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Srilanka(2011.Feb.)

스리랑카 여행지

봉들레르 2011. 1. 2. 21:17

 

(1) 네곰보 (NEGOMBO)

 

네곰보는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약 35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스리랑카 최대의 어항을 지닌 도시이다. 국제 공항이 가깝기 때문에 최근 트랜짓 승객을 위한 리조트 호텔들이 도시 북구에 여러 개 세워져 리조트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네곰보의 원래 모습은 어디까지나 어민들의 도시이다. 콜롬보나 갈레와 마찬가지로 항구로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아랍 상인들의 시나몬 무역 기지로 사용된 이후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이어진 식민지시대에서도 지배의 중심으로서 중요한 항구였다. 이러한 역사는 지금의 네곰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형체가 남아 있는 것은 성채와 운하이다. 성채는 네곰보를 항구로 키워온 거대한 만의 입구에서 서서 도시를 지켜보고 있고 운하는 도시 중앙을 가로질러 흐른다. 이 운하는 길이가 129km에 이르며, 지금도 사람들의 생활 물자를 운송하는 동맥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곰보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교이다. 포르투갈인이 이곳에 와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지금은 주민 대부분이 그리스도교인 이다. 때문에 도시 곳곳에서 멋진 교회를 볼 수 있다.

네곰보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른 아침 해안에 늘어서는 어시장에 가보아야 한다. 쌍동선이 뭍에 닿을 때마다 기다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해안은 사람과 배. 생선 그리고 생선을 노리는 까마귀로 뒤덮인다.

이른 아침 해안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침식사를 파는 천막들까지 들어와서 법석 거리는 모습은 점심때까지 계속된다.

한편 리조트 지역은 서구화된 멋진 비치로드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조금도 신기하지 않고, 여행자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쾌적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내곰보                                                        어시장                                                운하

 

(2) 아누라다푸라 (ANURADHAPURA)

 

인구 99,000명으로 스리랑카 최초의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는 B.C. 500년경 수립된 고대도시로써, "아누루따(Anurudda)"라고 일반적으로 불려진다. 스리랑카 불교유적지의 핵심으로 일컫어 지고 있는 이 도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약 1,500년간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고대도시로서, 2000년 이상된 불교 유적이 무수히 많다.

아누라다푸라는 판두카바야(Pandukabhaya)왕에 의해, B.,C.380년에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고, 1017년까지 1,500여년간 수도로서 화려한 문명을 피었다. 웨와스(Wewas)로 알려진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시설을 확충함으로서, 농업은 번창하였다. 그때 만들어진 저수지는 지금도 사용할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B.C. 3세기경에 불교가 유입되면서, 아누라다푸라의 문화에 강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수많은 사원, 거대한 탑과 조각상들이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둘레가 80킬로미터에 달하는 외벽이 도시 외곽에 건축되었고, 이는 런던보다 넓은 지역으로, 도시외벽 밖으로 나있는 문을 통해, 도시근교로 통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스리랑카의 건축학적 면에 있어,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은 아누라다푸라의 찬란한 역사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

 

◈ 아누라다푸라 도보 여행

아누라다푸라의 도시는 신사가, 구시가, 유적지의 세 구역으로 나뉜다. 말와투 강을 끼고 동남쪽에는 신시가, 북동부에는 구시가가, 서쪽에는 유적지가 있다. 신시가에서 구시가는 걸어서 20분 정도의 거리 인데 교통량이 가장 많은 아누라다푸라의 메인 로드인 니바쓰타 세티야 파라(Nivaththa Chetiya Para)로 연결되어 있다. 이 두 거리에는 버스 터미널과 시장, 우체국, 레스토랑 등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곳은 역시 구시가이다.

 

스리 마하 보리수 (Sri maha Bodhi Tree)

이수루무니야 정사에서 북쪽으로 약 1.2km지점에 아누라다푸라가 불교의 성지라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인식시켜 주는 곳 스리 마하 보리수가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 아쇼카 왕의 딸 상가밋타가 인도 부다 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서 당시 데바남피야 팃사 왕이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코끼리를 비롯한 야생 동물로부터 이 보리수를 지키기 위해 주변에 석대와 철책을 만들었다. 지금은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에 기도를 드리러 와, 이 철책에 와우를 묶고 석대 위에 꽃이나 코코넛 등을 공물로 바치고 있다.

열심히 기도를 드리는 순례자들의 모습에서는 부러울 정도의 신앙심이 느껴진다. 이 곳의 보리수는 푸르고 무성하지만 수령이 2,000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가늘다. 그러나 순례자들의 기도를 받아들일 것만 같은 강한 그 무엇이 느껴진다.

 

                

    스리 마하 보리수                            이수루무니야 정사                                  마힌탈레

 

◈ 바위에 세워진 작은 사원 이수루무니야 정사 (Isurumuniya Vihara)

흔히 록 템플이라 불리는 것이 바로 팃사 웨와 저수지근처에 지어진 이수루무니야 정사이다. 바위를 파낸 듯이 지어진 불당과 바위 위에 세운 다고바, 밝은 색으로 칠해진 불상을 모신 본당, 귀중한 발굴물을 보관하는 보물관은 아누라다푸라의 어떤 유적과도 다른 이색적인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사원이다. 기원전 3세기에 세워진 승원의 일부가 복구될 때 사원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본당은 비교적 새 건물이다. 본당에 모신 불상은 도쿄에 있는 천초사의 도움을 받아 색을 다시 입혔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하면 우선 사원 뒤에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가 보자. 다고바 이외엔 높은 건물이 없는 이 도시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아누라다푸라의 시가지가 동쪽으로는 거대한 누오라 웨와 저수지, 서쪽으로는 팃사 웨와 저수지, 바사웨크 쿠라마 저수지 사이에 낀 나무가 많은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위 표면에 새겨진 수많은 불교 조각도 빠뜨릴 수 없다. 예부터 쓰던 코끼리, 풍요의 신 파리쟈니와 불의 신 아구니의 조각 등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무엇을 기원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본당 옆에 있는 보물관에는 사원 북쪽의 왕궁 정원에서 발견되었다는 연인의 상과 왕족의 상이 있다. 연인의 사은 5세기 무렵의 작품이라는 데, 여기 조각된 남녀는 기원전 2세기 도투게무누왕의 아들 사리야 왕자와 그의 연인 마라라고 한다.

 

◈ 아누라다푸라의 상징 루완웰리 세야 대탑(Ruwanweli Seya Dagoba)

버스나 열차의 창 너머로 루완웰리 세야 대탑이 보이기 시작하면 차 안의 사람들은 갑자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누라다푸라의 도착을 알리는 것이 바로 이 탑이다. 루완웰리 세야 대탑은 유적지구 중심부에 세워진 희고 거대한 탑이다. 스리 마하 보리수에서 이 탑에 이르는 길은 가로등이 있는 아름다운 석조 보도로 이어진다. 스리마하 보리수의 돌문을 나와 이 석조 보도를 걷기 시작하면 우선 오른쪽에 로하 파사다라 불리는 돌기둥들이 있다.

로하 파사다를 지나 그 끝에 우뚝 선 루완웰리 세야 대탑을 향해 걷는다. 이 탑은 수많은 코끼리 조각에 둘러 싸여 있는데, 새하얗고 엄청나게 크다. 바블 세이프라 불리는 만두 모양의 탑으로 높이는 55m 이다. 처음 완공했을 때는 무려 110m 정도의 높이였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의 도투게무누 왕 시대에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왕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사다 팃사 왕자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완성시켰다. 도투게무누 왕은 남인도에서 침략해 온 타밀 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여러 차례의 전쟁이 있었는데, 도투게무누 왕 말년에 남인도의 엘라라 왕이 싸움을 걸어 왔다. 이때 사다 팃사 왕자는 선두에 서서 싸우기를 원했으나 아들을 염려한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왕자는 이 탑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게 된 아버지를 위해 대나무와 천을 이용해 하룻밤 사이에 탑이 완성된 모습을 만들어 죽기 직전의 아버지에게 보여드렸다고 한다. 위대한 왕 도투게무누, 그의 모습은 정문 왼쪽에 있는 조각을 통해 알 수 있다.

 

               

    루완웰리 세야 대탑                                            제타바나 다고바

 

제타바나 다고바(The Jetavana Dagoba)

마하투파(Mahathupa)동쪽에 수많은 벽돌로 이뤄진 제타바나 다고바가 자리잡고 있다. 마하비라하(Mahavihara)의 명에 따라, 다고바는 원래 400피트 즉, 120미터 높이로 건축되어졌다. 그 규모는 그당시 세계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 2개 다음으로 높은 건축물이었다. 마라세나가 3세기경 건축한 이 거대한 다고바는 불교가 사가리야(Sagaliya)까지 전파되었음을 입증하고 있고, 또한 그의 막강한 힘을 표현하기도 한다. 마하비라하(Mahavihara)의 명에 따라 건축되었다.

 

◈ 아누라다푸라 최고의 투파라마 다고바

루완웰리 세야 대탑에서 북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푸르른 숲속에 우뚝 서있는 것이 바로 투파라마 다고바이다. 종 모양의 높이 19m짜리 흰 탑으로,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석가의 오른쪽 쇄골을 모시려고 세운 것이다. 완공 당시에는 건초를 쌓아 놓은 듯한 산 모양이었던 것 같으나 1984년에 재건 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탑 둘레에는 몇 개의 돌기둥도 세워져 있다. 이것은 탑에 울타리를 치려고 만들어진 것 같다. 지금은 쓰러져 가는 기둥도 있어 옛날의 아름다운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투파라마 다고바                             라트나 프라사다

 

◈ 가드스톤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라트나 프라사다 (Ratna Prasada)

아누라다푸라 시대 말기에 왕과 승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다. 왕과 신하들이 경전을 무시한 압정을 하자 이에 반발한 승려가 이곳을 떠났다. 그러자 승려를 신봉하던 민중이 격노해 라트나 프라사다를 공격 했다. 곤경에 처한 왕은 승려에게 사죄하고 이곳을 재건하기 위해 힘썼다고 한다.

 

 

(3) 폴론나루와 (POLONNARUWA)

 

콜롬보에서 216km, 시기리아에서 66km, 아누라다푸라에서 103km 떨어져 있는 폴론나루와는 화려했던 중세시대(11~12세기) 심할라 왕조의 수도였다. 11세기초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타격을 받은 아누라다푸라에서 포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옛도읍에 남아있는 유적은주로 위자야 바후 1세와 프라크라마 바후 1세 등 두왕때의 것으로, 사원과 수도원, 그외 많은 건축물 등의 12세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스리랑카 중세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잘 보여준다.

그 전성기에는 타이나 미얀마에서 승려가 찾아올 만큼 불교 도시로서 번영 했다. 그 영화를 전해주는 유명한 대유적군이 지금은 소도시가 되어 버린 이곳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유적이 남아 있는 구시가는 거대한 인공 저수지 부근에 있다.

파라쿠라마 사무드라라고 불리는 이 저수지는 단순히 저수지라 부르기엔 엄청나게 크고 상당히 많은 양의 물을 담고 있다. 일찍이 이땅을 지배해 왔던 역대의 왕들은 도시를 건설 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관개용 저수지와 수로의 정비였다고 한다. 농사로 먹고 사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물의 확보는 일상 생활과 밀착된 아주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파라쿠라마 사무드라도 그렇다. 폴론나루와의 번영은 드라이 존이라 불리는 이 메마른 대지에 생명의 물을 준 파라쿠라마 사무드라 덕분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한때 정글 속에 유적이 잠자고 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 도시는 활기 있어 보인다. 그것은 아마 물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거대한 저수지는 사람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가지를 도는 수로에는 물이 콸콸 흐르며 밭과 숲을 기름지게 한다. 사람들은 또 식사 준비나 목욕할 때도 그 물을 쓴다. 저녁 무렵 연못가에 서서 고기를 잡으러 나가는 작은 배를 보고 있으면 낮에 본 수많은 유적에서 받은 인상이 겹쳐져 조용하고 평온한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폴론나루와는 그런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고도이다 

     

                                              파라크라마바후 상                                 랑카틸라카

 

수수께끼의 석립상(Statue of Unknown Man or The Sage)

파라크라마바후 상(Statue of King Parakramabahu)

포트굴 비하라에서 100m 떨어진 곳에는 흰 바위 표면에 사람보다 약간 큰 입상이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은 작열하는 태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서 있으나 수염을 기른 날카롭고 위엄 있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조각은 스리랑카의 구 10Rs짜리 지폐에 인쇄되어 있어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친숙하다.

흔히 폴론나루와에 군림했던 왕들 가운데 가장 번영했던 파라쿠라마 바후 1세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조각에 관한 설이 분분하다.

양손에 패엽이라는 야자 잎에 쓰여진 불전을 들고 있어 철학자 플라스티가 책을 들고 있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며, 인도의 종교가 아가스타야라는 설도 있다.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왕의 조각상으로, 파라크라마 사무드라(Parakrama Samudra)의 제방위에 서 있다. 사롱(Sarong ; 말레이반도인들이 허리에 감는 천)이 잘 묘사되어져 있고, 두손에 들고 있는 것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높이 4m에 이르는 돌에 새겨 만들었다.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은 1153년 ~ 1185년에 폴론나루와시대를 지배했던 가장 중요한 왕이다. 그시대에 많은 발전을 하게되었고, 특히 관개시설의 발달이 이루짐에 따라 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시아의 서쪽 즉 아랍, 중국과의 사이에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파라크라마바후왕은 165개의 댐과 3,000개의 수로, 2,376개의 물탱크를 만들었다. "물한방울이라도 농업과 사람이 사용하지 않고서는 바다로 흘러갈 수 없다"라는 단오한 각오로 관개시설 확충에 노력을 기울렸던 파라크라마바후왕은 지금까지도 스리랑카국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역사학자에 의하면, 파라크라마바후왕이 관개시설의 축조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을 남기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조각상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멍에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다른 이들은 왕권의 상징인 끈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거대한 불상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랑카틸라카(Lankatilaka) 신전

사막처럼 건조한 땅에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건물이 있다. 올려다 보면 환상을 보고 있는 듯해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다시 확인해 볼 정도로 거대하다. 13세기에 파라쿠라마 바후 3세에 의해 지어진 뒤 비자야 바후 5세가 보수했다. 높이는 17.5, 길이 52m, 넓이 18m 정도이다.

탑 안에 들어서면 머리가 없는 거대한 입상이 보인다. 바깥쪽 벽에는 신할라의 게디게 건축 양식의 전형인 부조가 보인다.

 

◈ 13세기의 벽화가 어렴풋이 남아 있는 티방카 피리마게 사원(Tivanka Image House)

연지에서 북으로 약 700m 최북단에 있는 유적이다. Tivanka는 범어로 트리반가인데, 몸을 세번 구부린 포즈를 말한다. 안에 있는 불상은 허리와 머리가 세 방향의 대칭으로 굽어 있다.

좁은 곁방에는 아름다운 데바스(Devas; 반신), 보디사타바스(Bodhisattvas; 깨달은 중생)상이 성전내부로 들어가려는 참배객을 맞이하게 된다.

벽화는 13세기의 것으로 폐허의 도시가 된 폴론나루와를 재건하기 위해 파라쿠라마 바후 3세의 명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 외관은 화려한 디자인과 주제를 가지고 신도들의 불심으로 하는 장식이 가득채워져 있으며, 내부는 산사라(Sansara: 윤회세상)을 통해 부처님의 설교하는 장면을 표현해 놓고 있다. 특히, 외관의 층에 조각되어 있는 필이미지(Pillimage)의 재미있는 묘사되어 있다.

  

              티방카 피리마게                                           갈 비하라

 

◈ 폴론나루와 유적의 대걸작 갈 비하라(Gal Vihara)

갈 비하라 입구 앞에는 음료수를 파는 간이 판매대와 노점상이 몇 채 늘어서 있다. 거기서 동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갈 비하라이다.

이는 파라크라마바후(Parakramabahu)왕이 건립한 것으로서, 바위면에 조각한 4개의 거대한 불상이 유명하다.

