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tue of Gudea
이 머리 없는 인물의 깍지 낀 손은 메소포타미아 통치자 구데아의 동상 30여개에서 자주 반복되는 독특한 제스처다.
기원전 2144년에서 2124년 사이에 구데아는 현재 이라크에 있는 도시 국가 라가쉬의 엔시(총독)로 통치했다.
학자들은 예술 후원과 광범위한 건축 프로그램을 포함한 그의 통치업적을 2,400개 이상의 비문에서 확인했다.
이와 같은 동상은 사원에 세워져 그의 헌신과 경건함을 보여줬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함무라비 법전
함무라비 법전(Code of Hammurabi)은 기원전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빌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이다.
아카드어가 사용되어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우르남무 법전
함무라비 법전은 오랫동안 인류 ‘최초의 법전’으로 불렸지만, 사실 그보다 앞선 시대에 만들어진 법전이 적지 않다.
나중에 발견된 ‘우르남무 법전’이나 ‘에슈눈나 법전’ 등이 함무라비 법전보다 이른 시기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행한 법률이지만
함무라비 법전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인 함무라비(BC 1792~1750)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다.
그의 시대에 조성한 건축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쐐기문자를 통해 당대의 모습이 상세하고 생생하게 전해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라는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은
함무라비가 새로 건설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여 년 전 우르 왕국이 몰락한 뒤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던 여러 도시 국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수단으로 새로운 법규범을 도입했다.
2.35m 높이의 검은색 섬록암에 아카드어로 새긴 함무라비 법전의 작성 연대는 기원전 1772년경까지 올라간다.
1901년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드모르강이 이끄는 탐험대가 발견한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282개 법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줄에서부터 함무라비는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소개한다.
법전에는 경제적 내용이 가득하다. 거짓 증언과 절도, 은닉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고,
노동·재산·상거래·결혼·이혼·상속·입양·농업·급여·임대료에 관한 사법적 문제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외국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것도 주요한 주제다.
법이 정한 처벌 규정은 현대인의 시선에서 보면 엄하기 이를 데 없다. 32개 조항에서 사형을 규정하고 있고,
귀나 팔다리 등의 신체 자르기를 언급한 곳도 수두룩하다. 역사학자들은 이 법전에서 형벌 조항이 두드러지게 많고,
이전까지 단순한 배상의 대상이던 경범죄에 대해 사형으로 벌한다는 데서 “치안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사회였다”는 사회상을 추론하곤 한다.
법전에는 또 국내 상업과 국제 교역을 장려하기 위한 ‘카룸(karum)’이라는 곳을 두고
‘상인들의 감독(wakil tamkari)’이 조직을 대표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상업이 상당히 발달했다는 증거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형벌의 특징으로 보복주의를 꼽을 수 있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을 상하게 한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뼈를 부러뜨리면 그의 뼈를 부러뜨린다”라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동등한 신분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릴 경우, 부러뜨린 사람의 이를 부러뜨린다”라는 구절까지 합쳐져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이 나왔다.
물론 불평등 사회인 당시 현실 그대로 보복도 불평등하게 이뤄졌다.
귀족이 평민의 눈을 상하게 만들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1미나의 은을 지불해야 했지만, 피해자가 노예인 경우엔 배상액이 절반으로 줄었다.
또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한 손을 자른다”라거나 “임산부를 때려 유산하면 5세겔의 돈을 갚고,
임산부까지 죽으면 때린 사람의 딸을 죽인다” 같은 법규도 있다고 한다. 유산한 여인의 신분이 귀족·지도층 인사냐 노예냐,
아니면 중간층 사람이냐에 따라 갚을 돈이 2, 5, 10세겔로 차이가 나기도 했다. “아이를 잘못 돌본 여인의 가슴을 자른다”라거나
“수술 후 귀족이 죽거나 눈을 잃으면 수술한 의사의 손목을 자른다”는 식으로 오늘날의 시선에서 보자면 야만스러운 느낌이 드는 구절도 적지 않다.
같은 이유로 잘못 지은 집이 무너져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을 지은 석공이 목숨을 내놔야 했다.
