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Poland(2022.Sep)

9-3 비엘리츠카 소금광산(Wieliczka Salt Mine)으로

봉들레르 2022. 11. 29. 22:04

단체 관광객들
8:47 304 번 버스로 소금광산으로 출발  6x2=12 + 12.3( 현금 )
크라쿠프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소금광산으로 간다.

304번 버스를 타고보니 카드나 지폐는 소용이 없고 동전으로 발매기에서 표를 뽑아야 한다.

폴란드 아가씨의 동전까지 합쳐서 표를 사고 펀칭까지 끝내고 나니

돈을 달라고 해서 손해를 보고 지폐를 주었다.나중에 생각해 보니 전문적이 수법같았다.

동전으로만 이용하는 무인승차권 발매기
버스를 타고 40분 지나 소금광산이 있는 작은 마을 비엘리츠카(Wieliczka)에 도착했다.
비엘리츠카(Wieliczka)
비엘리츠카(Wieliczka)
비엘리츠카(Wieliczka)의 소금광산 입구
소금광산
설명을 받을 각 언어별로 줄을 서는데 동양언어는 하나도 없다.

온라인 구매한 입장권을 표로 교환하고 영어안내에 줄을 섰다. 아예 아시아권 언어안내는 없다.

하긴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동양인은 구경도 못했다. 정확히 10시 정각에 30명을 끊어서 입장시킨다.

언어별로 한 팀당 30명씩  입장을 시킨다.

10:00~12:00; 비엘리츠카 (Wieliczka) 소금광산

 

지하 64m의 1단계로부터 지하 327m에 위치한 9단계까지 지하의 갱도가 이어지는데, 일반 관광객들은 지하 135m에 있는 3단계까지 볼 수 있다. 3단계까지 구경한 다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오게 된다. 간단한 설명을 하고

 

나선형의 나무계단을 따라서 끝도 없이 아래로 내려간다.
나무로 된 378개의 계단
64m를 내려왔다.
지하 64m에서 부터 첫 관람을 시작한다.
소금을 캐낸 공간에 생긴 2,040개의 방이 있지만, 일반 관광객을 위한 탐방코스는 1단계에서 3단계까지 3km를 걸어 모두 28개의 방을 구경하게 된다. 갱도에는 외부로부터 투입된 공기의 흐름이 꽤나 거센 편이다. 그래서 중간 중간 문이 설치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다니는 길은 비교적 잘 다듬어져 있었지만, 중간에 있는 옛 갱도에서는 통나무로 천정과 벽을 가로막아 낙반사고를 막는 구조도 볼 수 있다. 영어권의 전통적인 인사말인 "신의 영광(God Bless You)"은 여기 비알리츠카 소금광산의 광부들이 서로 지나치면서 주고받던 인사말이라고 한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일행을 안내하던 가이드가 처음 발길을 멈춘 곳은 3번방이다. 4.5m 크기의 소금기둥에 둥근 지구를 손에 든 코페르니쿠스의 조각이 서 있다. 1973년 코페르니쿠스 탄생 500주년을 기념한 것인데, 크라쿠프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코페르니쿠스가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을 방문하적이 있다고 한다. 중세 기독교사회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천동설에 반하는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는 1473년 폴란드 비수아 강변의 토룬에서 출생했다. 1491년 신부가 되기 위하여 크라쿠프대학에 입학한 그는 불제프스키교수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사사하였는데, 당시 유럽 천문학계가 신봉하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실제의 천문현상과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천동설이 가진 한계는 제례일이 계절과 일치하지 않음으로 해서 종교적 권위를 떨어트리고 원양항해도 심각한 위험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1496년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으로 유학한 코페르니쿠스는 그리스 철학과 천문학을 공부하였고, 1502년에는 다시 파도바대학에서 의학과 교회법을 공부하여 각각 학위를 받았다. 1506년 귀국한 그는 외삼촌의 교구에서 의술을 베풀다가, 1512년 외삼촌 사후에 뒤를 이어 신부로 사역하였다. 그때부터 옥상에 망성대(望星臺)를 세워 별을 관측하였다. 관측결과는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행성계의 개념, 즉 지동설를 구축하기에 충분하였다. 지동설에 관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는 1525~1530년간에 집필되었으나 당시 로마 가톨릭이 천동설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표를 미루었다. 자비를 들여 소규모로 출판하여 일부 천문학자와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도 전해졌다고 하며, 본격적인 출판은 제자 레티쿠스의 권유에 따라 1542년 뉘른베르크의 인쇄소에 넘겨져 1543년 그가 임종하는 자리에 견본이 전해졌다고 한다. 그의 천체모형은 지금의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지구 중심의 천체모형을 버리고 태양 중심의 천체모형을 제시한 것만으로도 당시 우주관의 대변혁을 가져온 것으로, 흔히 사고의 틀을 바꾸는 것을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출처 : 청년의사(http://www.docdocdoc.co.kr)