열반상, 입상, 좌상 등 세개의 불상 앞에 서면 큰 석상이 주는 위압감보다 완만한 선의 자태나 온유한 표정에서 고요와 편안함의 우수가 느껴진다. 높이가 4.6m인, 한가운데 팔을 교차 시키고 서 있는 조각은 석가의 수제자인 아난다이다.

곁에 누워 있는 그의 스승 석가가 열반에 들어 슬픔에 젖은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 눈 주위나 교차 시킨 팔에서 그의 슬픔이 전해져 온다. 연꽃 대좌에 서 있어서 제자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석가라는 설도 있다. 높이는 7m이다.

그 옆의 열반상이 바로 부처이다. 유선형의 평온한 자태로 누워 열반에 들려 하고 있다. 그 얼굴은 부드럽고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키리 베헤라 사원(Kiri Vehera)

아라하나 피리베나(Alahana Pirivena monastic)왕조의 2개의 거대한 불탑중의 하나로, 가장 잘 보존되고 있는 스리랑카의 고대 다고바로 파라크라마 바후1세(King Parakrama Bahu1 : 1153-1186 C.E.)의 왕비였던 수바드라(Subadhra)에 의해 건축되었다. 석회박죽을 이용한 치장벽토, 주위의 작은 건축들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아누라다푸라의 고고학의 발굴품들은 일찍이 B.C.500년에 사람들이 이 지역에 살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하밤사(Mahavamsa; 인도 연대기)에 의하면, '아누라다스(Anuradhas)'라고 불리우는 세명이 왕이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도시는 싱할라(Sinhala)왕조의 선조로 보여지는 인도북쪽으로부터 온 비자야(Vijaya)왕자가 세운 도시로 알려져있다.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의 수도로, 약 1,400년동안 지속되었다. A.D. 10세기경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때 아누라다푸라는 가장 위대한 역사의 수도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20평방 마일에 걸쳐, 수만명정도의 인구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00개나 되는 방을 갖추고 있는 왕궁에서 왕이 살았으며, 왕궁은 도시의 중앙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바타다게                                    키리 베헤라

 

바타다게(Vatadage)

쿼드랭글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원형 불탑이다. 사방으로 난 입구에는 각각 문스톤과 가드스톤이 있는데, 특히 북쪽 입구에 있는 것이 비교적 그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고 있다. 가드스톤은 입구에서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 내부의 본존을 지키기 위해 불탑이나 절 입구에 세웠다.

문스톤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를 나타내는 것인데 아누라다푸라의 것과 무늬가 다르고 숫소도 없다. 옛날 이곳을 참배한 사람들은 이 문스톤 위에서 발을 씻고 나서 불탑 안에 들어갔다.

 

문 스톤(Moon Stone)

문스톤과 가이드스톤은 싱할라(Sinhala) 조각의 독특하면서도 전형적인 것으로, 사원, 신전, 다고바 등의 중요한 건물의 입구나 바닥에서 자주 볼수 있다. 문스톤은 반원모양의 얇은 돌에 띠를 만들어 각각의 띠에 동굴들을, 디지니 만화에서의 서로 붙여 있는 셀(Cel)처럼 새겨놓았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불교의 사상을 함축한 문스톤에 나타나는 동물들

 

오리 - 분별하는 분별심 / 물 위의 기름도 기름만 골라 낸다.

사자 - 부처님의 말씀 / 광야에서 사자가 으르렁거리면 광야는 고요해짐.

소 - 석가족의 상징이며 태양을 상징.

코끼리 - 마야부인dl 하얀 코끼리 태몽을 꾸셨으니 부처 도래 상징.

 

◈ 도서관 유적 포트굴 비하라 (Potgul Vihara)

저수지 파라쿠라마 사무드라 옆으로 난 넓은 도로에서 숲으로 들어가다 보면 4개의 작은 다고바에 둘러싸인 돔형 건물이 있다. 정적의 땅에 세워진 우주 기지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은 예전에 도서관이었던 곳인데, 야자잎으로 만든 불교 경전이 보관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불전 등의 문헌을 낭송했다고 한다.

 

  

             포트굴 비하라                                      시바 데발라

 

◈ 불교 유적 안에 있는 힌두 유적 시바 데발라 (No.1 Siva Devala)

궁전 북쪽에 있는 힌두교 사원이다. 폴론나루와 시대 말기인 13세기에 지어진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건물의 디자인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옛날 불교 왕국의 수도에 힌두교 사원이라니 약간 의아스럽지만, 이것은 그 당시 왕비 가운데 한 사람이 힌두교도였기 때문에 지었다는 설과 남인도의 쵸라인들이 13세기에 폴론나루와를 재 침략했을 때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하타디게(Hatadage)

바타디게의 거의 정면에 있는 불치사의 흔적으로 12세기에 닛상카 말라 왕에 의해 건설되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 벽에 위엄스러운 산스크리트 문자의 비문이 남아 있다. 이것은 닛상카 말라 왕을 칭송하는 글이라 한다. 비문의 주위에 있는 댄서와 음악가들의 조각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흥미롭다.

 

라타 만다파야(Lata Mandapaya)

보리수 흔적에서 북쪽으로 연꽃 줄기 모양을 한 석주가 8개 줄지어 있다. 이 기둥은 곡선을 그리며 하늘을 향하고 있는데 연꽃의 줄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석주끝은 연꽃의 봉오리 모양이다. 닛상카 말라 왕이 이곳에서 승려의 독경을 들었다고 한다.

 

      

                 히타디게                                       라타 만다파야

 

황제 목욕탕(Royal Bath)

폴론나루와 갈비하라로부터 북쪽으로 조금올라가면, 12세기후반에 만들어진 황제 목욕탕이 있다. 단지 돌로 만들어진 이 욕조는 8개의 연꽃잎모양을 상징하여 만들어졌다. 제타바나왕조(Jetavana Monastary)의 유적으로, 500여개의 유적들중 하나이다.

 

시바 데빌라 (No.2 Siva Devala)

파발루 비하라에서 200m 더 동쪽으로 가면 쿼드랭글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데빌라와 아주 흡사한 데빌라가 또 있다. 이것은 11세기에 인도에서 대거 침략해 온 쵸라 왕조의 타밀인이 폴론나루와를 정복한 시대에 세운 것이다.

 

        

             황제 목욕탕                              갈포타                                       랑콧 비하라

 

◈ 돌에 새긴 고대의 책 갈포타(Gal Potha)

하타다게의 동쪽에 있는 야자잎 책 형태를 한 석비 Stone Book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길이 약 9m, 폭 1.5m, 두께 44~66cm인데 닛상카 말라왕의 명령에 의해 약 100Km나 떨어진 미힌탈레에서 가져온 돌에 문자를 새겼다. 비문은 인도에서 쳐들어 온 침략자에 관한 내용과 폴론나루와 주변의 작은 나라들과의 관계, 그리고 닛상카 말라 왕에 대한 찬양 등으로 되어 있다.

 

◈ 폴론나루와의 유적군 중 주 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쿼드랭글(Quadrangle)

궁전 북쪽, 구시가의 거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쿼드랭글이란 사각형을 뜻하는데, 이름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각형 정원이 12개의 건축물이 모여 있던 곳이다. 이곳은 신할라 왕조시대에 불치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은 신할라 왕조시대에 불치사가 있던 곳으로 폴론나루와 불교의 중심지였다.

 

 

                   

                쿼드랭글 약도                                                           쿼드랭글

 

 

◈ 폴론나루와 최대의 다고바 랑콧 비하라(Rankot Vihara)

시바 데빌라에서 서쪽으로 되돌아와,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원래 오던 길을 북상하면 큰 다고바가 보인다. 12세기에 닛상카 말라 왕이 세운 것으로 높이 55m, 직경 55m이다. 아누라다푸라의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물방울 모양의 다고바이다. 랑콧 비하라라는 것은 금으로 만든 첨탑을 의미하는데, 옛날에는 뾰족탑의 부분이 금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 임시 저장소 같은 폴론나루와 박물관(Polonnaruwa Museum)

다시 파라쿠라마 사무드라를 따라 난 도로를 북쪽으로 올라가 국영 레스트 하우스 앞으로 가면 바로 매표소 간판이 서 있는 곳에 이른다. 이곳이 바로 폴론나루와 박물관이다. 오른쪽이 매표소 왼쪽이 박물관이다. 자유 이용권을 가진 사람은 매표소에서 도장을 받아야 한다. 불상도 있고 벽돌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기도 해서 유적들을 임시적으로 모아둔 오두막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제대로 정리가 안된 상태이지만 그런대로 폴론나루와의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다.

 

◈ 과거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는 궁궐(The Royal Palace)의 흔적

매표소에서 100m 동쪽으로 가면 파라쿠라마 바후 1세의 궁전 입구가 나타나는데 서쪽에 있는 벽돌로 지은 중후한 건물이 파라쿠라마 바후 1세의 궁전이다. 7층 규모의 건물이었던 것 같으나 지금은 3층의 벽밖에 남아 있지 않다. 벽은 3m에 가까운 두께이다. 36개의 기둥은 궁전의 홀 천장을 지탱하던 것이었다. 방은 50여 개였다고 한다. 궁전 안의 동쪽에 있는 것은 각의 장 King Council Chamber 흔적이다.

여러 개 서 있는 돌기둥에는 대신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대신들은 그 장소에 않아 회의를 했다.

 

   

                궁궐                                                           투파라마

 

투파라마(Thuparama)

쿼드랭글의 남쪽 입구에서 들어오면 왼쪽에 있는 사가형의 중후한 불당이다. 맨발로 계단을 올라가면 태양의 익은 돌 때문에 발바닥이 뜨겁지만 불당 안으로 들어가면 아주 차가워 섬뜩할 정도이다. 투파라마의 중후한 벽에 둘러싸여 있으면 자신의 몸이 아주 작게 느껴진다. 불당 안에 있는 불상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일그러져, 얼굴이나 손발은 겨우 윤곽만 갖추고 있을 뿐이다. 두터운 벽에 뚫린 작은 구멍에서 어두컴컴한 불당 안으로 아침, 저녁에 태양 광선이 들어와 부처의 얼굴을 비추도록 되어 있다.

신할라의 게디게 건축 양식을 따른 것으로 건물 자체는 아직도 뚜렷한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도 남아 있다. 벽의 두께가 무려 2m나 된다.

 

 

(4) 미힌탈레 (MIHINTALE)

 

아누라다푸라 동쪽 11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미힌탈레는 바위언덕으로, 스리랑카의 불교의 요람지이다. B.C. 247년에 데바남피야티싸(Devanampiyatissa)왕이 아소카왕의 아들 마힌다(Mahinda)왕자로부터 불교를 전승받은 곳으로서, 데바남피야티싸왕은 새로운 종교인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미힌탈레(마힌다의 언덕)은 곧 불교 전파의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미힌달레의 정상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1840개의 계단을 밟아야 한다.

수m의 폭 양옆은 꽃나무가 심어져 있는 계단은 Bhathika Abhaya(22B.C~7A.D)왕때 만들어진 것으로, 포손(Poson : 5, 6월경 만월시기)동안에는 언덕과 계단은 거대한 백색으로 장식하여 전역에서 이곳 미힌탈레로 오는 불교순례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미힌탈레는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성지이다. 1934년, 정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유적군이 발굴된 이래 스리랑카에서 가장 중요한 성지의 하나로 여겨지며 순례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특히 불교 전래의 날이라 전해지는 매년 6~7월에 걸친 포야 데이에는 이곳에서 포손 축제가 열려 수천 명의 신자가 각지에서 몰려든다. 그들은 단체로 미힌탈레 산 정상에 있는 바위산에 올라 만월을 향해 절을 올린다.

그러나 평상시의 미힌탈레는 조용한 농촌이다. 시가지라고 불릴 만한 곳도 없고 간선도로가 교차하는 교차로 주변에 작은 집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천천히 걷기 시자해 마하세야 대탑으로 난 계단을 오를 때는 플루메리아의 달콤한 향이 난다. 부다 플라워라 불리는 이 꽃이 성지로 향하는 수많은 계단을 오르는 피로를 씻어주는 것이다.

지금도 스리랑카는 불교국이라 자부할 만큼 불교도가 많다. 불교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 들어 있고 많은 관습과 금기를 만들어 왔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온화한 생활 발식도, 여행객에게 친절한 따뜻함도 이곳 미힌탈레에서 시작된다.

 

◈ 계단을 오르기 전에 미리 공부할 수 있는 미힌탈레 고고학 박물관

팃사 왕과 마힌다가 만난 곳이나 절, 그리고 이제까지 발굴된 도자기 등을 전시, 설명하고 있다. 고대 병원에서 발굴되었다고 하는 수술대나 수술 도구를 보고 있으면 그 무렵에 어떤 수술을 하고 있었나 싶어서 묘한 느낌이 든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미힌탈레의 역사를 알기 위해 꼭 들러 보자.

 

◈ 사방에 동물을 새긴 가드스톤이 있는 칸타카 세티야 (Kantaka Cetiya)

주차장에서 계단을 올라 첫 층계참에서 오른쪽으로 오르면 보이는 불탑이다. 높이 12m, 둘레의 길이 130m로 기원전 60년경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곳의 문스톤이나 기둥, 가드스톤 등의 조각은 참으로 훌륭하다. 가드스톤은 네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방향에 따라 동물이 정해져 있다. 동쪽은 코끼리, 남쪽은 소, 서쪽은 말, 북쪽은 사자이다. 이 불탑의 돔은 2,000년 전에는 30m이상이었을 것 같다. 이것이 발굴된 것은 1930년대이다.

 

     

         칸타카 세티야                                      마하 세야 대탑                                나가 포쿠나

 

◈ 웅대한 풍경이 펼쳐지는 산 꼭대기의 다고바, 마하 세야 대탑

언덕 꼭대기에 있는 탑으로 석가의 머리카락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최고이다. 언덕의 기슭은 물론이고 아누라다푸라까지 내다 볼 수 있다. 마하 세야 대탑의 계단을 내려오면 정면에 전망대가 있다. 여기에서는 석양에 마하 세야 대탑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볼 수 있다.

 

◈ 사자와 코브라의 조각이 아름다운 신하 포쿠나 나가 포쿠나(Sinha, Naga Pokuna)

석굴의 옆을 내려간 곳에 신하 포쿠나가 있다. 포쿠나란 옛날 목욕탕의 흔적이다. 이 포쿠나는 사자가 뒷발로 서 있는 석상으로 유명하다. 스리랑카 조각의 최고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서 위쪽으로 가다가 조금 오른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나가 포쿠나는 5개의 머리를 가진 코브라 조각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물을 담아두는 벽 부분에 새겨져 있다. 또 신하 포쿠나에서 왼쪽으로 올라간 곳에는 절의 흔적이 있는 데, 남아 있는 돌기둥 가운데 두 개에는 절의 규칙 등이 새겨져 있다.

