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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지혜-차경(借景)

봉들레르 2016. 6. 3.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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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서 창을 통해 일어나는 풍경작용의 출발점은 ‘차경’이라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동서양의 건축과 조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다.

한옥의 경우는 ‘건물 밖에 있는 경치를 집 안으로 들여와 감상 대상으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물론 경치를 직접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창이 개입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창을 통해 경치를 선별하고 재단해서 마치 액자에 담긴 한 장의 그림처럼 만들어 즐기게 된다. 

차경은 오로지 창의 활약에서 생겨난다. 물론 이런 작용은 동서고금 공통이다.

건물에 구멍만 뚫려 있으면 그곳을 통해 바깥 경치가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옥은 차경에 대해 이런 당연한 현상을 훨씬 넘어서서 매우 정치(精緻)한 계획을 세워 활용하고 즐긴다. 

물론 모든 한옥의 모든 창이 이런 것은 아니다. 집과 방이 처한 상황에 따라 차경을 시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집주인과 장인이 차경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매우 많은 수의 한옥에서 창은 차경에 대해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많은 창이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옥에서 차경을 특별하게 의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마당의 존재다. 물론 마당 역시 개인주택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한옥의 마당은 단순히 집을 빼고 남는 나머지 면적이 아니다. 방과 한 몸으로 작동하는 방의 일부다.

한옥에는 복도가 없다. 문만 열면 바로 마당이다. 한옥의 방은 보통 두 면, 심지어 세 면을 마당과 면한다.

문만 열면 바로 앞마당, 뒷마당, 옆마당으로 통한다. 방과 마당을 가르는 경계나 벽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방에 앉아 있어도 마당은 늘 함께한다. 숫제 마당이 방 안에 들어온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다.


둘째, 창밖의 풍경요소 가운데 차경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은 분명히 찍어서 창에 대응시킨다.

식수를 할 때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이미 있는 요소라면 창을 거기에 맞춰서 낼 수도 있다.

한옥의 창이 정형적 반복이나 동일성을 피해 자유롭게 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똑같은 창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는데 그 이유는 방안의 형편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형편이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풍경요소를 차경에서 즐기려는 속셈이다.


둘째, 마당을 가급적 비워서 차경 대상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한옥은 원래 마당에 식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잔디도 깔지 않으며 소품도 두지 않는다. 이렇게 비워두는 것은 대류작용을 원활하게 해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목적이 크지만 차경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것도 있다.

크게 보면 ‘비움의 미학’이란 것인데, 비움으로써 다른 더 큰 것을 얻는다는 지혜인 것이다.

대류작용도 그렇게 얻는 더 큰 것 가운데 하나일 터이고, 차경을 통한 풍경작용 역시 그럴 것이다.

마당을 통틀어 차경 대상은 잘해야 두세 점, 귀하고 드문 것이 되며 따라서 창을 통해 차경될 때 그 효과는 꽤나 커진다.

창밖 가득, 이 나무 저 나무 체한 것처럼 넘쳐나는 법은 절대 없다. 절제하고 집중해서 한두 점만 빌릴 뿐이다. 그래서 오롯하다.


넷째, 방 전체의 스케일감이다. 한옥에서 창을 통한 차경은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않아서 볼 때,

즉 좌식 형식일 때 그 맛이 가장 좋다. 한옥의 좌식문화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부정적 평가도 있다.

조선이 끝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결국은 앉은뱅이 생활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좋은 점도 있는데 바로 풍경작용을 즐길 때다.

한옥의 풍경작용은 기본적으로 좌식문화의 산물이다. 

풍경작용은 눈높이에서 일어나야 되는데 의자에 앉는 경우와 방바닥에 앉는 경우는 차이가 크다.

방바닥에 앉는다는 것은 곧 땅바닥과 내 몸을 하나로 밀착시켰다는 뜻이다.

풍경작용이란 것이 결국 땅을 끼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땅바닥과 내 몸을 밀착시키는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눈높이에서 풍경을 보더라도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보는 장면은 의자에 앉아서 보는 것과 아주 다르다.

