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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오지여행가·사진작가 이해선

봉들레르 2009. 9. 21. 12:34

세계오지여행가·사진작가 이해선
내 영혼에게 문명의 혜택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금은돌
이해선 : 여행 사진작가, 에세이스트(대덕면 내리). 1993년 바탕골 미술관 '낯선 시간들' 개인전. 『10루피로 산 행복』(2000),『모아이블루』(2002),『울지 마, 자밀라』(2006), 『내 마음속의 샹그리라』(2007) 등이 있다. 현재 <세계일보>에 '이해선의 세계오지기행'을 연재하고 있다.  작가 제공.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가끔 이 물음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질 때가 있다. 일상에서 발버둥치려고 해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조가비 속으로 숨어든다. 후퇴인 줄 알면서도 두터운 그늘에 몸을 가린다. 허물을 벗어버리고 싶어도, 방향 잃은 촉수로 허공만 긁어댈 뿐이다. 이럴 땐 떠나고 싶다.

오지여행가이자 사진작가인 이해선 씨를 만나러 간다. 그녀를 안 지 벌써 18년째다. 대학 시절 '동인'이라는 찻집이 있었다. 가지 않는 시계가 걸린 곳, 먼지를 긁어대는 LP판이 돌아가던 곳, 까뮈와 사르트르 사진이 우리를 바라보던 곳. 시가 어떻고 예술이 어떻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폼 잡던 곳. 달콤한 코코아 한잔에 피로를 녹이며 인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 피 한 방울 섞지 않고도 우리가 모두 '고모'라 불렀던, 이해선 씨의 공간이었다.

토요일 아침, 겨울바람을 맞으며 그녀를 만난다.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이래저래 몸이 안 좋은가 보다. 커피 한잔 마시려고 햇살 아래 앉았는데도, 여전히 얼굴 비비며 몸을 추스른다. 그녀는 혼자다. 혼자서 지금까지 모진 외로움의 터널을 통과해왔다. 어떻게 살았을까? 무슨 힘으로 버텨왔을까? 사무치면 꽃이 핀다던데. 그녀를 꽃피게 한 것은 무엇일까?
 
# 어린 시절을 만나러 떠난답니다

이해선 씨에게는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기를 들고 떠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 이해선, 도곤족 소녀. 
"저는 결심을 하면 실행에 옮기는 편이에요. 머뭇거리지 않고. 이스터 섬에 가려고 검색해봤더니, 그곳에서 곧 축제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틀밖에 시간이 없었지요. 그래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결정해서 떠났어요. 제 직감을 따라서 행동한 것이지요."

그녀는 왜 하필 오지를 찾아 떠나는 것일까? 쉽고 편안 여행지들도 많을 텐데, 왜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걸까? 

"오지 여행은 어릴 적 나 자신과의 약속인지도 모르겠어요. 인도 여행 중에 한 소녀를 만났어요. 그 소녀를 따라 집에 들어갔지요. 집에는 소녀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지요. 그때 잠시, 어머니가 바깥으로 나간 사이에, 소녀가 재봉틀을 만졌어요. 물론 엉망으로 만들어놓았고요. 순간 제 어린 시절이 떠올랐어요.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 바느질감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적이 있거든요."

그녀는 오지 여행을 하면서 유년의 기억과 만나고 있었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 물질문명이 채워주지 못하는 빈 공간.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오지에서 찾고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듯, 문명 이전의 '원시성'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 여행 떠나기 전에 준비를 철저하게

"여행을 하기 전에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하는 편이에요.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여행을 준비할 때가 더 재미있어요. 여행지에 가서는 제가 공부한 내용을 눈으로 확인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래요. 똑같이 여행을 했는데도, 자기들이 발견하지 못한 걸 찍어온다고요. 어디서 이런 사진을 찍었냐고 말하지요. 미리 준비해간 자료를 보여주었더니, 역시 이해선이야, 그러더군요. 조금만 더 젊다면, 인류학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어요."

▲ 이해선, 라다크의 어린 라마승들. 
여행 이야기를 풀어놓자마자 눈빛에 생기가 돌아온다. 역시 그녀다웠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와 지명들, 그리고 내가 그리워했던 나라들. 영혼을 찾아 떠나고 싶었던 티베트 카일라스 산, 광활한 사하라 사막의 모래 바람, 고갱을 강렬하게 몰아쳤던 타이티 섬, 꿈에 나타나 나를 인도했던 마다가스카르의 바오밥나무, 모아이 석상의 침묵 아래 서 있고 싶은 이스터 섬. 이해선 씨가 늘어놓는 지명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있다.