 

 

(5)시기리야 (SIGIRIYA)

 

이 바위산은 정글 속에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다. 주위의 숲과 상당히 대조적인 적갈색 바위산은 하늘을 향해 거의 수직으로 솟아 있다. 그 경관을 보고 있으면 지구의 에너지가 이렇게 기막힌 것을 만들어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기리야 여행은 이런 놀라움과 더불어 시작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바위산 꼭대기에 화려한 왕궁을 짓고 살았던 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억지로 왕좌에 오른 젊은 왕자는 동생의 복수가 두려워 이 성을 쌓았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경사가 급한 바위를 거의 기다시피 하며 산 꼭대기에 올라서 지금은 유적밖에 남아 있지 않은 왕궁에 서면 들려오는 바람 소리 뿐이다. 이렇게 사람의 인적이 없는 쓸쓸한 곳에서 스스로 고독을 택하고 권력을 손에 넣은 젊은 왕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영국의 통치하에 있던 1875년에 우연히 이 바위산을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있던 영국인에 의해 처음 발견된 ‘시기리야 레이디’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로서 지금은 전세계에 알려진 벽화이다. 1,400년이란 세월의 잠에서 깨어난 18명의 미녀들은 사람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뚜렷하고 조용히 빛나는 색채는 아득한 시간의 흐름조차 잊게 한다. 미친 왕이 남겨놓은 최고의 걸작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스리랑카 유적을 찾는 여행에서 이 바위산은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이 왕도로 사용된 것은 1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 바위산은 아누라다푸라보다도, 폴론나루와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인간의 야망과 슬픔에 찬 시기리야. 그것은 지금도 반복되는 역사일지도 모르지만 이 바위산의 왕만큼 고독한 역사를 만든 인물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 시기리야 록의 역사

 

고대부터 불교 승려들의 수련장이였던 시기리야 록은 5세기 후반에 11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이곳을 다스리며 장대한 바위산의 걸작을 남긴 광기의 왕 카샤파의 전설은 스리랑카인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카샤파는 459~477년에 아누라다푸라를 통치했고 넓은 저수지를 건조한 다투세나 왕의 장남이었다. 카샤파에게는 배다른 동생 목갈라나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왕족 혈통의 여인이었고 카샤파의 어머니는 평민이었다. 이 때문에 카샤파는 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 계승권을 빼앗길까봐 두려워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금하고 왕위를 박탈했다. 동생 목갈라나는 형의 이런 행동을 증오하며 인도로 망명했다. 그 후 카샤파는 아버지에게 감춘 재산을 전부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다투세나 왕은 아들을 자신이 건설한 칼라웨와 저수지로 데리고 가서 저수지를 가리키며 이것이 내재산의 전부다라고 말했다. 이에 분노한 아들 카샤파는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고 부하를 시켜 살해한다. 동생 목갈라나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버지를 살해한 후회와 고통 때문이었는지 카샤파는 신들린 사람처럼 시기리야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위에 궁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7년 후 그는 그의 왕좌를 산 정상의 궁전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11년 후 이복 동생 목갈라나가 인도에서 군대를 이끌고 그의 형과 싸우러 왔다. 형제간의 싸움이 한창일 때 카샤파가 타고 있던 코끼리가 전진하던 방향에 나타난 수렁에 다리가 빠졌다.

통제력을 잃은 카샤파의 군대는 후퇴한다. 혼자 남겨진 카샤파는 단검으로 목을 찔러 자살하고 말았다. 그 후 목갈라나는 시기리야의 왕궁을 불교 승려들에게 기증하고 수도를 다시 아누라다 푸라로 옮겼다.

 

 

(5) 담불라(Dambulla) 1991년 유네스코 유산

 

                     

                   담불라                                                        제 1동굴 

             

                제 2동굴                                                      제 3동굴

 

"바위"라는 뜻에 "담바(Damba)"와 "샘"이라는 뜻의 "율라(Ulla)"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로 담불라는 시기리야에서 약 19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높이 180m로 홀로 우뚝서있는 거대한 바위에 갖가지 사원과 탑을 만들어 스리랑카의 불심을 엿볼수 있다.

여기에는 B.C. 1세기때 만들어진 유명한 바위사원이 있는데, 현지인들은 "담불라 가라"라고 부르는 사원이 바위산의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스리랑카의 불교 유적지는 누구나 다 맨발로 다니게 되어 있는데, 절문을 신을 벗고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동굴을 따라 복도가 있고 5개의 동굴이 나란히 있다. 5개의 동굴을 통해 사원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첫번째 동굴은 약 14m정도의 자연석에 새겨 놓은 열반에 든 와불상이 있다. 불교에 연관되는 여러 그림들이 있다. 벽에는 15세기에서 18세기사이에 그려진 프레스코(Fresco)형식의 다양한 그림들이 남아 있다. 가장 잘 만들어졌으면서도 가장 큰, 2번째 동굴에는 다양한 신들의 조각상과 더불어 수많은 불상이 보존되어지고 있다. 천장 또한 프레스코형식으로 부처의 삶을 그려 놓았으며, 이 벽화로서 신할라인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이 동굴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처럼 동굴을 파내고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산의 자연동굴에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고쳐 나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암벽에 흠을 파서 빗물이 동굴내로 흘러들지 못하게 하고 동굴내의 바닥은 고르게 정비하여 굴속은 구서구석 하얀 옻칠을 하여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벽화의 색이 바래면 그 위에 또 다시 새로운 그림을 그렸는데 원래 있던 그림의 무늬를 그대로 활용한 경우도 있고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 경우도 있다. 불상을 포함하여 벽도 전면이 채색되었으며, 그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조는 아직까지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제 1동굴(데바 라자 비하라 Deva Raja Vihara)

이름은 신들의 왕의 절 이란 의미이다. 가장 오래된 석굴인데, 여기에는 이 사원 최대의 불상인 열반불이 누워 있다. 벽과 같은 자연석으로 조각된 것으로 전체 길이는 약 14m이다. 이 거대한 본존불은 전신이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발바닥만은 빨갛게 불꽃 같은 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제 2동굴(마하 라자 비하라 Maha Raja Vihara)

이름의 뜻은 위대한 왕의 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왕이란 절을 세운 도투게무누 왕으로 절 안에 그의 석상도 있다. 제 2동굴은 담불라 최대의 동굴이다. 폭이 약 52m, 깊이가 25m, 높이는 입구 부분이 약 6m이고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낮아 진다. 동굴 안에는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나 이곳에서 볼 만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벽과 천장에 그려진 벽화이다. 석가의 생애 이외에 스리랑카의 역사도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는 신할라인과 타밀인의 전쟁을 그린 것도 있어 흥미롭다. 벽화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렷하게 보이는데, 이것은 신자가 피운 향에 의해 검게 그을릴 때마다 보수를 거듭해서 그렇다고 한다. 여하튼 대단한 힘이 느껴진다.

 

제 3동굴(마하 알트 비하라 Maha Alut Viharaya)

이름의 뜻은 위대한 새로운 절. 이름 그대로 18세기의 왕 킷티 시리 라자하에 의해 지어졌다. 길이 9m의 와불을 비롯하여 도합 57개의 불상이 있다.

그간 괴롭혔던 타밀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석굴은 15세기부터 스리랑카를 점령했던

포르투갈 등 서양 세력들의 침입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한 호국 불심으로 조성된 사원 입니다

 

 

제 4동굴(파스시마 비하라 Pachima Viharaya)

'서양의 절' 로 좌상이 많고,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부터 스리랑카를 구하기 위한

구국 일념에서 세워진 사원으로 추정 됩니다. 다른 석굴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으며,

몇 개의 불상이 있는 정도 입니다.

 

 

 

❋ 제 5동굴( Devana Alut Viharaya)

1915년에 지어진 가장 새로운 절이다. 석굴은 이와 같이 제 1동굴에서 제 5동굴까지 오래된 순서대로 늘어서 있다. 그러나 제 1동굴과 제 2동굴의 벽화 대부분은 17세기의 왕 세나라트의 명에 의해 복구되었고, 제 3동굴을 만들때에도 많은 벽화가 복구 되었다. 복구라고는 해도 전에 그려져 있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과 전혀. 별개의 그림을 그려 넣는 경우가 있으므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어느 때의 그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4동굴                                                  제5동굴

 

◈ 세계 8대 불가사의 바위의 요새 'Rock-Shelter Mountain'

포론나루와(Polonnaruwa)로부터 자동차로 약 50분 거리의 정글을 가다보면 갑자기 우뚝 선 "바위의 요새"가 나타난다. 이것은 예술가이며 정신 이상자이기도 했던 카샤파(Kasyapa)왕이 피난을 위하여 바위위에 세운 아름다운 궁성터이다. 이 큰 바위는 멀리서보면 마치 큰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듯이 웅장하며 "싱하기리"라고 불리기도 한다.

부의 신, 쿠베라(Kubera)의 왕국을 지상에 재건하려했던 카샤파(Kasyapa)는 정원, 옥외 물탱크, 인공연못, 분수 등과 더불어 화려한 치장을 하였다. 메마른 지대(바위산)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저수지로부터 파이프와 바위를 뚫어 만든 수로를 이용하였다. 저지대에 있는 저수지의 물을 높은 왕궁까지 끌어 올리려 풍차를 이용하였다. 또한 인공저수지 주변을 정원으로 가꾸었다. 얕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연못에 하늘의 구름이 반사되어지는 동안에 입구부근, 수중정원중앙에 있는 섬에는 대형 천막을 쳤다고 한다. 7년이나 걸러 만든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화법에 독특한 그림이 뛰어난 카샤파의 예술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18년 만에 카샤파의 왕궁은 수도로서 버림받게 되었다.

관계시설, 분수 정원를 조성하는데 있어, 대나무를 이용하여 물을 바위꼭대기까지 끌어 올리는 뛰어난 기술을 보여줌으로써, 8대 불가사의로 손꼽히고 있다.

 

❋ 들어가는 길 : 서쪽입구를 향하여 난 길을 따라 갈 수 있으나, 문화 삼각지대를 놓치게 되므로, 서쪽입구로 돌아 입장하는 것이 좋다. 해자내부에는 사설 주차시설이 있어 서쪽입구에서 보도보다는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 티 켓 : 06:00에 오픈을 하므로, 티켓사무소은 07:00경에 오픈한다. 미리 입장하기를 원하면 전달 매표를 해두어 입장할 수 있다.

- 바위요새를 둘러보는데 적어도 2시간정도는 예상을 해야 하고, 07:30까지는 꽤나 조용한 분위기에서 관광이 가능하다.

- 프레스코를 둘러보기에 적당한 빛이 들어오는 늦은 오후로 일정을 잡는 것도 좋다.

- 공휴일에는 대기행렬이 길어지고, 오전에는 바위산이 매우 혼잡하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미러 월(Mirror Wall)

바위의 요새 입구, 거대한 벽면을 매끄럽게 만들어 그곳에 다양한 문자와 그림을 그려, 당시의 역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그들은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해 벽면에 그래피토(Graffito:고적의 기둥 혹은 벽에 긁어서 그려놓은 그림 혹은 문자)를 이용하거나, 프레스코를 이용하였다. 미러 월의 고대 그래피토는 10세기전후로 하여 만들어졌으며,

물 내림을 위한 지붕이 있어, 오랜 세월동안 비로부터 잘 보호되어 미러월은 완벽하게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래피토중에는 카샤파(Kasyapa) 왕과 그의 이복동생 모갈라나(Mogallan)의 서사시가

싱하리문자로 남겨져 있다. 프레스코양식의 벽화는 대부분은 시기리야의 여인을 묘사했다.

 

 

            

               거울                                                저수지

 

◈ 연꽃 수로

연꽃으로 가득한 이 수로에는 악어가 살고 있어 여기 빠진 사람은 다시 살아나올 수 없다고 한다. 이 수로는 시기리야 록과 그 정원을 둘러싼 성벽의 둘레에 있는 데 궁정을 감싸고 도는 듯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

 

저수지

입구에 들어서면 바위산이 저만큼 보이는 넓은 정원이 있다. 여기서 바위산 입구까지 작은 길이 똑바로 나 있는데, 그 양쪽에는 모두 4개의 저수지가 있다. 녹색 물이 담긴 저수지 너머에 다섯 개의 구멍이 난 원형이 석판이 흙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 이상한 언형 석판과 저수지는 상하수도 시설의 일부이다. 지면 밑에 파이프를 통해 호수나 높은 곳에서 펌프로 저수지에 물을 끌어들이게 되어 있다. 물이 원형의 석판을 지날 때 구멍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분수 역할을 한다. 네덜란드의 풍차처럼 풍차로 물을 퍼올리고 있다. 이 시설은 4세기 무렵의 것이라고 한다.

 

(6) 마탈레와 아루비하라 (MATALE & ALUVIHARA)

 

약 2시간 남짓한 산책으로 번화가를 전부 구경할 수 있는 작은 마을 마탈레. 이 마을 사람들은 아직 외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이렇다 할 특색도 없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만이 존재하는 듯한 마을이다.

이 마을 일대는 스파이스의 산지로서 스리랑카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만이 존재하는 듯한 마을이다.

그러나 마탈레에도 자랑거리가 있다. 이 마을 일대는 스파이스의 산지로서 스리랑카 사람들의 식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다양한 스파이스가 마탈레의 풍부한 물과 혜택 받은 기후 아래서 자란다. 그리고 마을 북쪽에 있는 석굴 사언 아루비하라는 기원전 88년, 그때까지 구전되어 왔던 석가의 가르침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문자화 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이다. 또 하나, 연녹색 산 계곡에서 흰 비단을 펼친 듯 떨어져 내리는 폭포 휴나스 폴. 그 하나하나가 여행객의 마음을 끄는 매력인지도 모른다.

소박한 사람들이 있고 역사나 자연, 산업의 측면에서도 자부심을 가질 만 하기에 참으로 행복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탈레                              마탈레 힌두사원                       아루비하라

 

전설의 석굴 사원 아루비하라(Aluvihara)

 

아루비하라는 기원전 1세기에 세워진 불교 사원으로 아누라다푸라, 담불라, 미힌탈레에 이어 스리랑카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사원답게 많은 불전을 보전하고 있다. 큰 바위를 파내서 만든 사원 안에는 와불, 묵상하는 불상, 설교하는 형태의 입상 등이 보존되어 있다. 바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자타카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2,000년 전부터 불교도들이 집회장으로 이용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볼 만한 것은 제2동굴의 지옥도로서 여러 가지 지옥의 풍경이 그려져 있어 무시무시하다. 아루비하라의 계단을 올라가면 있는 도서관에서는 옛날 승려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용했다는 야자잎으로 된 종이에 글자를 쓰는 방법을 직접 볼 수 있다. 천연의 야자 잎을 찐 후 햇볕에 말려 건조 시켜서 무두질을 하면 파피라가 완성된다. 이 종이는 현재 이용되는 종이 보다 훨씬 튼튼해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문서로 보존되고 있다. 이 파피라에 철 필로 글자를 쓰고 재와 식물성 유지를 섞은 액체를 바른 후에 쌀가루로 문지르면 훌륭한 문서가 완성된다. 이 밖에도 도서관에는 불상이나 경전 등이 보존되어 있다. 캄보디아, 태국, 인도, 중국, 한국에서 기증했다는 불상들을 보고 있으면 그 나라에 따라 특징이 미묘하게 달라, 불교가 전파되고 변화한 모습을 쉽게 알 수 있다.

 

◈ 대자연에 수놓아진 아름답고 시원한 휴나스 폴(Hunas Falls)

 

마탈레나 캔디에서 출발한 버스가 서는 곳은 버스가 다니는 길과 산 중턱의 휴나스 폭포로 가는 갈림길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택시를 이용하지 않는 한 여기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폭포는 이 갈림길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그리고 폭포 위에 서 있는 고급 호텔 휴나스 폴즈 위쪽에도 또 하나의 작은 폭포가 있다. 폭포가 있는 휴나스기리야산의 표고 915m 정상까지는 휴나스 호텔에서도 약 2km를 더 가야 한다. 그러나 이 일대의 자연은 매우 아름다우니 시간이 있으면 꼭 올라가 보자.

 

바틱 팩터리(Batic Factory)

 

마탈레 근처의 도로변에 세워진 몇몇 바틱 팩터리에서는 바틱을 제작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 준다. 공장이라고 하면 기계가 있고 기계 냄새가 나며, 웬 지 딱딱한 이미지가 연상되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다. 벽이 없는 지붕 아래서 수십 여 명의 젊은 여성들이 의자에 않아 작업을 하고 있다. 밑그림이 그려진 흰 천에 녹인 납이 든 도구로 작은 반점을 찍거나 한다. 발 밑에는 커다란 납 덩어리와 불이 든 냄비가 있어, 이 냄비에 납을 녹여 사용한다. 손놀림이 아주 익숙해서 희고 큰 천은 금방 납으로 무늬가 찍혀 나간다. 같은 그림 천이라 하더라도 납을 바른 부분이 다른 판형을 몇 가지 사용하면 여러 종류의 배색을 만들 수 있다. 처음에는 황, 적, 청 그리고 마지막에는 검정 색의 순서로 옅은 색부터 염색을 하는 것이다.

