 인물로 지옥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 전에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 있는 인간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작품이다. 시인 단테가 자신의 창작에 대한 고뇌를 표현한 것이기도 한데, 〈신곡〉의 지옥 편에 등장하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등 저주받은 인간들을 힘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여러 개로 제작되었으며, 1880년에 만들어진 작았던 첫 작품에서 1904년에 대형의 석고상으로 확대된 작품이 1906년에는 브론즈로 다시 제작해서 파리의 팡테옹 앞에 설치되었다가 로댕이 죽은 후 로댕 미술관으로 옮겨왔다.
오귀스트 로댕 <키스>
1888년 프랑스 정부의 의뢰로 제작되었으며, 1888년부터 1898년 사이에 조각되었습니다. 1901년 룩셈부르크 박물관에 소장되었습니다. 1919년에 로댕 미술관으로 옮겨졌습니다.
키스는 원래 단테 알리기에리(1265-1321)의 시, 신곡에 등장하는 인물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를 묘사한 것입니다. 프란체스카의 남편이 두 사람이 키스하는 것을 보고 그녀를 죽였고, 두 연인은 지옥을 떠돌아다니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 그룹은 로댕이 지옥문 창작 과정 초기에 구상한 것으로, 1886년까지 왼쪽 패널 하단에 우골리노를 마주보며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1886년 조각가는 이 행복과 관능의 표현이 자신의 위대한 프로젝트의 주제와 모순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이를 독립 작품으로 만들어 1887년에 전시했습니다. 유연하고 매끄러운 조형, 매우 역동적인 구성, 매력
떨어진 항아리를 잡고 있는 여인(Fallen Caryatid Carrying an Urn)'이 야외 공간에 전시된 모습이다.
우골리노(Ugolino)
이 작품은 지옥의 문의 왼쪽 문을 장식하게 만들어졌으며 이탈리아 사람 피나텔리(Pignatelli)가 모델이 되었다. 단테의 〈신곡〉에서 자기 자식들과 함께 감옥에 갇힌 우골리노가 죽은 자식을 하나씩 차례로 먹어 치우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의하면 13세기 이탈리아 두 도시 국가들 간의 전쟁에서 생포된 우골리노는 반역죄를 선고 받고, 두 아들 및 손자 두 명과 함께 피사에 있는 기아의 탑에 투옥되었다. 탑의 열쇠는 강으로 내던져졌고 그들은 서서히 죽어간다. 아이들의 죽음을 목격한 우골리노는 죽기 전에 그들의 시신을 먹었고 교회가 금기시한 이러한 행동 때문에 그는 지옥으로 보내졌다.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지만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무렵
일반인들은 물론 의뢰한 사람도 극렬하게 분노하여 거부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 작품의 놀라운 단순성과 표현주의적 강렬함은 20세기 현대 조각의 선구자적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로댕의 여러 작품들을 한데 모아 구성한 작품으로 로댕이 사망하기까지 오랜 세월을 두고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대표작이지만
끝내 로댕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사후에 완성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단테의〈신곡>중 지옥편(Inferno)과 보들레르의〈악의 꽃>에서 영향을 받았는다.
이 문의 주인공인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 중앙 위쪽에 있다.
세 망령(Les Trois Ombres)
지옥의 문의 맨 위에 있는 세 사람은 단테의 시에서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틈 속에서 도망치는 망령들을 나타낸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강건한 근육과 약간 뒤틀린 형태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노예들>과 비슷하다.
옆에는 앵발리드
칼레의 시민들(Les Bourgeois de Calais)
100년 전쟁 동안 영국에게 포위당한 칼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명의 칼레 시민들을 기억하기 위해 칼레시에서 로댕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100년 전쟁 동안 조그마한 칼레시를 함락시킬 목적으로 영국군이 성을 포위하고 몇 달째 지키고 있자
결국 식량도 바닥이 난 칼레 시민들은 항복의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대표를 뽑아 보냈고,
이에 적의 장군은 모두를 살려줄 테니 대표 6명을 뽑아서 처형하겠다고 말하며 다음날 아침 6명이 성문 앞으로 나올 것을 명했다.
그 말을 들은 칼레 시민들은 모두 두려워했지만 생피에르가 자신이 가겠다고 말하자 용기를 얻은 칼레 시민들이
이곳저곳에서 자신도 가겠다고 해서 지원자는 7명이 되었는데, 제비 뽑기로 누구 한 명을 빼는 것보다
다음날 늦게 나오는 사람을 제외한 6명이 가기로 하고 다음날이 되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에 주동했던 생피에르가 보이지 않아서 그의 집에 가보니 그는 이미 죽은 후였다.
모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남은 6명은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당당하게 적군의 왕에게 갔는데,
이들의 당당한 모습이 의아했던 왕은 이유를 물었고, 생피에르 이야기를 해주자 적군의 왕이 감동하여 모두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는 적군의 왕에게 다가가며 각자 죽음을 예감한 듯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 칼레 시민들의 모습을 완벽하게 창조해 냈다.
죽음을 예감한 듯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 칼레 시민
죽음을 예감한 듯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 칼레 시민
죽음을 예감한 듯 고뇌에 찬 표정을 짓는 칼레 시민
'My travel abroad. > France(2025.Ma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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