꼭 12년 전 인도, 네팔, 태국을 혼자서 배낭여행 하던 때를 되새김질해본다. 아무 준비도 없이, 3천 원짜리 운동화 신고, 배낭 달랑 메고 신들린 듯 비행기에 올라탔다. 마침 한국 대학생 살인사건이 발생해, 목숨을 내걸고 여행을 했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절박함이 피부에 사무쳤다. 인도여행이 힘들어 도망갔던 네팔. 거기서 우연히 히말라야 원정대를 만났다. 그들의 추천으로 나도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게 된 것이다. 셀파는 저 앞으로 모습을 감추고, 나는 온전히 혼자였다. 그리고 내 존재를 품어주는 안나푸르나가 있었다. 신비스런 침묵에 감싸여 모든 것이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여행담을 들으며, 내 가슴도 부풀어오른다.
 
# 순례자의 모습으로 죽어도 좋다

"전생이 있다면, 아마도 티베트 승려였을 거예요. 공부가 부족한 승려. 티베트 사원에 가면 어찌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요. 지금 이 생에서 모든 인연을 끊고, 여행을 다니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제대로 공부하는 승려가 될 수 있겠죠?"

이해선 씨 말마따나 그녀는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가졌다. 훤칠한 키에 시원스런 이마. 부끄러운 듯 해맑은 미소가 아름다운 그녀. 긴 손가락 마디가 커다란 망원렌즈를 너끈히 받쳐 줄 것 같은 굳건함, 언제나 파란 하늘을 그리워하며 아이처럼 폴짝 뛸 줄 아는 그녀다. 세월을 잊은 듯, 여전히 풋풋하다.

"여행을 하다가 죽을 뻔한 적이 있었어요. 이상하게도 이렇게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응급실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편안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동안 찍었던 사진들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 깨어났지요. 참, 소박한 꿈이죠? 죽는 순간에도 내가 찍은 사진을 보고 싶어 하다니. 하하하."
 
▲ 이해선, 카일라스 순례자. 

그녀는 죽을 순간은 미리 결정하고 싶다고 말한다. 죽을 장소와 시간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도 그런 꿈을 꾸는데. 이제 사무친 것들이 꽃을 피우려 하는데. 그렇게 불태우다 죽고 싶은데.) 이해선 씨가 꿈꾸는 곳은 역시나 티베트였다. 카일라스 산을 도는 순례의 길. '코라'를 한 바퀴 돌면 한 생에 지은 죄가 소멸되고 108번 돌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던데. 그녀는 순례자들과 함께 순례를 하다가 죽고 싶단다. '카일라스여, 부디 당신의 품에 나를 들게 하소서.'
 
"카일라스 순례자는 바람이다. 나도 바람이 되어 카일라스에 간다. 고갯마루에 걸린 수많은 기도 깃발을 흔들고, 얄룽창포 강을 건너서 카일라스에 간다. 그것은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나의 오랜 기원이기도 하다."(이해선, 『내 마음속의 샹그리라』, 대교베텔스만, 2007.)
 
# 오지에서 삶의 희열을 맛본답니다

"40~50개국을 돌아다닌 것 같아요. 그런데 갔던 곳에 또 자꾸 가니까, 단지 몇몇 나라를 다녀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외롭지요. 그러나 여기서 외로우나, 거기서 외로우나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세계의 오지에서 생생한 삶의 희열을 경험한답니다." 
 
▲  작가 제공.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사진 한 장에 담긴 운명적인 만남을 듣는다. 사진은 흘러가는 물이 아니다. 인연과 운명이 순간에 오려진 그녀만의 역사인 것이다. 조만간, 그녀의 인연이 담긴 사진집이 출간될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칠 때, 이내 하늘을 바라보더니 총총거린다. 얼른 사진을 찍으러 나가야 한다며 기뻐하는 모습이다. 그녀의 등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나도 그녀처럼 온전히 떠나고 싶다. 
 
금은돌(행복한 글쓰기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