 

            

         휴나스 폴                                             바틱공장 

         

           아담스 피크                                            아담스 피크 일출                                     스리파다

 

스리파다 SRI PADA (ADAM’S PEAK)

 

스리파다는 스리랑카 제일의 성지로서 오늘날 산 정상에 남아 있는 성스러운 족적들은 종파를 초월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맑은 날이면 라트나푸라에서 북동쪽 하늘로 보이는 세 개의 바위산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뾰족한 산이 바로 스리 파다 (아담스 피크)이다. 라트나푸라의 북동쪽, 누와라 엘리야의 남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2,243m이다. 12~3월이면 해가 져서 어두워질 무렵에 스리 파다는 커다랗게 검은 그림자를 드러내며 그 정상에 관을 씌운 것처럼 조명등의 불빛이 빛난다. 이때 많은 순례자나 여행객이 산에 올라 신의 발자국 앞에서 기도를 드린다.

스리랑카의 불교도는 이 족적을 부처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남긴 것이라 믿고 있으며 힌두교도는 힌두 신의 것이라 믿고, 또 이슬람교도는 아담이 지상에 내려왔을 때의 것이라고, 그리스도교도는 아담이 낙원에서 추방되어 지상에 내려 왔을 때의 것이거나 남인도에 처음 온 사도 성 토마스이 것이라고 믿고 있다.

어느 민족에게나 각각의 자랑거리가 있고 종교가 있어서 때로는 그것이 충돌, 대립하는 일도 적지 않다. 스리랑카는 다민족 국가로서 각 민족의 종교가 다른 까닭에 대립하는 일도 있지만 이고 스리 파다에서는 성지를 공유하는 종교를 초월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3월의 순례 시즌이 끝날 나비가 무리를 지어 날아오기 때문에 일명 사마날라 칸데(사마날라=나비)라고도 불린다. 무렵이 되면 그 후 바람이 강해지고 구름이 끼기 시작해서 사람들의 순례가 끊어지면, 이번에 동물들이 이 산을 오른다고 스리랑카 사람들은 말한다.

스리 파다는 종파를 초월하여 어떠한 생명에게도 경계선을 긋지 않는 성스러운 산일지도 모른다.

 

(7) 캔디(Kandy)

 

        

 

 

콜롬보의 북동쪽 1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캔디는 14세기 스리랑카의 수도로서 수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캔디의 시가지는 표고 340m의 완만한 산들로 둘러싸인 좁은 분지에 자리잡고 있다. 북에서 번성했던 신할라 왕조가 남 인도에서 건너온 침략자들에게 쫓겨 남하를 계속하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지리적으로 주위의 산들이 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막기에 유리한 장소이기에 영국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300년 이상 긴 세월동안 신할라 문화의 꽃을 피웠다.

'스리랑카에서도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라 불리듯이, 직접 그곳을 방문해 보면 차분한 이 도시의 분위기가 스리랑카 사람들이 지닌 특유의 온화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캔디는 결코 도시가 아니다. 시가지 중심에 서면 콜롬보와 같은 소란스런움도 있지만 콜롬보와는 달리 어딘지 부드럽다. 게다가 중심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어디고 할 것 없이 온통 푸른 숲으로 덮여 있어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소리와 나무에서 노니는 새들의 날개 짓이 기분 좋은 곳이다.

캔디로 계속 모여드는 사람들 때문에 주변 산에는 새로운 주택지가 들어섰지만 그래도 자연과의 조화는 잃지 않았다. 주변의 산들은 일찍이 북으로부터의 침략을 막아 주었듯이 지금은 도시화에서 캔디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또, 캔디의 자랑인 불치사는 석가의 치아가 안치되어 있어 불교도인 신할라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민족 최고의 상징이다. 캔디의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이 절에는 참배자가 끊임없이 방문하고 있어 조용한 가운데 늘 붐비고 있다. 캔디 호에 비치는 이 절의 모습은 고요하고 유난히 아름다워서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조용한 캔디도 일 년에 한번, 여름에 행해지는 페라헤라 축제 때가 되면 아주 떠들 석해진다. 불치사에 안치되어 있는, 불치가 들어 있는 불사리가 화려한 옷을 걸친 코끼리의 등에 실려 캔디 시가지를 행진하는 것이다. 그 뒤를 전통 음악과 가무를 하는 사람들이 따르며 성대한 행렬을 펼친다.

그것을 보려고 스리랑카 전국,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캔디는 대단한 열기에 휩싸인다. 축제가 벌어지는 2주일 동안 캔디에 남아 있는 모든 문화가 응축되어 한 번에 폭발한다. 어쩌면 캔디가 캔디다움을 잃지 않는 것은 이 페라헤라 축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 년에 한번, 캔디의 시가지는 이 화려한 행렬에 의해 그 동안의 더러움을 모두 털어버리고 새로 태어난다. 페라헤라 축제가 계속되는 한 고도 캔디의 매력도 계속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캔디에는 볼 만한 곳이 많이 있지만 좁은 지역이기 때문에 걸음을 재촉해서 빨리 돌아보면 하루 동안 충분히 관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성급한 여행은 권하고 싶지 않다. 만일 시내 관광을 마쳤다면 현지 사람들과 사귀면서 느긋하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캔디의 시가지만 구경하자면 하루 정도로 충분히 돌아 볼 수 있는 작은 도시지만 교외를 포함한 도시부는 의외로 넓다. 시가지에 있는 분지에서 사방으로 등성이를 관통하는 도로가 나 있는데, 그곳으로 버스가 자주 왕래하면서 이 마을의 규모를 계속 넓히고 있다.

캔디의 번화가는 인공 캔디 호의 북쪽과 서쪽으로 뻗어 있다. 이 길을 중심으로 불치사나 박물관등의 볼 만한 곳과 철도 역, 버스 터미널 등의 공공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호수의 남쪽과 동쪽은 호반 가까이 까지 완만한 능선이 연결되어 있어 산길을 따라 한적한 주택지가

들어서 있다. 비교적 잘 사는 가정 주택이 많고, 게스트 하우스를 겸하고 있는 곳도 적지 않다. 또 불치사 뒤편에 있는 북쪽 일대의 산은 우다왓테켈레 자연보호구로 많은 새들을 볼 수 있다.

이상이 시가지에 해당하는 부분이며 여기서 3km정도 앞을 흐르는 마하웨리 강까지의 지역에는 구릉 속에 작은 마을이나 부락이 흩어져 있다. 강 바로 앞에 있는 마을을 카투가스토타라 부르는데, 운반 등에 이용되는 코끼리가 이 부근의 강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가지에서 남서쪽으로 6km 정도 가면 페라데니야이다. 시내에서 이곳에 이르는 도로 주변에는 가면, 보석 등의 토산품 가게가 늘어서 있는데, 관광객을 실은 버스가 서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물건을 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페라데니야에는 스리랑카 최대의 식물원과 스리랑카 최대의 대학이 있어 캔디의 필수 관광 코스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북쪽을 크게 우회해서 흘러온 마하웨리 강은 바로 이곳에서 그 흐름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바꾸는데, 페라데니야 마을은 이 강의 건너편에 있다. 이 지역의 주변에는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불교 사원들이 흩어져 있다. 14~18세기에 세워진 이들 사원은 벽화나 목조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역사 자료에 의하면, 센카다가라푸라(Senkadagalapura;캔디의 옛이름)가 위크라마바후 3세(King Wickramabahu III)의 통치가 이뤄지는 1357 ~ 1374년에 만들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지금의 와타푸루와(Watapuluwa)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칸투부루 누와라(Katubulu Nuwara)가 캔디의 옛 이름이었다고 주장을 펼치고 있는가 하면, 일부 민속학자들은 위크라마바후(King Wickramabahu)왕의 왕비이름인 센칸다(Senkanda)를 따라 센카다가라(Senkadagala)라는 지명이 캔디의 옛 명칭이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의 지명인 캔디(Kandy)는 단지 식민지시대에 "캔다 우다 라타(Kanda Uda Rata; 산악지역이라는 뜻)"의 영국식 발음에 불과하다.

최초 이곳에 도시를 수립한 위크라마바후 3세(King Wickramabahu III)이후, 뒤를 이어 15세기 1473~1511년동안 통치했던 세나삼마타 위크레마부후(Senasammata Wickremabahu)가 캔디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발전시켰다. 캔디는 역사와 도시풍경이 1818년에 일어난 반란으로 영국통치가 강화되기 시작된 이후, 급격히 변화를 맞게 되었다. 로리(Sir Lawrie)의 기사에 의하면, "1818년의 반란때, 캔디지역에서의 영국법은 수치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된 가문들은 거의 죽음을 맞히했다. 총과 칼에 살아남은 이들중 콜레라와 천연두, 영양결핍으로 수백명이 죽어갔다.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냉담해져 갔다. 그 뒤, 많은 해를 거듭해가는 동안 정부의 노력은 시작과 포기만이 계속되었다."라고 당시 반란의 여파를 서술하고 있다.

14세기 수립된 도시인 캔디는 많은 변화를 겪는 동안, 황조의 최후 성채로 남아 있다. 비록 콜롬보가 교역, 행정의 중심으로 스리랑카 제1의 도시인 반면, 캔디는 풍부한 역사 유물을 가진 스리랑카의 제 1의 문화 중심지이다.

 

불치사(佛齒寺) (Dalada Malgawa / Temple of the Tooth)

불치사는 캔디 호반의 차분한 풍취를 보여 주고 있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 사원이다. 불치사는 살색 벽에 갈색 지붕을 한 신할라 건축양식의 팔각형 불당이 아름답게 균형을 이루고 서 있다. 사원 내부에는 크리스탈 바위를 깎아 만든 석가의 좌상, 정밀한 조각이 새겨진 돌문, 옅은 감색의 화려한 당초 모양으로 만들어진 천장 등이 차분한 사원 내부의 풍경과 잘 어울린다. 사원 안에 봉납 되어 있는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를 화장할 때 입수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4세기에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감춰 실론에 들어와 아누라다푸라에 봉납했다. 그 뒤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불치도 함께 이동했으며 마지막에는 캔디에 보관되었다. 불치가 캔디로 옮겨진 것은 1590년 , 캔디 왕 수리야 1세 King Wimala Dharma Suriya I세 때였는데, 그는 불치를 모시기 위해 2층 건물의 사원을 지었다. 그리고 3대 아래인 신하 왕 King Narendra Sinha이 사원을 신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사원 내부에 남아 있는 부분이다.현재 불치사를 둘러싼 해자 팔각형 불당은 캔디의 마지막 왕 라자신하 Sri Wickrama Rajasinha에 의해 건설된 것이다. 팔각형 탑은 19세기 전반 영국 점령시대에 유치장으로 바뀌었으나 지금은 야자 잎 사본이 소장된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스리랑카에서는 불치를 매우 소중한 것으로 여겨 왔다. 왕권의 상징으로서 불치가 있는 곳이 바로 스리랑카의 수도 였다.

16세기 후반, 그리스도교도인 포르투갈인이 캔디를 점령했을 때에는 불교도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불치를 빼앗아 인도의 고아 지방에서 부수겠다고 선언했으나 신할라인들은 가짜 불치로 포르투갈인을 속여 진짜 불치는 캔디에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는 사연도 있다. 사원은 새벽부터 황혼 무렵까지 개방되어 있어 참배가 자유롭지만 불치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것은 하루에 세 번 행해지는 푸쟈 때이다. 이때는 스리랑카 각지에서 모여든 참배 객으로 원내가 북적거린다. 악기소리와 더불어 공손히 공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지고, 사람들의 진지한 기도가 어어 진다. 불치 실물이 공개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작은 다고바 모양을 한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제 상자이다. 이 상자는 일곱 겹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불치가 있다. 불치의 실물이 공개될 때는 금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접시 위에 놓여진다고 한다.

불치사를 방문한다 해도 불치를 직접 볼 수는 없다. 경비원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작은 문이 열리면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제 상자를 먼발치에서 잠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불치는 일곱 겹으로 되어 있는 이 상자 안에 있다. 하지만 이를 보기 위해 푸쟈 시간에 맞춰 스리랑카 전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마을주민이나 수학여행단이 끊임없이 불치사를 찾아온다.

불치는 1년에 한 번 화려한 외출을 한다. 음력 7월1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지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페라헤라(행진) 축제 때다. 이때가 되면 조용하던 도시가 한순간 축제의 열기 속으로 빠져든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불교신자와 여행객, 거기에 주민들까지 가세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화려한 치장을 한 코끼리들이 성스러운 불치를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행렬이 지나는 주요 도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때 추는 춤이 바로 ‘캔디안 댄스’다. 캔디안 댄스는 캔디 왕조의 궁전 연회 때 추던 춤으로, 여기에 각 지역의 민속무용이 합쳐져 쇼의 성격이 많이 가미되었다. 강렬한 북소리와 다양한 전통악기가 만들어내는 음률에 몸을 맡긴 남성 댄서들의 기민하고 박력 넘치는 움직임과 여성 댄서의 화려한 의상과 부드러운 율동이 조화를 이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 마지막 왕조의 유물을 전시하는 캔디 국립박물관(Kandy National Museum)

옛날 왕비의 궁전을 이용한 박물관으로 불치사 뒤에 있다. 건물은 1층이지만 가운데 정원이 있고, 정원을 둘러싸듯이 전시물이 놓여 있다. 전시 되어 있는 것은 신할라 왕조시대의 보물과 가구 등이다. 캔디안 댄스의 낡은 의상이나 왕관도 있어 좁은 곳이지만 흥미로운 전시물이 많다. 대충 보면 5분 정도 걸리지만 천천히 둘러보면 2시간 이상 걸릴 수도 있다. 캔디 관광을 하기 전에 이곳을 방문해 두면 여행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은 캔디의 시장 (Kandy Market)

캔디의 시장은 벽돌 색 2층 건물인데 가운데가 뚫려 있다. 1층은 과일, 야채, 고기, 생선, 향신료 등을 파는 식품 매장이다. 그 중에서 과일 가게는 캔디 명소의 하나로서 진귀한 남국의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주인에게 부탁하면 원하는 과일을 조금 잘라 맛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또 과일 가게에서 향신료도 팔고 있는데 생강차 등을 스스로 맛보게 해준다. 2층에서는 사리, 양복, 구두와 혁대 그리고 토산품을 팔고 있다. 권하고 싶은 것은 벨트인데 아주 멋진 디자인의 피혁 제품이 있다.

 

◈ 캔디 왕조의 영화를 전해주는 왕궁터(King’s Pavilion)

불치사 주변과 캔디 호반에는 옛날 캔디 왕조의 건물이 몇 채 모여 있다. 불치사 북쪽에 있는 유럽 풍의 건물은 옛날의 왕궁이다. 16세기 후반에 수리야 왕이 세웠다고 한다. 포르투갈 점령 시대인 16세기 후반에는 유치장으로 이용되었다는데 건물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그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 정부의 공공 기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고고학 박물관이다. 불치사 바로 북쪽에는 집회소 Audience Hall가 있다.

 

     

                               왕궁터                                                캔디 시장

 

이곳은 1815년에 신할라 왕조를 영국에 넘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 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동쪽에는 옛날 왕비가 사용했던 방 Queen’s Chamber이 있다.

 

랑카틸라카 사원(Lankatilaka Vihara Temple)

콜롬보-캔디간 도로에서 65번째 이정표부근에서 우회전하면 도라갈라(Daulagala)도로가 나오는데 이 도로에서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암석의 돌출부에 건립된 사원은 사원 전체가 바위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깎아 만든 계단이 길게 드리워져 있고, 벽돌 건축물의 3층구조로 이뤄져 독특한 건축디자인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대성당을 닯은 목재의 문과 아직까지 밝게 빛을 내는 프레스코화법으로 천정과 벽이 장식되어 있다.

 

       

          랑카틸라카 사원                                   가달라데니야 사원                                        캔디호수

 

가달라데니야 사원(Gadaladeniya Temple)

캔디-콜롬보 도로에서 1km 떨어진 곳, 구릉지위에 자리잡고 있는 가달라데니야 사원은 암반위에 길이 52m, 넓이 18m에 17.5m 높이로 지어진 유럽의 대성당과 닮은 모양을 하고 있는 힌두사원으로 부바네카바루 4세(Buvanekabahu IV)때 건립되었고, 1344년에 완공되었다. 돌로 이뤄진 사원은 인도사원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으며,

래커칠을 한 문, 조각과 프레스코(fresco: 회벽토에 수채로 그리는 벽화법)와 본당입구는 월광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십자모양을 지닌 사원은 중앙 탑에는 지붕을 얹었다.