니콜라우스&nbsp;코페르니쿠스(Nicolaus&nbsp;Copernicus)
킹가공주와 킹가공주의 전설을 묘사한 조각을 볼 수 있는 방
다시 일행이 발길을 멈춘 장소는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에 얽힌 전설, 킹가(Kinga)공주에 대한 이야기가 조각된 방으로 1967년에 조성되었다. 킹가공주는 헝가리왕 베라4세(B&eacute;la IV)의 딸이다. 강성한 체코왕국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헝가리왕국은 킹가공주를 크라쿠프의 볼레스와우(Bolesław V)왕자와 결혼을 시켜 혼인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이때 그녀는 지참금으로 가져갈 땅보다도 소금을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왕에게 "폴란드는 부유하고 평화스러운 나라이지만 소금이 없습니다. 헝가리는 소금이 부족하지 않습니다."라고 청하였다. 부왕은 그녀에게 마라마로스(M&aacute;ramaros)의 소금 광산을 지참금에 포함시켰다. 폴란드로 떠나기 전에 그녀는 마라마로스 광산의 소금구덩이에 볼레스와우 왕자에게 건넬 약혼반지를 던졌다. 신행길에 비엘리치카를 지나게 된 공주는 행렬을 멈추게 하고 땅을 파라고 명했다. 구덩이에서 소금덩어리가 발견되었고, 더 깊이 파들어 가자 소금광맥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 발견한 소금 덩어리를 쪼갰더니 그 안에서 공주의 약혼반지가 나왔다. 공주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었나보다.
킹가(Kinga)공주

14세기 들어 카시미르대왕은 소금채굴과 무역에 관한 규정을 새롭게 하였다. 이로서 소금의 채굴이 안전하게 이루어졌고, 광부들은 자유롭게 일하면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광부의 직을 세습할 수 있게 되었다. 소금광산에서는 초산이라고 부르는 메탄이 위험하다. 무색무취한 메탄은 독성은 없지만, 화기를 만나면 폭발을 하게 된다. 새로 굴착한 갱도에서 흘러나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긴 막대기 끝에 불씨를 매달아 가스가 있음직한 곳으로 기어들어가 태우는 일을 맡은 광부는 ‘고행자들’ 혹은 ‘기어 다니는 자들’이라고 해서 크게 존경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엘리치카 소금광산에서는 여러 차례의 화재가 발생하였고, 1644년에는 몇 달 동안 지속되는 최악의 화재가 발생하였다. 지하갱도를 구경할 때 불을 켜지 말라는 주의가 따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청년의사

13세기 중엽 헝가리의 벨라 4세 국왕에게 킹가라는 딸이 있었다. 장녀였던 그녀는 신앙심이 두텁고 책임감도 강한데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도 남달랐다. 그래서 벨라 4세는 킹가를 매우 아꼈다.

킹가가 열여섯 살 때인 1240년의 일이었다. 당시에 헝가리는 폴란드와 매우 사이가 좋았다. 폴란드의 국왕인 볼레스와프가 보낸 사절이 왕의 친서를 들고 부다페스트의 벨라 4세를 찾아갔다.

“폴란드의 젊은 국왕은 잘 계시는가?”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국정을 잘 운영하고 계시옵니다.”

“이번에 헝가리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볼레스와프는 매우 젊었다. 젊다기보다 어렸다. 그는 1226년생으로 킹가보다 두 살 적었다. 그가 헝가리에 사절을 파견한 해에는 겨우 열네 살이었다.

폴란드 사절은 국왕이 직접 쓴 친서를 벨라 4세에게 바쳤다. 편지는 청혼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헝가리의 영원한 발전과 전하의 건승을 기원하옵니다. 제가 국왕 자리에 앉은 지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왕비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귀족, 신하 들은 결혼을 서두르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주제넘게도 감히 전하의 큰 따님이신 킹가 공주님에게 청혼하는 바입니다. 두 나라의 다정한 관계를 생각하셔서 부디 청혼을 승낙해주시기 바랍니다.’

벨라 4세는 두 나라의 관계 유지를 위해 큰딸을 볼레스와프에게 시집보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신앙심이 정말 두터운 킹가가 결혼할 뜻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양보하라고 딸을 설득했다.

