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2017년

낙엽을 태우면서

봉들레르 2017. 11. 19. 22:00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李孝石)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調練)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 빛난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히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족족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 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엣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猛烈)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陰影)과 윤택(潤澤)과 색채(色彩)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허전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꾸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죽어 버린 꿈의 시체를 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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