 

◈ 캔디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캔디 호(Kandy Lake)

캔디 호는 19세기 초에 최후의 왕이 된 스리위크라마 라자신하가 12년 만에 만든 것이다. 당시 호수 중앙에 떠 있는 섬은 왕실의 하렘이었다고 한다. 1817년에 왕이 영국에 굴복한 뒤로 이 섬은 영국군의 창고로 사용되었는데 지금도 호수 주위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호수를 일주하는 도로에는 가로수가 심어져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현지인이나 관광객들이 찾아와서 평화롭게 거닐곤 하는 캔디에서 유일한 휴식 장소이다.

또 이 호수에는 흰 거북과 고기가 있어 성스러운 동물로 취급되고 있다. 워터 스테이크라 불리는 뱀의 일종이 호수 수면을 꿈틀거리며 헤엄치는 것도 볼 수 있다.

 

◈ 캔디 호와 불치사를 볼 수 있는 레이크 뷰(Lake View)

캔디 호의 남쪽, 작은 언덕 중간에 캔디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이 레이크 뷰이다. 아침 일찍 이슬이 내렸을 때 레이크 뷰에서 바라보는 캔디 호와 불치사의 광경은 매우 신비롭게 느껴진다. 안개가 낮게 깔려 있는 호수 맞은편으로 옅은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불치사의 황금색 지붕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씻어주는 듯한 기분이 든다. 레이크 뷰로 가려면 캔디 호의 남쪽 Y.M.C.A.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다 올라간 곳에서 라자피힐라 마바타를 왼쪽으로 하고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이따금 물건을 파는 사람이 있어 금방 찾을 수 있다.

 

         

                  레이크 뷰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                          캔디안 댄스

 

핀나웰라 코끼리 고아원(Pinnawela Elephant Orphanage)

1975년에 야생동물보호국에 의해, 람부카나(Rambukkana)에 있는 마하 오야강(Maha Oya River)변, 25에이크에 달하는 코코넛 수목림일대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피나웰라 코끼리 고아원은 대부분의 어미코끼리는 병들어 죽거나, 밀엽꾼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경우로 홀로 버려져 거친 밀림속에서 길잃은 약 60여 마리의 어린 코끼리를 보금자리이다. 이곳에서는 먹이를 주고, 거친 야생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돌보고 있다.

먹이를 먹는 시간대에 이곳을 찾으면, 스스로 먹이를 먹지 못하는 코끼리에게 우유병으로 먹이는 장면도 있고, 또한 매일 이뤄지는 코끼들의 목욕장면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다. 10:00 ~ 12:00, 14:00 ~ 16:00, 하루 두번 코끼리들은 목욕을 한다.

원래, 윌파투 국립공원(Wilpattu National Park)내에 있었으나, 관광지 벤토타(Bentota)로 옮겨진 후, 데히와라 동물원(Dehiwala Zoo)으로 보내졌다. 다시 동물원에서 핀나웰라로 되돌아 왔다. 코끼리 고아원은 5마리의 어린코끼리(Vijaya, Neela, Kumari, Anusha, Mathalie, Komali)를 데리고 이전하였다. 그들은 국내외 관광객들로 부터 얻어지는 수입금으로 코끼리 고아원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1978년 핀나웰라 코끼리 야생동물보호국에서 국립 동물공원관리국(National Zoological Gardens)로 넘겨지게 되었고, 보육 프로그램이 1982년에 수립되었다. 핀나웰라에서의 이러한 시도는 야생 자연조건에서 제한된 방법으로 이뤄졌다. 동물들이 낮에 자유롭게 다닐수 있도록 보호구조물이 만들어졌다. 국립동물공원관리국은 케갈레와-람부카나 도로변, 케갈레(Kegalle)에서 13km, 람부카나에서 90km 떨어진 핀나웰라에 어린 코끼리를 위해 고아원을 수립하기 시작하였다.

 

페라데니아(Peradeniye) 식물원

147에이커의 넓이, 1374년 칸디의 왕의 정원으로 시작되어 현 5000종 이상의 나무와 식물들이 있습니다. 열대성 식물들과 현지 특유의 식물들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특히 스파이시가든과 오키드하우스(난화원)은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외국인600RS.

 

                  

           페라데니아 식물원                                                     식물원 입구                                                     페라데니아 대학

 

◈ 화려한 왕조의 춤 캔디안 댄스

캔디안 댄스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예술이다. 캔디 왕조시대에 궁전 연회에서 추었던 춤을 중심으로 스리랑카 각지의 민속 무용을 합친 것이다. 오늘날에는 쇼의 성격이 많이 가미 되었는데 일 년에 한 번 행해지는 대 축제 페라헤라 때에도 역시 캔디안 댄스를 춘다. 쇼는 우선 전통적인 드럼 음악의 격렬함과 더불어 막이 오른다. 그리고 오일 램프를 두 손에 든 댄서가 등장한다. 쇼라고는 하지만 댄스는 신성한 것이어서 댄서들은 램프를 손에 들고 앞으로의 성공과 숙련을 빈다. 그 뒤로 성격이 다른 몇 가지 춤이 계속 펼쳐지는데 남성 댄서들의 기민하고 박력에 찬 움직임과 여성 댄서의 화려한 의상과 부드러운 율동을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지나 버린다

 

(8) 누와라 엘리야 (NUWARA ELLIYA)

 

       

 

차 재배지인 이 섬의 고원지대의 중앙에 위치한 산악지로서 콜롬보로부터 169km, 캔디에서 77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누와라 엘리야는 해발 1,900m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영국 식민지시대의 향수가 가장 잘 서려있는 해발 1989m의 피서지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2,524m인 피두루탈라갈라(Pidurutalagala)산이 있다.

캔디에서 빠져 나온 열차는 감포라를 지나면서 완만한 경사를 숨차게 올라간다. 차창 밖의 풍경은 갑자기 변하고 지금까지의 구릉지대와는 달리 산들이 이어진다. 그 산들은 모두 차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어디를 보아도 밝은 차 색 뿐이다. 차밭 사이사이에는 계곡이 흐르는데 군데군데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져 내린다.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아주 기분 좋다. 스리랑카의 고원지대는 이런 신선함으로 가득차 있다.

누와라 엘리야는 고원지대 중앙에 있는 아름다운 마을로, 영국 식민지시대에는 피서지로 이름을 날렸고 지금도 그때의 흔적으로 넓은 정원이 있는 영국식 건물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호텔, 클럽, 경마장, 골프장 등 그 옛날 식민지시대의 영국 전통을 전해주는 것들이 스리랑카인의 생활 속에 섞여서 남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상한 시, 공간 속에 놓여 있는 곳이 누와라 엘리야이다.

열대라고는 하지만 아침이면 반소매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춥기 때문에 이 마을의 학생들은 흰 교복 위에 가디 건을 입고 등교한다. 그 색들 또한 고원의 푸르름을 배경으로 이 마을에 색채를 부여해주고 있는 것 같다.고원을 힘들게 올라온 버스는 누와라 엘리야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버스 터미널에 정차한다. 버스 터미널 앞의 뉴 바자르 스트리트가 이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메인 스트리트이다. 버스 터미널에서 뉴 바자르 스트리트로 나와 정면을 보면 조금 높은 곳에 분홍색의 아담한 우체국이 있다. 식민지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어디를 보더라도 영국의 작은 시골집을 연상케 한다. 마을의 주기능은 이곳 뉴 바자르 스트리트 북쪽의 좁은 지역에 한정된다. 버스 터미널 부근에는 각종 상점이나 가게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이 건물과 뉴 바자르 스트리트를 낀 반대쪽은 완전히 새로 만든 쇼핑가이다. 이 두 종류의 건물이 병립해 있는 거리가 누와라 엘리야의 명동이라고 할만 한 번화가이다. 겨우 50m정도의 거리지만 하루 종일 사람이 북적 이는 곳이다.

Baker's Falls 월드앤드 리틀월드앤드

 

웅장한 산들이 빚어내는 절경과 함께 끝없는 차밭, 푸르른 하늘이 푸른 하늘 아래 펼쳐져 있고, ‘빛의 도시’라는 이름처럼 햇살 속에 초록 찻잎들이 반짝인다. 작열하는 태양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한 ‘빛의 도시’는 분홍빛 벽돌의 우체국, 튜더와 조지아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 장미 넝쿨 아래 푸른 양탄자처럼 깔린 잔디밭 등 그때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누와라 엘리야는 ‘구름 위의 도시’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아침이면 구름 같은 안개에 싸여있다. 게다가 주야간 일교차가 커서 좋은 차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안개는 찻잎에 맑고 신선한 수분을 주고, 곧이어 얼굴을 내미는 태양은 차가 건강하게 자라게 해 준다.

차밭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짊어진 타밀족 여인들이 자기 몸집보다 커 보이는 대바구니를 이마에 걸고 쉴 새 없이 어린 찻잎을 따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딴 찻잎 바구니를 가지고 검사소에 가서 무게를 재고 나면, 실론의 최고급 홍차가 탄생되는 제다 공장으로 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스리랑카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홍차, ‘누와라 엘리야’가 탄생하는 것이다. ‘실론 홍차의 샴페인(Champagne of Celyon Tea)’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누와라 엘리야는 인도양의 노을빛을 머금은 맑은 오렌지빛깔을 띠고 있다. 실론 홍차의 제왕으로 이름이 난 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면, 떫은 듯 은은하면서도 풋풋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호르톤 플레인 국립공원(Horton Plain National Park)

새로운 도로가 만들어져, 1시간 30분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호르톤 플레인(Horton Plain)" 은 약 2,134m의 두 봉우리사이에 자리 잡은 국립공원이다. 앙상한 나무와 간간이 흐르는 차가운 개울로 이뤄진 광할한 대초원지역으로 뒤덮여 있다. 굴레형태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직 1,050m에 이르는 절벽을 만날 수 있다. 엉청한 깊이의 절벽에 위약감마저 느껴진다. 그래서, 이곳의 이름을 "세상의 끝(The World's End)"라고 부른다.

또한 영국의 탐험가 "사무엘 베이커(Samuel Baker)"에 의해 발견된 "베이커의 절벽(Baker's Falls)" 볼거리이다.

 

◈ 누와라 엘리야 마을 주변의 차 밭과 홍차 정제 공장 올리펀트 티 팩토리.

누와라 엘리야를 중심으로 한 구릉지대가 실론 티의 본 고장이다. 누와라 엘리야 마을에서 조금만 나가도 온통 차 밭이고 차 밭 한쪽에는 차 공장이 있어 여행객에게 그 과정을 견학 시켜 주기도 한다. 이곳까지 왔으면 차 밭에서 차를 타는 사람들과 차를 만드는 정제 과정을 견학해 보도록 하자. 여기에 소개하는 것은 누와라 엘리야 근교의 홍차 정제 공장의 하나인 올리펀트 티 팩토리이다.

이 홍차 공장은 누와라 엘리야의 버스 터미널에서 샨티푸라행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걸린다. 누와라 엘리야에서 훨씬 높은 지대로 올라간 곳에 있는 홍차 정제 공장인 이곳이 주변은 모두 차 밭이다. 남자들은 차 잎을 소독하고 여자들은 차 잎을 골라 등에 진 소쿠리에 넣는다. 공장을 견학할 때는 안내원이 공장의 기계를 설명하며 차의 정제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공장 안에서 차를 팔기도 하니 기념으로 살 수 있다.

 

◈ 산 위의 학갈라 식물원(Hakgala Botanical Gardens)

캔디의 페라데니야 식물원이 호반 주위의 평평한 곳에 있는데 반해, 이 곳은 산 중턱에서 정상에 걸쳐 경사진 지역에 펼쳐진 식물원이다. 입구가 있는 산중턱 부근에는 남국적인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으나 산으로 올라감에 따라 음지가 되어 양치류가 많다. 이 곳은 원래 말라리아에 특효약인 키니네의 원료가 되는 키나라는 나무의 재배 지역이었다. 이곳이 식물원으로 바뀐 것은 1882년의 일이다. 그 이후 장미와 양치 식물의 컬렉션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원내를 흘러 고원 특유의 청량함으로 가득하다. 누와라 엘리야에서 하루 만에 구경하고 돌아올 수 있는 식물원이다. 시내에서 남동쪽, 바둘라로 가는 길 약 9km정도 거리에 있다.

 

              

            학갈라 식물원                                             빅토라아 공원                                고원의 골프코스

 

◈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원의 골프 코스

누와라 엘리야 시내 도처에 펼쳐진 녹지, 이것이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골프 코스이다. 영국 식민지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경마장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골프장이 가장 유명하다. 이 골프장은 1880년에 영국인 농장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누와라 엘리야 골프 클럽 (The Nuwara Eliaya Golf Club)에서 경영하고 있는데 6,250야드, 18홀이 있는 본격적인 골프장이다. 마을 중앙에 있다는 입지 조건과 굴곡이 풍부한 설계로 호평 받는 곳이다. 클럽 하우스 물론 식민지 풍 건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바는 물론 실내 배드민턴장도 있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9) 하푸탈레 (HAPUTALE)

 

하푸탈레는 전망이 좋기로 유명한 산간 마을이다. 특별히 볼거리는 없지만 웅대한 산들이 펼치는 절경과 신선한 공기가 매력적이다. 부근의 산들은 푸르름 일색으로 펼쳐진 차 밭으로 유명하다. 하푸탈레는 차의 집산지로도 일 년 중 대부분의 아침나절은 지독한 안개에 싸여 있고, 열대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추위가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나 이 안개야말로 좋은 차를 만드는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다. 안개는 차나무에 신선하고 깨끗한 수분을 주고, 곧 이어 얼굴을 내미는 태양 아래서 차 잎은 신선하고 깨끗한 수분을 주고, 곧 이어 얼굴을 내미는 태양 아래서 차 잎은 신선하게 호흡한다. 그렇게 해서 나오는 새 잎만이 최고급 홍차로 쓰이는 것이다.

언덕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상점은 경사진 주도로를 따라 줄지어 있다. 결코 넓은 마을은 아니지만 이 구릉지대 주변의 중심지로 꽤 붐비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모여드는 사람은 신할라인 뿐만 아니라 홍차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는 인도 타밀인도 많다. 그들이 신봉하는 힌두 사원도 산길 도로변에 몇 채 있다.

안개 속에 떠 있는 힌두의 신들을 모신 사원 지붕은 이상하고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하푸탈레에 오면 꼭 산에서 떠온 맑은 물로 탄 홍차를 마셔보자. 최고급 브랜드 티보다 훨씬 뛰어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갑자기 나타나는 디얄루마 폭포(Diyaluma Falls)

 

하푸탈레에서 웰라와야로 가는 도중의 산길 옆에서 돌연 모습을 드러내는 여성적인 폭포이다. 170m의 높이 인데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부드러움이 숨어 있다.

도로에서 폭포까지 계단이 놓여 있어 천천히 산책하며 구경하기 좋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물놀이하기 좋은 공간이다. 단 수온이 아주 낮으니 아침에는 준비 운동을 철저히 하고 들어가야 한다. 폭포 주변 도로는 큰 커브를 그리고 있는데, 근처에는 폭포를 보며 차를 마 실 수 있는 찻집이 있다.

Diyaluma Falls 코슬란다

 

                   

                    디얄루마 폭포                                    코슬란다                                           하프탈레 타밀족

                           

      하프탈레 시내                                  하프탈레 시장                                       립톤 씨트

                                  

◈ 평화로운 산촌 코슬란다(Koslanda)

 

디얄루마 폭포에서 5km정도 더 가다가, 웰라와야 방면으로 내려간 곳에 코슬란다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길이 구불구불 커브를 그리며 내려간 산 중턱에 있어 평평한 곳이라고는 거의 없는 마을이다. 집들은 도로변 가까이에 평평한 곳을 찾으려는 듯 갈라진 작은 골목 끝으로 서 있다. 은행, 우체국 등 마을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도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세워져 있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 소리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곳이다. 탁 트인 경치가 좋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며칠이라도 지내고 싶은 마을이다. 마을에서 가장 전망 좋은 곳에 레스트 하우스가 한 채 있는데 그곳에서 머물러도 좋을 것이다.