“폴란드의 젊은 국왕이 네게 청혼을 해 왔구나. 아비의 뜻은 찬성이다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개인적으로는 아바마마 곁에서 하느님을 모시며 평생 미혼으로 살고 싶답니다. 하지만 아바마마와 나라를 생각하면 결혼하는 게 낫겠지요. 아바마마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벨라 4세는 자신의 뜻을 받아준 딸이 정말 고마워 엄청난 결혼 선물을 주기로 마음먹었다.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줄 작정이었다.

“얘야, 너는 결혼 선물로 무엇을 원하느냐? 아무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보거라.”

킹가는 결혼을 앞두고 폴란드가 어떤 나라인지 상세히 알아보았다. 국력이 그다지 강하지 않고 경제력도 떨어져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폴란드에 도움이 되는 선물을 갖고 가기로 했다.

“금 같은 보석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보석은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불행과 고통만 안겨주는 물건입니다. 폴란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물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라마로스의 소금광산을 저에게 넘겨주실 수 있으신지요?”

벨라 4세는 딸의 소원을 듣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금광산이라면 분명히 폴란드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라마로스 소금광산은 헝가리 영토 안에 있었다. 딸에게 주더라도 갖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금광산을 네게 주더라도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이냐? 그렇다고 헝가리 영토를 폴란드에 함부로 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더냐?”

“그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토는 손대지 않고 소금광산만 챙겨 가도록 하겠습니다.”

벨라 4세는 도대체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가져갈 수 없는 선물이라도 원한다니 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하들에게 마라마로스 소금광산을 딸에게 선물로 주기로 했다고 공표했다.

며칠 뒤 킹가는 부다페스트를 떠나 폴란드 크라쿠프를 향해 길을 나섰다. 평생 곁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부모를 떠나 생전 처음 가는 낯선 나라였다.

벨라 4세 부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애지중지했던 큰딸을 가난한 나라에 시집보내 고생이나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킹가는 전혀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는 부모에게 공손하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마차에 몸을 실었다.

“크라쿠프로 가기 전에 마르마로스 소금 광산으로 먼저 가도록 해요.”

마차가 부다페스트를 막 벗어날 무렵이었다. 킹가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크라쿠프까지 자신을 수행하는 병사들에게 마라마로스 소금광산에 가자고 했다. 그곳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다들 의아했지만, 공주의 지시이니만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킹가는 마라마로스 소금광산에 도착해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멀찍이 떨어져 구경만 하고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입구에서 무릎을 꿇었다.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소금광산 바닥은 무척 더러웠다. 결혼을 앞둔 공주가 옷을 버린 사실을 나중에 벨라 4세가 알게 되면 그들이 혼나지 않을까 걱정됐던 것이다.

킹가 공주는 소금광산 안으로 볼레스와프 국왕이 보내온 청혼반지를 던져 넣었다. 그리고 아무도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광산 안을 다시 살펴본 공주는 그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에게 폴란드까지 따라가자고 했다. 광부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공주가 가자고 하니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도록 해요.”

킹가 일행은 며칠 뒤 폴란드 크라쿠프 근처에 도착했다. 비엘리츠카라는 곳이었다. 공주는 마차 창문을 열어 신하와 병사들에게 마차를 세우라고 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려 맨 뒤에 따라오던 광부들을 불렀다.

“저 낮은 언덕을 파보도록 하세요. 무엇이 나오는지….”

광부들은 이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면서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공주의 명령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언덕에 올라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뭐야? 공주님, 소금입니다. 이곳에서 소금이 나오고 있습니다.”

광부들이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판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하에서 소금이 나오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다시 땅을 조금 더 파 들어갔다. 그들 중 한 명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공주님, 반지입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반지가 하나 나왔습니다.”

킹가는 광부에게 반지를 가져오라고 했다. 놀랍게도 헝가리 마라마로스 소금광산에 던져 넣었던 청혼반지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 반지가 지금 비엘리츠카 언덕에서 나온 것이었다. 공주는 먼지를 털어낸 뒤 손가락에 조심스레 반지를 끼워 넣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폴란드에는 소금광산이 없었다. 공주가 청혼반지의 기적으로 헝가리에서 가져온 것이 처음이었다. 이후 소금광산은 가난한 폴란드의 경제를 살리는 데 큰 힘이 됐다.

비엘리츠카에는 아직도 소금광산이 있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해 소금광산박물관도 있다. 킹가가 소금광산을 헝가리에서 옮겨온 기적에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소금광산 지하 100m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지하 예배당이 만들어졌다.

볼레스와프 국왕과 결혼한 킹가는 남편과 합의해 평생 육체적 순결을 지켰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수녀원에 들어갔고, 폴란드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1292년 눈을 감은 킹가는 398년 뒤인 1690년 교황 알렉산데르 8세 때 시복됐고, 다시 309년 뒤인 1999년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대에는 성인 반열에 올랐다. 그녀는 폴란드과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부산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