나의 존재와 훨씬 밀착해 있다.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다.

노장의 ‘몰아(沒我)’, 즉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나를 잊은 상태다. 의자에 앉아서 보면 이렇지 못하다.

나와 차경 대상, 주체와 객체가 따로 논다. 둘 사이에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좌식문화가 풍경작용에 유리한 점은 또 있다. 한옥의 방은 천장이 낮다. 좌식문화에 맞춘 스케일인데, 그래서 아늑하다.

 아늑함은 풍경작용에 감성적, 감상적 효과를 높여준다. 호탕하게 즐길 풍경은 대청에 나가면 된다.

방안에서는 오붓하게, 그리고 오롯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내 마음 가득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내 마음과, 내 감성과 온전히 주고받을 수도 있다. 내 피부 같고 내 숨결 같다. 이것 역시 몰아의 또 다른 상태다.


다섯째, 창이 작동하는 방식이 다양하다. 우선 창이 여닫이와 미닫이 두 종류다.

여닫이창은 차경 대상에 대해 2차원 평면적으로 작동하는 대신 선별하는 기능을 갖는다.

닫으면 자르고 열면 받아들인다. 정적이고 직설적인 대신 분명하고 정확하다. 차단과 열림이 명확하다.

미술에서 액자를 보는 것과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미닫이문은 반대다. 밖으로 열리기 때문에 3차원 공간 깊이를 갖는다.

선별기능은 약한 대신 시선에 사선을 집어넣기 때문에 풍경작용이 풍부하고 다양해진다.

동적이며 은유적이다.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닌 중간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만큼 영화를 보는 것처럼 뛰어들고 싶게 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이라이트는 이런 두 종류의 창이 함께 작동한다는 점이다. 한옥은 대부분 겹창이다.

겨울의 단열 목적이 가장 컸겠지만 차경에 다양성을 주기 위한 목적도 중요했다.

서로 반대되는 성격의 두 창을 함께 내다 보니 풍경작용은 매우 다양해질 수 있다.

안쪽의 여닫이를 활짝 다 열고 바깥쪽의 미닫이를 반쯤 여는 경우,

여닫이 두 짝 중 한 짝은 닫고 다른 한 짝은 활짝 연 다음 바깥쪽의 미닫이는 그 반대로 열고 닫는 경우 등등

조합에 의한 경우의 수는 실로 수십 가지는 된다. 현실세계에서 경우의 수가 수십 가지라면 무한대로 다양하다는 말을 쓸 만하다. 

두 창의 순서도 중요하다. 겹창일 경우 대개 안쪽을 여닫이로 하고 바깥쪽을 미닫이로 한다.

이것은 물론 창의 열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반대 순서이면 안쪽의 미닫이가 바깥쪽의 여닫이에 걸려 열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창의 순서를 이렇게 정하고 보니 풍경작용은 한결 안정적이 되었다.

안쪽의 여닫이문으로 일단 열리고 닫힘의 선택을 명확하게 정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바깥쪽의 미닫이문을 통해 동적인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안쪽 문이 동적으로 작동했다면 너무 불안했을 것이다.

안정 속의 변화를 택한 것인데, 이는 좌식문화에 요구되는 아늑함과도 통하는 특징이다. 

이처럼 한옥에서는 차경에 대해 매우 정밀하고 치밀한 건축적 셈법을 갖는다.

 이런 셈법은 한옥을 지을 때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아무 한옥에나, 아무 방에서나 눈길만 조금 돌리면 별의별 신기한 풍경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비밀이다.

요즘같이 자극적인 놀이문화가 없던 시절, 이런 다양한 풍경작용은 그 자체가 훌륭한 놀이문화였다.

또한 그림을 거는 것보다 수십 배는 효과적인 문화생활이기도 했다.

매번 그림을 바꿔 달 필요도 없이 시간 따라, 날씨 따라, 계절 따라 자연이 선사하는 ‘진짜 풍경’을 즐기고 감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글˚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