 

(10) 엘라 (ELLA)

 

엘라는 남해안에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가 막다른 곳에 있는 조용한 언덕 마을로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유명하다. 또 지금은 바둘라, 반다라웰라, 웰라와야, 모나라가라에서 온 4개의 간선 도로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집들은 산과 차밭에 둘러 싸여 있으며, 비교적 편평한 장소를 골라 한적하게 여기저기 서 있다. 교통의 요지라고는 하나 버스를 제외하면 차의 왕래도 적어서 마을 걷고 있으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들린다. 높은 지대인 탓에 기온이 낮아 도저히 열대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곳이다. 아침에는 꽤 추워 가디건이 필요하다.

마을에는 유적이나 구경할 만한 곳이 없고 시장도 없지만 편히 지내기에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산길을 산책하며 새들의 노래를 듣고, 화초를 보며 누와라 엘리야와는 다른 스리랑카풍 피서를 즐겨 보자. 또 이곳은 나비가 많기로 유명하다.

 

         

                      Ella Gap                                  Ella Rok                              Sri pada 상공

 

                                        

(11) 카타라가마 (Kataragama) 

 

카타라가마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최남단이다. 실제 지리적인 최남단은 100km 이상 서쪽에 떨어져 있는 돈드라 곶이지만, 카타라가마에서 남쪽으로 더 나아가는 도로가 없어 섬의 막바지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최남단이라는 이유는 그 것 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스리 파다와 어깨를 겨루는 스리랑카 제일의 성지이다.

이 땅에 사는 카타라가마 신은 어떤 기도든 들어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신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많고 많은 괴로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많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모여든다. 카타라가마로 가는 길은 해방의 길로 여겨져 이 열대 섬의 사람들은 카타라가마에 참배하는 것을 통해 해방 감을 얻는 것이다.

요즘 이 지역에는 정부의 주도하에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종교를 초월한, 일대 종교 공원 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스리 파다가 불교도에게나 힌두교들에게나 또 그 밖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성지이듯이 말이다.

 

      

                 신전                                 푸자의식                           분델라국립공원                              분델라공원 사파리

 

◈ 카타라가마 신전의 푸쟈(Pujas)

 

카타라가마 신은 모든 스리랑카 사람들의 희망이어서 전국에서 순례자가 찾아온다. 그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푸쟈를 위해 열심히 돈을 모아 오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신성하게 여겨지는 의식에 참가하는 것이니 적어도 공물은 가지고 가도록 하자. 하루에 3번 푸쟈의 시간이 되면 격렬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문이 열린다. 그러면 밖에서 기다리던 순례자들은 줄줄이 안으로 들어가 신전은 금새 꽉 차고 만다. 정면에는 공작을 탄 카타라가마 신상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공물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왼쪽으로 서고 공물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은 오른쪽에 서게 된다. 북소리는 점점 더 크게 울리고 게다가 나팔소리까지 뒤섞여 실내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진다. 이윽고 신관이 나타나 사람들이 가져온 공물을 하나하나 받아 들고는 그 반은 카타라가마 신에게 바치고 나머지는 성스러운 재를 뿌려 되돌려 준다. 공물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손바닥에 다른 신관이 성수를 뿌려준다. 이렇게 해서 참배 의식이 끝난 사람은 오른쪽에 있는 문으로 줄줄이 나간다. 돌려받은 공물 중에서 조금은 먹고 나머지는 거리의 걸인이나 소에게 나누어 준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재를 눈썹에 발라달라고 하면 푸쟈는 끝이 난다.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그 밀도 짙은 사람들의 기도 공간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많을 것이다.

카타라가마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최남단이다.

실제 지리적인 최남단은 100킬로 이상 서쪽에 떨어져있는 돈드라 곶이지만, 카타라가마에서 남쪽으로 더 나아가는 도로가 없어 섬의 막바지라는 느낌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최남단이라는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곳은 스리 파다와 어깨를 겨루는 스리랑카 제일의 성지이다.

이 땅에 사는 카타라가마 신은 어떤 기도든(설령 나쁜 일이라 해도)들어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신의 인기는 대단하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많고 많은 괴로움에서 빠져나오기위해 많은 욕망을 충족하기위해 모여든다. 카타라가마로 가는길은 해방의 길로 여겨져 이 열대 선의 사람들은 카타라가마에 참배하는 것을 통해 해방감을 얻는 것이다. 요즘 이 지역에는 정부의 주도하에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모든 종교를 초월한, 일대종교 공원도시를 건설하려는 것이다. 스리파다가 불교도에게나 힌두교들 에게나 또 그 밖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나 똑같이 성지이듯이 말이다. 종교문제가 무엇보다 심각한 고민거리가 된 스리랑카에서 카타라가마 신은 사람들을 해방시켜 줄 것인가? 반드시 성공하고 있다 고는 할 수없는 카타라가마의 대규모 종교 공원건설과 열심히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을 대했을 때, 이 남국에 안정이 찿아 오기를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사원

주차장에서 내리신 후 메닉강가에 놓여진 작은 다리를 건너서 처음 나오는 사원은 ‘시밤 코빌’로 불리는 힌두교 사원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큰 광장이 나오고 좌우로 다양한 건물들이 보이는데 제일 먼저 나오는 우측의 건물은 박물관을 지나면 큰 보리수와 그 옆에 ‘마하-데발레’사원은 카타라가마 사원 단지 중 제일 먼저 만들어졌고, 가장 중요한 사원이다.

이 사원 안에는 3개의 건물이 있어 우로부터 스칸다 신을 모시는 사원, 코끼리 얼굴의 가네쉬 사원, 그리고 맨 좌측엔 부처님을 모시는 불교 사원이 차례로 서 있다. 이 세개의 사원중 가장 붐비는 스칸다 사원은 이곳의 지신인 ‘데비요’를 모시는 사원으로, 데비요는 다른 힌두신들이 그렇듯이 다양한 다른 이름을 갖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스칸다’(LORD SKANDA) 인데 스칸다는 ‘신중의 신’ 시바신의 아들로서 전쟁과, 지혜의 신으로 묘사됩니다. 무기를 들고있는 12개의 팔과 6면의 얼굴을 가진 스칸다신은 이곳에서 가장 추앙 받는 토착신이다. 입구에서 혹시 제물을 사 오셨다면 여기에다 공양을 올리면 된다. 사원 뒤로 돌아가 보시면 거대한 보리수가 놓여져 있고 큰 문을 지나 길다란 광장을 따라 한 300미터 이동하다 보면 정면에 커다란 사원이 나온다.

이 사원은 기원전 1세기에 건립된 ‘키리-비하라’ 불교 사원으로 입구의 하얀색 다고바와 부처님을 모시는 사원이 조성되어 있다. ‘키리-비하라’ 사원 뒤쪽에는 이 사원을 봉헌한 ‘도투게무누’ 대왕의 동상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분델라 국립공원

함반토타’와, ‘팃사마하라마’ 사이에 있는 분델라 국립공원은 사파리의 명소로 알려진 곳 이다. 사파리 하면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국립공원을 연상하시는데 마치 거대한 코끼리 무리, 얼룩말 무리가 떼 지어 지나가고 어디선가 타잔이 나올듯한 그런 분위기를 떠 올리시지만, 그러나 그 나름대로 다양한 조류와 야생 코끼리, 악어, 원숭이 등 동, 식물을 보기에 좋은 곳이다.

총면적 200만 평에 149종의 조류와, 수 십 마리의 야생 코끼리, 원숭이, 악어들이 서식하는 곳으로 바다와 강이 만나는 늪지대에 있어 그 경치가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곳의 백미는 조류 중에 가장 아름다운 새로 꼽히는 플라밍고의 겨울 서식지로서 최소 2000마리 이상의 플라밍고가 서식하는 곳이다. 멀리 시베리아 혹은 몽골에서 날아온 이름 모를 수많은 조류들이 모여 있는 분델라 조류공원은 한마디로 새들의 천국이다.

드물지만 레오파드 표범과, 인도곰, 사향 고양이, 야생 다람쥐, 바다거북도 볼 수 있다.

여행 적기로는 10월부터 3월까지 이며, 하루중엔 새벽과 일몰 무렵이 동물을 보기엔 좋은 시기다. 그리고 남쪽 끝의 해변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의 하나이다. 입구에서 집차를 타고 이동한다.

 

(12) 히카두와 (HIKKADWA)

 

히카두와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조트 지역이다. 다이빙, 윈드서핑을 비롯해서 해양 스포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히카두와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관광객을 수용하는 능력에 있다. 이곳이 리조트로 발전한 것은 앞바다에 산호초가 있기 때문이다. 스리랑카 남서 해안 중 이곳만큼 산호초가 발달해 있는 해안은 없다. 언제부턴가 이 산호초 때문에 서양의 관광객이 모이게 되었고, 한때는 인도의 고아 지역처럼 누드 비치가 들어선 적도 있다.(현재는 금지.) 계획에 의해 개발된 리조트와는 달리 히카두와는 이런 구미 젊은이의 문화, 즉 히피 문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이미지는 이 지역이 리조트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히피들은 사라졌지만 마을의 비치 로드에는 지금도 서구화된 레스토랑과 찾집, 토산품 점 들이 꽤 많이 늘어서 있다. 예전에 비하면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꽤 줄었다고 하지만 이곳에만 머물기 위해 스리랑카를 찾는 유럽인도 적지 않다. 그들은 1~2개월씩 히카두와에서 바캉스를 즐기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런 방식이 히카두와의 조용함에 젖을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일 것이다. 항상 바쁘게 쫓기는 우리지만 여기서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히카두와의 느긋한 정서에 젖어보자. 그렇게 히키두와의 평온함에 색다른 매력을 느낄 것이다. 히카두와는 그 아름다운 바다와 해변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도 손꼽히는 리조트 지역으로 유명하다. 시가지의 기능을 하는 지역은 아주 좁은 범위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는 해변으로 통하는 갈레 로드를 따라 호텔이나 레스토랑, 액티비티 오피스, 토산품점 등이 약 3Km에 걸쳐 이어져 있어 리조트 타운의 모습을 잘 형성하고 있다. 히카두와 시가지에서 여행객들이 첫발을 딛게 되는 역이나 버스 터미널은 마을 북단 끝에 있다. 역이나 버스 터미널 주변은 이른바 히카두와 상업지구로 실론 은행, 커미셜 은행, 피플즈 은행과 우체국, 잡화상 등이 늘어서 있어 시가지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역에서 갈레로드를 건너면 모래사장에 시장이 있다. 이 시장에서는 바로 앞바다에서 금방 잡아올린 신선한 어패류를 팔고 있다. 호텔 투숙객에게 맛있는 해물 요리를 제공하기 위해 매일 아침 호텔 직원이 시장을 보러 나온다. 그래서 어느 도시, 어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팔고 사는 흥정이 시끌시끌하게 이루어 진다. 리조트 타운인 히카두와에서 시가지의 활기, 삶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이 시장을 찾아가 보자. 히카두와의 시가지에서 갈레 로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 내려가 보자. 도로의 바다 쪽으로 작은 레스토랑과 토산품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리조트의 냄새를 풍기는 곳에 들어선 것이다. 기분 탓인지 내리쬐는 태양도 더 밝아서 리조트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슈뇌르켈과 바닥이 유리로 된 보트는 산호초가 많은 이 지역의 필 수 관광코스 이다. 스리랑카의 다른 마을에서는 그리 볼 수 없는 이런 광경이 여기서는 당연한 모습으로 느껴진다. 미묘한 색의 변화를 보이던 산호초 바다도 여기서부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파도는 점점 거세지고 파도 사이로 보이는 바다거북이 이곳의 명물로 꼽힌다. 운이 좋으면 2~3m나 되는 거대한 바다거북을 몇 마리나 볼 수 있다고 한다. 또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미디어에 반드시 등장하는 스틸트 피싱도 계절에 따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모래사장은 더 넓어지고 바다는 인도양의 거친 파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이 서핑의 메카로 알려진 나리가마 해변이다. 이 해변에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도록 서핑 보드를 타는 젊은이들이 기세 좋게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한낮에는 수영복만 입은 서양 여성들이 문고판 책을 읽으며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도 보이고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비치를 돌아다니는 스리랑카인 판매상도 눈에 뛴다.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리지 않지만, 리조트 지역 히카두와의 현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 스쿠버 다이빙

 

산호초 바다를 만끽하고 싶다면 역시 스쿠버 다이빙이 최고다. 히카두와에는 포세이돈 다이빙 스테이션, 스쿠버 사파리 등 여러 개의 다이빙 회사가 있다.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장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어디에서나 산호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또, 물살이 그리 세지 않기 때문에 초보자도 해 볼만 하다. 중급자라면 좀 깊이 들어가는 다이빙도 재미있다. 바다 20m 깊이에 잠겨 있는 18세기의 배를 구경하는 것도 인기 있는 관광 코스이다. 히카두와의 다이빙 시즌은 11월~4월이 가장 좋고, 그 이외의 시기에는 바다의 조건이 아주 좋거나 손님이 많을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다.

 

◈ 슈뇌르켈

 

마스크, 슈뇌르켈, 핀 이 세 개의 세트는 갈레 로드 길가에 있는 몇몇 스포츠 상점에서 빌릴 수 있다. 이 세트를 가지고 백사장 가까운 바다에서 노는 것도 나름대로 즐겁겠지만 좀더 바다로 나가 색색의 산호초와 그에 어울려 노는 열대어를 관찰하는 것이 역시 최고이다. 슈뇌르켈 투어가 코럴가든즈 호텔 앞바다 200m 지점에 있는 로키 섬까지 나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참가하는 것이 가장 좋다. 로키 섬 주위는 바다의 투명도건 산호의 아름다움이건 어느 쪽을 비교해 봐도 백사장 근처에서 노는 것과는 천지차이 이다. 다만 물살이 좀 세기 때문에 수영에 자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권할 수 없다. 슈뇌르켈 투어는 히카두와의 중급 호텔 지역의 비치, 코럴가든즈 호텔 등에서 신청하면 참가 할 수 있다.

 

◈ 유리 바닥 보트

 

혼자서 슈뇌르켈이나 스쿠버 다이빙을 하는 것이 좀 무리라는 사람에게는 유리 바닥 보트가 있다. 이름 그대로 보트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배를 타고 있으면 바다 속을 산책하는 기분을 만끽 할 수 있다. 주로 로키 섬 주위를 도는 것이 많다. *서핑, 윈드서핑 서프포인트는 웨왈라 남부에서 나리가마까지 펼쳐지는 바다이다. 이 부근은 스리랑카 유일의 서프포인트로, 계절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인도양의 파도가 호쾌한 파이프라인을 만들 때도 있다. 또 일 년 내내 바람이 불기 때문에 최근에는 윈드서핑의 서키트로도 주목 받고 있다.

 

 

(13) 베루왈라 (BERUWALA)

 

황금 해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리조트 지역 가운데 하나인 베루왈라. 여기서부터 북쪽에 있는 칼루타라에 걸쳐 펼쳐지는 해안선에는 최고급에서 소규모까지 많은 리조트 호텔이 자리잡고 있다. 벤토타나 히카두와 같은 곳은 붐비지 않기 때문에 조용한 휴양지를 찾는 유럽인들에게 인기가 있다. 해안의 야자수 숲에는 술의 원료가 되는 야자꽃즙을 따기 위해 코코야자수 위에 올라가 나무들 사이에 걸쳐진 로프를 타고 건너 다니는, 마치 서커스의 줄타기를 하는 듯한 진기한 구경도 할 수 있다. 강렬한 태양과 끝없이 이어진 야자 숲의 해안선. 어느 곳이나 남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리조트 지역이다.