현대인이 봐도 깜짝 놀랄 만큼 합리적인 구절도 적지 않다. 특히 ‘계약’의 중요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떤 사람이 한 여자를 부인으로 취하되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이 여인은 그 사람의 부인이 아니다”라며 ‘혼인신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여자의 잘못된 행동 탓이 아니라 단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면 여자 측에게 결혼 당시 가져온 지참금을 돌려주도록 했다.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다른 사람의 아들이나 노예에게서 금, 은, 노예, 소, 양, 노새 등을 구매하거나 넘겨받은 자는 도둑으로 간주해
사형에 처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증인이나 계약서 없이’ 거래했다는 점을 증명하는 방식도 ‘과학적’이었다.
원래 재산 소유자가 특정 물건이 그의 재산이었음을 말해줄 증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물건 구매자도 정당한 거래였다는 점을 뒷받침할 증인이 있다고 맞서면 증인을 데려올 때까지 6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구매자가 판 사람과 증인을 데려오지 못하고 원소유자가 믿을 만한 증인을 데려오면 구매자가 도둑으로 판정돼 사형당했다.
반대의 경우엔 잃어버렸다는 주장이 무고죄가 내려져 사형에 처한다. 양쪽에서 증인을 데려오고 증언이 모두 신빙성이 있으면,
물건을 판 상인이 도둑으로 판정돼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형법이라는 것이 개인 간에 치러지던 ‘사적 보복’을 금지하는 대신 국가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공적 응징’으로 대체되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원시적 형태의 법인 함무라비 법전도 피해자의 복수 감정을 어느 정도 보상해 주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구체적인 법규범이 만들어져 집행되면서 ‘계약’이 성립되는 게 가능했다. 그런 계약의 신뢰를 바탕으로 상업 거래가 꽃을 피웠다.
한국경제
법전 맨 위에 있는 조각을 확대한 모습.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함무라비 왕, 오른쪽 의자에 앉은 신은 샤마쉬이다
함무라비 법전의 비문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거대한 신상 ‘사자를 압도하는 영웅’은 길가메시상이라고 추측한다.
설화석고(alabaster)로 만든 높이 5.5m의 거대한 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명품이다.
원래 이 상은 신(新)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 시대(기원전 721~기원전 705)의 작품으로 왕궁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조각상처럼 정면을 보는 상은 아시리아에서 드문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런 형식은 마술적 힘으로 왕궁을 지키는 조각상에 한한다.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것은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의례용 무기다. 이 상은 그저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었다.
두상을 둥글게 만들었기에 이 앞을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신상의 눈과 마주칠 뿐 아니라, 사람이 움직여도 계속 쳐다보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지워졌으나 원래는 눈에 밝은 색이 칠해져 있어서 그 눈이 보는 사람에게 최면을 걸었었다.
도시 전체를 굽어보는 위치에 우람한 자세로 서 있던 영웅상은 강력한 국왕권의 상징이였다.
아시리아의 라마수상, 기원전 713년~716년경
수메르신화 중 '이난나 이야기'와 함께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사람들에게 여전히 흥미를 주고 있는 서사는 바로 '길가메시 서사'다.
길가메시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서사로,
7~8000년 전에 시작된 문명으로부터 탄생한 설화이자 신화다. 세상에 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다.
길가메시 서사는 수메르(지금의 이라크 지역)에서 비롯되어 바빌로니아(서남아시아 고대 문명 발상지, 바빌론 제1왕조) 때 크게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 지역의 길가메시 서사는 너무 오래된 것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짜임새 있게 구비되지 못해
대부분의 학계에서는 바빌로니아 때의 길가메시 서사를 표준으로 삼는다.
'길가메시'는 실존 인물로, 기원 전 2750년 즈음, 지금의 이라크인 '우루크'를 다스리던 수메르의 다섯 번 째 왕이다.
가장 오래된 영웅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혈통 자체가 신의 기운을 타고 났기 때문에 적대한 자가 없이 통치를 이루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이야기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는 비천한 노예인 동시에 뛰어난 검투사였다.
그리고 초강대국인 로마와 맞서 싸워 자유를 되찾기 위해 검투사들을 이끌고 로마를 탈출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은 스파르타쿠스의 명성 아래 모여들었다. 그는 로마를 탈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로마를 위협하는 반란군의 대장이 되었다.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정규군과 싸워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군은 계속해서 승리를 쟁취해 냈다.
비록 마지막 전투에서 로마에 패했지만 스파르타쿠스는 패배자가 아닌 위대한 승리자로 역사 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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