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Fukuoka(2015 Jul)

4-2 다자이후(大宰府)

봉들레르 2015. 7. 27. 02:32

 

 

 

 

 

 

 

 

 

 

 

 

 

 

 

 

 

 

 

병마를 물리친다 하여 명물이 된 "우메가에 모치(떡)"를 파는 찻집이 늘어 서 있다.

 

 

 

 

 

 

 

 

 

 

스타벅스는 목재의 달인 일본 건축가 쿠마겐코가 설계해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서기 660년쯤 이곳은 엄청난 긴장에 쌓여 있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하면서 많은 유민들이 규슈 북부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을 다스리던 사이메(齊明) 여왕은 백제를 구원하려고 긴키(近畿) 지방에 있던

수도 아스카(飛鳥)에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규슈로 진군한다.

그러나 사이메 여왕은 661년 병으로 죽고, 아들 나카노오에(中大兄) 태자가 유언을 받들어 하카타에 도착한 후 백제에 구원군을 보낸다.

663년에 2만7000여명의 병력이 백제 부흥군과 연합해 백촌강(白村江, 금강 하구)에서 대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만다.

왜 그들은 이렇게까지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을까?

"이제 백제가 망해서 조상들에게 절할 곳이 없어졌다"며 일본 귀족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 등

수많은 역사적 자료를 통해 일왕과 지배계급이 백제에서 건너왔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또한 백제가 멸망한 후에 일본(日本)이란 국호가 등장했는데,

이때부터 일본은 한반도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해가 뜨는 곳, 즉 '해의 근본'은 일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인식이 아니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가 뜨는 곳이 되므로, '해의 근본'이라는 인식의 주체는 한반도에서 넘어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성을 쌓았는데,

그 터가 다자이후에 남아 있다. 백제 유민들과 일본인들은 평지에 수성(水城)을 쌓았다.

백제식 토성으로 성 밑에 수로(水路)를 설치했기에 수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현재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처럼 주택가와 도로변에 흔적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험한 산은 천연 방어막이었기에 일본인과 백제 유민들은

적군이 침입할 수 있는 산 사이의 활짝 트인 평야에 약 1.2㎞의 토성을 쌓았는데,

현재 성터는 남아 있지 않고 나무가 무성한 수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수성은 1차 방어선이었고, 이것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한 성이 대야성(大野城)이었다.

다자이후역에서 규슈 산책로를 따라 가파른 등산로를 약 한 시간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후쿠오카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고원이 나온다. 둥글게 휜 절벽 밑으로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근처에는 창고 터도 보인다.
일본식 성은 평지에 세워지고 주변은 해자라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 있는 대야성 같은 성을 일본인들은 조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한 나당 연합군의 침공은 없었다.

그후 이곳에 사왕사(四王寺)가 들어서면서 대야산은 사왕사산으로 불렸으며,

다자이후는 나라나 교토처럼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발전했다. 그 흔적이 이곳을 다스리던 다자이후 정청의 초석이다.
일본식 성은 평지에 세워지고 주변은 해자라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 있는 대야성 같은 성을 일본인들은 조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한 나당 연합군의 침공은 없었다. 그후 이곳에 사왕사(四王寺)가 들어서면서 대야산은 사왕사산으로 불렸으며,

다자이후는 나라나 교토처럼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발전했다. 그 흔적이 이곳을 다스리던 다자이후 정청의 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