베루왈라는 스리랑카에서 최초로 아랍인이 살기 시작한 회교도의 항구 도시이다. 서기 800년 경 스리랑카에 보석을 구하러 온 아랍인들이 항구를 개발한 이후 라트나푸라에서 가져온 보석을 이 항구를 통해 세계에 전했다. 당시 베루왈라는 대단히 번성해서 보석뿐 아니라(신밧드의 모험) 이야기도 여기서 시작되었고 마르코 폴로가 스리랑카에 상륙했던 곳도 이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베루왈라는 그런 시대가 있었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하다. 항구도 이제는 작은 부두에 불과해 더 이상 라트나푸라의 보석이 이곳을 통해 바다를 건너가는 일은 없다. 마을의 회교도들이 근근히 수작업으로 보석 가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단지 파도 없는 곶의 끄트머리에 세운 크고 흰 모스크가 옛 영화를 전해준다. 베루왈라에는 시가지라고 부를 만한 장소, 즉 번화가가 거의 없다. 굳이 찾자면 2층 건물의 쇼핑 센터가 세워진 갈레 로드 주변의 작은 광장 부근 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곳을 베루왈라라고 부르며 버스도 여기서 멈춘다.

그러면 이곳을 중심으로 베루왈라를 둘러보면, 쇼핑 센터에 입주해 있는 가게는 잡화상이 대부분이다. 이 쇼핑 센터 뒤가 시장인데, 야채를 비롯한 신선한 식료품은 여기서 팔고 있다. 다른 도시와 비교하면 아주 작지만 베루왈라에 상점다운 곳은 이곳 뿐이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는 보석상들이 보인다. 손님도 거의 없어 조용한 이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이곳이 예전 보석 출하 항이었다는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보석상은 근처의 리조트에 투숙하는 외국 관광객을 상대로 한 상점이다.

여기서부터 갈레 로드를 따라 북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해안선과 만나게 되는데, 철도 역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단지 바다 쪽을 보면 툭 튀어나온 곶의 끝부분에 흰 건물이 보인다.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회교 사원인 케치말라이 모스크 Kechimalai Mosque이다. 해안선과 갈레 로드가 만나는 곳에 곶으로 향하는 좁은 길이 있으니까 들어가 보자. 한동안은 오른쪽으로 어항이 보인다. 아침 나절에는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이 분주히 드나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이 예전에 스리랑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번화했던 항구라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작다. 학교 앞을 지나면 회교 사원이 자리한 곶이다. 시내로 다시 돌아가려면 온 길을 학교 앞까지 되돌아가 두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간다. 그러면 갈레 로드가 나온다.

 

          

          베루왈라                                          벤토타                                  케치 말라이 모스크                     벤토타강투어

 

 

벤토타. 아루트가마(BENTOTA. ALUTGAMA)

콜롬보 남쪽 16km 지점에 있는 벤토타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비치 리조트이다. 정부 지정으로 내셔널 홀리데이 리조트로 개발되었다.

벤토타 강가라고 불리는 강의 하구 일대에 펼쳐져 있는 모래사장에는 만반의 설비가 갖추어진 몇 개의 호텔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녹색과 파란색으로 빛나는 바다에는 알록달록한 돛을 달고 윈드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빛나는 남국의 태양과 바다 그리고 황금빛 모래사장에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자신들만의 휴일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 한번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것 또한 이 나라를 대표하는 모습의 하나이다.

그러나 같은 벤토타라도 철도 선로를 끼고 호텔과는 반대쪽인 정글촌에는 아직도 토속 생활을 하고 있는 스리랑카인들이 코코넛 섬유로 로프를 만들거나 수영을 하고 잇다. 몇 백년이나 변하지 않는 마을의 모습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또, 벤토타의 북쪽에는 강을 가로 지르는 철교를 건넌 곳에 아루트가마의 시가지가 펼쳐진다. 벤토타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지만 아루트가마는 리조트 지역인 벤토타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도시이다. 풍요롭고 신선한 상품들이 진열된 시장의 번화함, 일용 잡화를 파는 상점, 골목을 여유있게 거니는 사람들.

상점 하나하나에서부터 교통 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일상 생활 때문에 움직이고 있는 듯하여 평범한 스리랑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a) 벤토타는 내셔널 홀리데이 리조트로 개발된 곳으로 관광객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져 있다. 갈레 로드와 벤토타의 철도역에 끼인 좁은 곳에 세련된 쇼핑 아케이드가 있다. 여기는 실론 관광국을 비롯해 토산품 상점과 식료품점, 커피 샵, 미용실까지 입주해 있는 꽤 큰 곳이다.

또 역 바로 앞에는 은행, 우체국, 경찰서 등의 공공 시설이 광장을 중심으로 늘어서 있다. 이 지역에서만도 대부분의 볼 일은 마칠 수 있다. 역의 서쪽으로 있는 해안에는 리히니야 서프 호텔이 있다.

여기서부터 리조트 호텔이 길가에 늘어서 있고, 철로를 따라 나 도로를 5분 정도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벤토타 비치 호텔이 나온다. 길은 여기서 선로를 넘어 갈레로드와 만나는데 이곳이 쇼핑 아케이드의 입구이다. 여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리조트 호텔이 모래톱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길이 없으며 각 호텔까지는 아루트가마에서 배로 하구를 건넌다. 호텔 앞 모래 사장에는 시즌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일광욕이나 해양 스포츠를 즐기며 제각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벤토타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것은 벤토타가 원래는 작은 마을이었다는 사실이다. 리조트 지역을 제외하면 소박한 정글촌이 펼쳐진다. 또한 쇼핑 아케이드에서 갈레 로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병원 건물을 지나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40분 정도 더 가면 12세기에 세워진 오래된 절 갈라파타 비하라가 있다. 같은 상좌부 불교국인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공도 다녀간 적이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b) 아루트가마는 시내 한복판에 있는 버스 터미널을 중심으로 갈레 로드를 따라 남북으로 뻗은 좁고 긴 도시이다. 특급 열차를 포함한 모든 열차가 멈추고 버스도 있어 교통은 상당히좋은 편이다. 벤토타 강 부근 가장 재미있는 곳은 말쑥한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포장마차 같은 작은 가게 들이 길가에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여기선 야채나 과일 등의 식료품을 팔고 있는데, 바다가 가깝기 때문에 생선 가게들이 많이 있다. 다랭이, 삼치등과 함께 거대한 상어를 손도끼로 둥글게 토막내 팔기도 한다. 이런 작은 상점들이 끝나면 이번엔 민예품을 파는 가게가 이어진다. 강 건너에 머무는 관광객을 노린 상점들이다.

이윽고 갈레 로드와 철교가 나오면 시가지는 끝이 난다. 다리 바로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속되는 좁은 비포장 도로를 가면 게스트 하우스와 레스토랑, 그리고 벤토타 모래톱에 있는 리조트로 건너가는 보트를 타는 곳이다.

 

◈ 스리랑카, 무슬림들의 고향인 케치말라이 모스크(Kechimalai Mosque)

베루왈라는 아랍 상인들이 스리랑카에 처음 연 항구이고 케치 말라이 모스크는 스리랑카에서 처음 지어진 회교사원이다. 말하자면 이 항구 일대가 실론 무슬림의 발상지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모스크는 기원 800년 경에 세워졌다. 지금도 이 모스크는 스리랑카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 받고 있어, 라마단(단식월)이 시작되는 이슬람 신년 축제 때는 스리랑카 전국에서 무슬림들이 모여든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에는 아주 조용한 마을로,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소리 정도밖에 들리지 않는다.

건물은 몇 번이나 다시 칠해졌기 때문에 낡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하얀 벽이 강렬한 태양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이다. 무슬림에게는 케치말라이 모스크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안을 구경하고 싶을 때는 반드시 주위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도록 해야 한다. 또 모스크는 바다로 불쑥 솟아나온 곳에 있기 때문에 작은 섬들이 떠 있는 드넓은 인도양과 베루왈라 어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암발랑고다(Ambalangoda)

암발랑고다는 벤토타와 갈레 사이에 있는 각은 어촌이다. 메인 스트리트를 걸어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건물도 없이 조용한 풍경만 펼쳐진다. 해변이 있기는 하지만 리조트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양 스포츠 시설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이 곳은 스리랑카의 관광지 가운데 하나로 꼽혀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 마을을 유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악마의 가면이다. 스리랑카의 토산품으로서 인기를 끄는 이 가면은 원래 이 지역의 전통적인 악마 퇴치 의식에 사용되는 것이다.

의식은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신성한 뜻을 지니고 있는데 언제 부턴가 가면만 유명해진 것이다. 이국적이고 풍부한 표정을 한 가면의 모습은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홍보에 자주 등장한다. 마을에는 가면을 만드는 공장이 많아 외국에서 단체 관광객이 버스로 견학을 하러 오기도 한다. 마을 남쪽에 있는 어항은 새벽녘에 가장 붐빈다. 바다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푸른 바다 위에는 형형색색의 배들이 떠다니고 있다. 이런 풍경이 암발랑고다의 진짜 매력이다.

 

       

             암발랑고다                                  가면 박물관

 

가면 박물관(The Ambalangoda Mask Museum)

가면 박물관은 갈레 로드와 메인 스트리트가 갈라지는 곳에 있다. 내부는 5평 정도의 방2개로 나누어 가면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 가운데 하나는 코람이라는 고대 촌락에서 일어난 사건을 익살스럽게 그린 민중극에 사용되는 가면이 전시되어 있다. 또 한 방은 산니 야쿠마 라고 불리는 유명한 악마 퇴치 의식을 위한 가면이 전시된 곳으로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코람의 가면과 달리 주술적인 느낌이 든다. 가면의 종류가 이렇게 많다는 것과 각 가면의 역할과 스토리까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스리랑카의 가면에 관해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다. 민영이지만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가면에는 이 마을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마음이 깃 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공도 방문한 불교사원 갈라파타 비하라(Galapata Vihara)

갈라파타 비하라는 12세기에 세워진 절이다. 당시의 것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문 앞에 절의 역사에 관한 비문이 서 있다. 뜨거운 태양에 그을린 석단을 올라가면 비교적 작은 건물 안에 불상이 있고 벽 한쪽에 부다토리(부처의 일생을 그린 것)가 있다. 시원한 절 안으로 들어가면 여기서도 주민들의 독실한 신앙심을 엿볼수 있다. 계단 중간에 이 절의 여러 가지 자료가 전시 되어 있는 작은 방이 있는데, 사원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물건들 중에는 팔리어로 쓰여진 불경도 있다.

 

◈ 열대 정글을 탐험하는 듯한 벤토아 강(Bentota River Cruise)

벤토타와 아루트가마를 가로지르는 벤토타 강을 거슬러 오르는 보트들은 각 리조트에 속한 보트들이다. 벤토타 강의 하구에서 조금 올라가면 강의 폭이 갑자기 넓어진다. 이곳은 만 인데 모래톱이 만들어 놓은 것으로 홍수림이 무성하다. 보트로 그 안에까지 들어갈 수는 없지만 뻗어나온 뿌리가 물 속에 엉켜서 밀림처럼 되어 있는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탐험 기분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강가에는 어부가 설치한 고기잡는 그물이 보인다. 이곳에는 물고기와 새우 등이 많으며 가끔 악어도 나타난다고 한다. 도중에 갈라파타 비하라에 내려서 구경한 다음 유턴해서 돌아오면 된다.

 

 

(14) 웰리가마와 (WELIGAMA)

 

웰리가마는 갈레에서 마타라 방면으로 30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길고 조용한 모래사장이 있어 느긋하게 지내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호텔이나 게스트 하우스는 해안을 따라 줄지어 서 있고 그 앞바다에는 흰 양옥이 있는, 타프로바네라 불리는 작은 섬이 있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이 웰리가마와 갈레 사이에는 작지만 개성이 강한 마을이 몇 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나와투나이다. 마을이라기보다 야자수 숲속에 어민들의 집이 몇 채 흩어져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 곳은 스리랑카의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해변으로 소문난 리조트 지역이다. 대규모 개발 계획도 있었지만 몇 년째 중단된 상태로 게스트 하우스가 해 안의 한 부분에 모여 있을 뿐이다. 이런 모습이 오히려 소박한 분위기를 만들어 이곳을 베스트 비치라고까지 표현한다. 또 이 해변의 모래사장은 바다거북의 산란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 한 곳, 야한가마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전체라고 해봐야 메인 로드를 따라 3000m 정도 건물이 늘어서 있을 뿐 특별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 해안에서 행해지는 고기잡이는 전세계적으로 희귀한 것이다. 바다에 세워진 말뚝 하나를 붙잡고 서서 물고기를 낚아올리는 이 유머러스한 낚시는 스틸트 피싱이라 불리는데 스리랑카 남해안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을들은 여행 도중에 잠시 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도시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잠시 여유를 갖고 싶을 때, 이 작고 조용한 마을들보다 편안한 곳은 없을 것이다.

웰리가마의 철도역은 마을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데 여기서부터 해안 방면을 향해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역을 나오면 우선 우체국, 경찰서, 피플즈 은행이 보이고, 우체국 모퉁이를 돌아 해안을 향해 조금만 걸어가면 버스 터미널이 나온다, 터미널 맞은편에 실론 은행이 있다.버스로 웰리가마에 온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버스 터미널 앞의 동서로 뻗은 도로가 올드 스트리트이다. 웰리가마의 메인 스트리트인 셈이지만 상점이 몇 개 있을 뿐이다. 미니 버스의 운전기사와 복권 파는 이의 손님 부르는 소리만 울려 퍼질 뿐, 적당한 레스토랑도 없고 단지 생활 필수품을 취급하는 상점들 뿐이다.

여기서 2분 정도 남쪽으로 가면 웰리가마의 해안이 나온다. 이 해안가의 도로가 뉴 로드로 현재의 간선도로이다. 여기서부터 갈레 방면으로 호텔이 늘어서 있는 데 길가에는 차양 아래서 몇몇 여인들이 레이스를 짜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 서쪽 앞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이들 섬에는 영국 식민지시대에 지은 멋진 저택들이 있는데 간조 때면 모래 바닥이 드러나 해안과 연결되기 때문에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원래 들어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저택 입구에 있는 관리인에게 부탁하면 가능하다. 웰리가마 마을은 걸어서 1시간이면 한 바퀴 둘러 볼 수 있다. 구경한 다음 해변에서 느긋하게 보내면 좋을 것이다. 해변에 있는 많은 레스트 하우스와 미니 호텔 등에서는 테라스에서 식사 하는 것도 가능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도 웰리가마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 웰리가마의 레이스 짜기

웰리가마의 해안 도로 주변에는 레이스를 짜는 작업장이 여러 군데 있다. 식민지시대에 전해진 것으로, 갈레와 웰리가마에서는 지금도 레이스 짜기가 이루어 진다. 스리랑카의 레이스는 우리나라처럼 뜨게바늘로 짜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꼬는 듯한 방법으로 짠다. 중앙의 틀에 몇 가닥의 실이 늘어뜨려져 있는데, 그것을 눈깜짝할 사이에 짜나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무늬가 나오는지 들여다 보고 있어도 잘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레이스의 명인들이 보여주는 예술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 수수께끼의 석조상 쿠스타라자 (Kustaraja)

쿠스타라자는 웰리가마 시가지 뒷산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진 조각이다. 흔히 보는 석불과는 좀 달라, 굳이 표현하자면 오래된 시대의 고귀한 인물이란 느낌이 든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 지방의 왕이 한센병에 걸렸다가 나았는데 그 기뻐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부처의 제자인 아바로키테스바라를 그린 것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른바 수수께끼의 조각상이다.

 

◈ 보면 볼수록 불가사의한 스틸트피싱(Stilt Fishing)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잡지의 사진에서 보아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듯하다. 바다에 꽂은 말뚝 위에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매달려 장대를 흔들며 갈고리로 고기를 낚아 올리는 기상천외한 낚시 방법이다. 히카두와와 마티라 사이의 바다에서 볼 수 있지만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갈레와 웰리가마 사이에 있는 아한가마의 해안이다. 이런 특이한 고기잡이 방식이 생긴 것은 섬게가 많기 때문에 혹은 해안 가까이까지 오는 물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는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진짜 이유는 불투명하다.

어쨌든 어부들이 말뚝까지 첨벙첨벙 큰소리를 내며 걸어간다. 의외로 고기는 쉽게 낚이고 멋들어진 손놀림으로 장대를 흔들어 고기를 떼어낸다. 이들의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고 볼수록 신기하다

 

 

(15) 갈레 (GALLE)

 

갈레는 스리랑카 남부의 최대 항구 도시이다. 역사도 매우 오래된 항구로서 14세기 경에는 아라비아 상인들의 동방 무역 기지로 번영했었다. 그 후 근대로 접어들면서 1589년에는 포르투갈인 들이 최초의 성채를 이곳에 세웠는데, 이를 계기로 갈레에서는 외국인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1640년에는 네덜란드가 성채를 확장하면서 그 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갈레의 원형인 것이다. 영국 식민지시대에도 지배의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견고한 성채를 가진 요새 도시로 완성되었다. 갈레의 역사는 바로 스리랑카의 피지배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생각보다 작은 갈레의 철도역을 나오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적갈색의 석조 시계탑과 높은 벽으로 구시가를 둘러싼 성채이다.

이 성채를 구경하기에는 해질녘이 가장 좋다. 성채에 둘러싸인 구시가는 인도양으로 튀어나온 반도로 되어 있어 석양은 이 반도의 서쪽으로 진다. 저녁노을이 성벽에 비치면 마을 전체가 오렌지 빛으로 물들며 반도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등대만 희미하게 빛난다. 이 시간이 되면 식민지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집들에서는 저녁식사를 짓는 코코넛 기름의 달콤한 향기가 피어나면서 하나 둘 불이 켜진다. 이 섬을 오래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성채는 이제 이곳 사람들의 평온한 일상생활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된 듯하다.

이렇다 할 만한 구경거리는 없지만 낡은 호텔에 여장을 풀고 느긋하게 마음을 열며 머무르고 싶은 매력 있는 마을이다. 갈레는 크게 반도를 둘러싼 성채 안에 있는 구시가와 그 북측 간선도로 주변에 있는 신시가로 나뉜다. 구경거리나 숙박 시설은 대부분이 구시가에 있지만 시장과 식당은 신시가에 있다. 그리고 갈레의 일상생활에 관계되는 기능은 대개 신시가에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철도나 버스 등 교통 기관의 터미널도 신시가에 있지만 그것들은 성채 출구에서 이어지는 길이 간선 도로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별로 불편하지 않다. 원래 갈레 자체가 그리 크지 않으므로 시가지 구경은 도보로도 충분하다. 시계탑이 있는 성문을 중심으로 역, 시장, 곶에 있는 등대 등은 모두 걸어서 15분 이내의 거리에 있다.

갈레에 도착하면 우선 성 위를 걸으며 반도를 일주하는 게 좋다. 아름다운 인도양의 수평선이 보이고 식민지적인 분위기가 있는 길은 걷는 것도 꽤 기분 좋은 일이다.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개가 있는데, 우선은 시계탑이 있는 현재의 메인 게이트를 기점으로 해서 걸어 보자. 입구에 들어서면 우선 정면에 실론 은행이 있고 오른쪽에는 테니스 코트가 있다. 이 테니스 코트 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시계탑으로 통하는 길이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탑에는 올라가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탑을 마주보고 바로 오른쪽에 있는 문 요새 Moon Bastion는 올라 갈 수 있다. 이곳에 서면 구시가와 신시가가 한눈에 보이므로 꼭 올라가 보도록 하자. 요새 바로 아래 있는 성채 밖은 들판인데 어린이들이 크리켓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푸근한 느낌이 든다. 성채를 따라 더 걸으면 스타요새, 아에로스 요새가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군사 지역이 있어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그대로 시계탑 있는 곳까지 돌아오는 것이 좋다. 여기서 피플즈 은행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면 다시 성채 아래로 나오게 된다.

 

성채로 오르면 아까 보다 덩 웅대하게 펼쳐지는 인도양의 수평선 멀리로 거대한 유조선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옛날에 부산했던 바다의 실크 로드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이곳을 지나는 유조선의 탱크가 우리나라까지 오간다는 생각을 하면 세계가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실감나다. 이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곶의 끄트머리에 있는 등대로, 높이가18m나 된다.

이 앞의 오로라 요새에서 성채 위를 걸을 수는 없게 되어 있어 되돌아 내려오지 않으면 안된다. 거기서 재판소와 작은 시장을 지나면 성채의 또 다른 출입구인 올드 게이트가 있다. 지금은 이용하는 사람이 적지만 이곳이 원래 성채의 정문이다. 이끼가 무성한 윗부분에는 네덜란드 통치시대의 동인도 회사 마크인 VOC가 새겨져 있다. 이곳을 빠져 나오면 오른쪽이 어항인데 아침나절에 나오면 고기잡이에서 돌아오는 어선들의 분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속 걷다 보면 너무나도 식민지적인 그레이트교회가 나타나고 바로 옆에는 뉴 오리엔탈 호텔이 있다.

그리고 철도역을 향해 들판을 가로지르면 작은 강 하구에 버터플라이 브리지라 불리는 이상한 모양의 목제 다리가 걸려 있다. 이곳을 건너면 빅토리아 공원이다. 넓지는 않지만 그네와 미끄럼틀 등이 있어 남녀노소가 즐겨 찾는 휴식처이다. 여기를 똑바로 지나면 철도 역 앞의 간선 도로가 나온다. 이 길의 서쪽 방향으로는 보석 상점이 늘어서 있는데 가게 앞에서 은세공을 하고 있는 모습도 불 수 있어 흥미롭다. 동쪽으로 가면 철도역에 인접하여 버스 터미널, 은행, 경찰서 등이 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갈레의 중심지이다.

 

◈ 갈레의 유물을 전시한 갈레 국립박물관 (Galle National Museum) : 뉴 오리엔탈 호텔 옆, 조금 높은 지대에 있는 조촐하고 아담한 건물이 갈레 국립박물관이다. 콜롬보의 박물관에 비하면 훨씬 작고 협소하지만 오히려 갈레에는 아주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관내에 진열하고 있는 것은 도기와 식민지시대의 화폐, 가구 등으로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없어 보이지만 동전을 잘 들여다보면 옛 통치 국의 것 말고도 아랍이나 중국 것도 있어 화려한 무역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두침침한 관내는 썰렁하지만 지금은 조용한 마을이 되어버린 갈레와 잘 어울린다.

 

 

(16) 콜롬보 (Colombo)

 

식민지시대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가로수. 도시 중심에 서 있는 시계탑과 오랜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호텔. 콜롬보를 대표하는 이런 국적 없는 풍경은 이 도시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아직 세계가 넓은 바다를 알지 못했던 시절, 콜롬보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이 후 아랍 상인들이 섬에 들어 오면서 이곳의 향료와 보석을 서쪽 땅의 부와 교환하기 위해 콜롬보를 교역 장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콜롬보는 이때부터 밖으로 열린 항구가 되었으며, 그 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식민지 지배 하에서 본격적인 항만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도시이면서도 외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 바로 항구의 도시 콜롬보인 것이다. 아시아의 여는 도시와 마찬가지로 콜롬보 또한 자동차의 요란한 클랙슨 소리라든가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 빽빽하게 늘어선 빌딩 등의 도시적인 소란스러움이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에 증폭되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압도당한다. 이국적인 분위기에 젖을 여유도 없을 정도이다. 이런 복잡한 모습의 도시 콜롬보에 질려서 다음 여행 장소로 재빨리 이동해 버리는 여행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이 도시의 근처를 조금만 나가보면 고대의 숨결이 남아 있는 유적들이라든가 야자수가 늘어선 해안, 나무가 우거진 산악지대를 비롯해서 매력적인 장소들이 많다. 또한 콜롬보에는 활기찬 도시에서 맛볼 수 있는, 경쾌함과 스리랑카의 도시로서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아주 많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면 콜롬보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두 지역-식민지적인 분위기가 가장 짙게 남아 있는 관청가포트와 스리랑카 최고의 바자르(Bazar) 노천시장이 번성해서 활기가 넘치는 서민의 거리 펫타가 그곳이다. 성격을 전혀 다리하는 이 두 지역은 아주 작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웃 해 있다. 이 모습은 아시아의 다른 도시가 흔히 보여주는 혼돈과는 다르게 잘 조화되어 공존하고 있다. 스리랑카 사람들의 생활은 평온하고 충실하다. 콜롬보도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도시가 외국인에 의해 생겨 났으며 서양적인 관습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하더라도 스리랑카다움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삶의 냄새는 콜롬보 어느 곳을 가든지 진하게 느껴진다. 노점상에서 손님을 부르는 소리, 사람을 가득 싣고 달리는 버스, 도시에 있는 모든 것이 이고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안내해 주는 열쇠이다. 그러나 발길을 서두르게 되면 곳곳에 배어 있는 이러한 생활상을 쉽게 지나치고 이해할 수가 없다.

 

◈ 콜롬보 박물관(Colombo National Museum)

19세기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들를 전시하고 있는 콜롬보 국립박물관은 1877년 1월 1일에 설립되었다. 마하반사(Mahavansa)에 자리잡고 있는 박물관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박물관으로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아시아 왕립협회(Royal Asiatic Society)의 실론 브랜치(Ceylon Branch)의 건의로 당시 영국식민지 총독 윌리암 헨리그레고리 경(Sir William Henry Gregory)때 건립되게 되었다. 건축가 제임스 스미서(James Smither)가 이태리 고전건축양식의 설계를 하였다.

1977년에 들어서야 문화 유물과 스리랑카의 자연 유물 등의 본격적인 수집에 이루어졌다. 스리랑카 자연사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기위해서 문화유물 전시실과 자연사 전시실로 박물관을 구분하였다. 그래서, 자연사 박물관은 콜롬보 국립박물관 내에 건립하게 되어 관람객은 한 건물내에서 두개의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시대 이후, 10만개 이상의 다양한 고대시대의 동전들이 전시하고 있다. 캔디시대의 찬란한 역사를 보여주는 스리위크라마 라자싱헤(Sri Wickrama Rajasinghe)왕의 왕좌, 검, 왕관, 지휘봉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전통무용에 사용되었던 가면, 수 많은 악기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방대한 양의 유물이 보관되고 있다.

1995년에 콜롬보 국립박물관에서는 "스리랑카 청동조각 유물전(Heritage of Bronze Sculpture in Sri Lanka)"라는 이름에 전시회가 있었다. 그때 스리랑카 고대 문화와 관련된 수많은 뛰어난 예술품들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국외에서 전시를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야자잎 필사본 컬렉션에는 스리랑카에서 가장 오래된 야자잎 필사본인 "Chullavagga"가 보관되고 있다.

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들은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담고 있어, 스리랑카 대통령은 보존을 위해 1천만 스리랑카루피를 승인하였다.

 

               

                   콜롬보 박물관                                          반다라나이케 기념회의관

 

◈ 반다라나이케기념 국제회의관 BMICH

(Bandaranaike Memorial International Conference Hall)

반다라나이케 기념회의관(BMICH : Bandaranaike Memorial International Conference Hall)는 회의 홀의 목적으로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만들어졌다.

국제회의 홀과 건물둘레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은 콜롬보의 보다로카 마와타(Bauddhaloka Mawatha) 37에이크 대지위에 자리 잡고 있다. 회의실은 4개의 서로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어, 그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 외에 어셈블리 홀, 3개의 커미티 룸 등 국제적인 시설을 갖추고 수많은 국제회의를 주최하고 있다.

 

◈ 포트 지구(The Fort)

오늘날, 포트는 넓은 도로와 근대 건물과 좁은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거리로 금속품, 섬유, 의류, 화학 등의 제조업이 발달한 코롬보의 비지니스지역의 핵심으로 국회, 관공서, 은행 등이 있다. 포트의 요크(York) 거리에는 고급 샾들이 즐비해 있는 쇼핑의 거리이다.

"포트(Fort)"라는 명칭이 16~18세기 동안 포르투칼과 독일의 점령지로서 군사적인 요새로 사용되면서부터 유래되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포트지구내에는 140년전에 등대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시계 역할만으로 남아 있는 시계탑이 있고, 밀러(Miller)건물, 중앙 우체국, 차터드은행 등의 대리석과 유리를 주재료로 하는 오래된 건물이 있는가 하면, 현대식 각종 비지니스 빌딩과 음식점이 공존하는 곳이다.

 

◈ 페타 지구(The Pettah)

"포트의 외곽도시(The town outside the Fort)"라는 뜻의 타밀언어(남부 인도, 스리랑카에 사는 인종)에서 유래된 페타는 포트 지구(The Fort)의 북쪽 2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는 스리랑카 최대의 상점가로, 작은 샾과 마켓, 노상점등 동양 특유의 시장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일본전자상가, 스위스시계, 리바이스진 등의 현대식 쇼핑몰과 더불어 거리에 쏟아져 나온 노점상들에서는 토속적인 장터의 분위기를 느끼며, 쇼핑을 즐길 수 있다

 

◈ 켈라니야(Kelaniya)

콜롬보 동쪽 약 9km 지점에 있는 불교의 성지. 석가모니가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이 곳 강물에서 목욕을 했다는 곳이다. 이 전설에 의하여 라자 마하 비하라 사원이 세워졌는데, 경내의 흰 불탑은 BC 3세기의 것이다. 외부에는 많은 불상과 문스톤, 19세기의 벽화 등이 있다.

해마다 2월에는 페라헤라 축제가 열리며, 캔디의 페라헤라 축제와 맞먹는 대규모 행렬이 이곳 거리를 누빈다. 수백 마리의 코끼리 떼 사이에서 춤꾼들이 민속무용을 추는데, 훌륭하게 치장한 코끼리가 등에 불사리를 싣고 나타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이다.

 

◈ 데히와라 동물원(Dehiwala Zoo)

데히왈라동물원은 코롬보에서 약 9.5km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아시아 최대의 동물원이다. 갈레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오다보면, 데히왈라의 알렌 대로(Allen Avenue)와 만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돌아, 표지판을 따라 오면 쉽게 찾아 올 수 있다.

사자, 곰, 호랑이, 코뿔소, 얼룩말, 고릴라 등 전세계 수많은 어떤 동물원보다도 자유롭게 생활하는 동물들이 자연그대로의 서식지에서의 생활을 볼 수 있다.

파충류관(Reptile House)에서는 백색의 희귀한 코브라와, 수많은 비단뱀이 있고, 악어의 식사시간에는 특히 긴장이 된다. 이 동물원에는 다양한 영장류들을 전시해 놓구 있다.

미니 메두라(Mini Medura)에는 500여종의 다양한 해양생물들이 있고, 야행성 동물관(Nocturnal House)에는 올빼미, 여우원숭이 등 많은 야행성 동물이 야생그대로의 서식지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동물원의 하이라이트는 "코끼리 서커스쇼"이다. 매일 5시 15분에 열리는 코끼리 서커스쇼는 일요일과 휴일에는 3시 15분에 열린다. 거대한 후피동물인 코끼리가 익살스러운 행동과 음악에 맞춰 등을 흔드는 등 폭소를 자아내게 한다.

코끼리의 발이 코끼리를 부르는 사람위에 올려질때는 모두 숨을 죽이며 지켜보게 된다.

 

         

                켈라니야                                 데히와라 동물원                                      갈라페이스

 

 

긴급시 연락처

 

가. 경찰 비상 전화번호 : 2433333

 

나.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에는 24시간 전화만 하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Medicall(전화 : 2575475)을 이용할 수 있으며, 왕진도 가능함.

 

다. 병원시설이 다소 열악하여 외국인이 안심하고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으며 중환자의 경우에는 싱가폴 등 인근 국가에서 치료를 받아야 함.

 

o 외국인이 주로 이용하는 병원은 다음과 같음.

- Nawaloka Hospital (Colombo 8, Tel : 2691111)

- Joseph Fraser Hospital (Colombo 2, Tel : 2588385)

- Apollo Hospital(Colombo 5, Tel : 4530000)

- Oasis Hospital(Colombo 5, Tel : 2505434-7)

- Asiri Hospital (Colombo 5, Tel : 2500608)

 

라. 지역별 국립 의료 시설

o 콜롬보

- General Hospital Colombo Regent St. Colombo 8

- Tel : 2691111, 2693510

o 캔디

- General Hospital Kandy

- Tel : 082-222261, 082-222170

o 네곰보

- General Hospital Negombo

- Tel : 031-222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