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남해안

방 한칸의 세계-동천석실(洞天石室)

봉들레르 2013. 6. 28. 17:37

 

온통 푸른색에 쌓여있는 집들

흰색인 집이 눈에 잘 보인다.

노화읍

슈퍼에서 필요한 것을 샀다.

노화도와 보길도를 이어주는 보길대교가 보인다.

 

 

보길도 청별항

 

동천석실에 도착

 고산 윤선도 선생이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했던 동천석실은 부용동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턱에 있다.

동천석실

돌다리에 물이 넘치며 작은 폭포가 된다.

동백나무 숲길

 

밧줄을 잡고 올라가는 구간

다 올라오면 보이는 광경

석담에는 수련을 심고 못을 둘로 나누어 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구멍을 파고 다리를 만들어 '희황교'라 칭하였다

 석담에 수련꽃이 피었다.

 

 

 보길도에 와보면 윤선도가 억지로 음풍농월의 자연시를 지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당쟁과 귀양살이에 지친 윤선도가 그런 주제의 노래를 읊은 것이야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는 일이지만,

우여곡절의 세상풍파를 겪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보길도에 들어오면 누구나 <어부사시사> 종류의 정서에 젖게 된다는 말이다.

그만큼 보길도는 아름답다. 제주도로 가던 윤선도가 이곳 보길도에 주저앉은 까닭이 저절로 헤아려진다

동천석실에서 바라본 부용동 풍경. 윤선도는 이곳을 보길도 최고의 절경으로 평가했다

 연꽃을  닮은 마을 부용동

좌측에 곡우당과 우측위에 낙선재가 멀리 보인다.

2개의 한칸짜리 집중에서 아래에 있는 것

고산 윤선도, 1587년에 태어나 1671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쟁의 시대'를 살았던 그는 이런저런 관직도 맡았지만

세 차례에 걸쳐 16년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냈을 만큼 불우하게 살았다(1616∼1623, 1638, 1659∼1667).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윤선도는 그저 '자연 시인'일 뿐이다.

남해 푸른 바닷가에 살면서 유유자적하게 <어부사시사>를 노래한 시인.

사실 윤선도가 전남 완도의 보길도에 살게 된 것은 시인적 풍류의 발휘와 정반대되는 까닭 때문이었다.

그가 고향인 해남<海南>에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렀으나,

인조<仁祖>는 이미 남한산성 <南漢山城>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탐라<耽羅>(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甫吉島>의 산세가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가던 도중에 만난 보길도. 너무나 풍광이 아름다웠다. 윤선도는 가던 길을 멈춘 채 그곳에 살았고, 마을에도 이름을 붙였다.

부용동(芙蓉洞), 연꽃을 닮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산 것은 13년 안팎으로, 자신의 유배 기간보다도 짧았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윤선도가 눈부신 경치를 자랑하는 보길도에 엄청난 정자를 지어놓고

평생에 걸쳐 한가로이 시조나 읊으며 살았던 귀족으로 오인한다. 윤선도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다.

그는 관직에 오르기도 전인 성균관 유생 때에 이미 광해군에게 이이첨 등 권신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선비였다.

그 일로 자신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고 아버지는 관찰사 자리에서 쫓겨났다. 전혀 유유자적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 선비라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어부사시사>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걸작 연시조를 남김으로써

국민들의 머리에 스스로를 '자연 시인'으로 완벽하게 각인하고 말았으니.

 

 

 보길초등학교에서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 산 중턱까지 오르면 거대한 바위가 있고,

그 위에 사람 혼자 앉아 있을 만한 작은 집이 홀로 서 있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이라 부르는 이곳에 혼자 앉아 글을 읽고 썼다

 

 차를 끓이던 차바위에 찻상을 고정하기위한 홈이 있다.

 

 

 동천석실은 윤선도가 경치를 극찬한 곳이기도 하지만, 아래로 부용동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멋진 전망지다

 

갈라진 바위틈 사이로 도르래 설치

 

윤선도를 회상한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 부용동의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놀랐다. 어떻게 이 자리를 골랐으며,

어떻게 딱 한 칸짜리 방을 만들 수 있었으며, 어떻게 이 많은 이야기를 여기에 담을 수 있었을까 하는 놀라움이었다.

동천석실에는 마루도 없고 부엌도 없고 마당도 없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다 있다. 집 바깥에 집이 있다.

집 안에 집이 있는 경우는 많지만 집 바깥에 집을 가지는 경우는 드물다. 집은 바람과 비와 눈을 피하기 위한 피난처다.

집 바깥에 집이 있을 경우 이 대기 현상을 피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집은 그것을 감행하고 있다.

조선집들이 미니멀의 극단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동천석실은 그 끝을 보여주는 듯하다.

동천석실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이다. 말 그대로 한 칸짜리 집이다.

이 집을 지은 이는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1587∼1671)다. 그의 건축은 절묘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조선 최고의 건축가로 고산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풍수의 달인이었고, 뛰어난 건축가이자 음향학자였으며(부용동 입구 정자인 세연정의 판석보는 물소리를 효과적으로 내기 위해

일부러 안을 비우며 구축했다), 공연기획자였다(세연정은 고산의 극장이다).

동천석실은 금쇄동과 부용동 정원을 꾸민 그의 솜씨가 가장 간단한 모습으로 압축돼 있는 곳이다.

그도 이것을 의식했는지 이 석실의 이름을 가장 원초적인 동시에 가장 큰 이름이고, 가장 지고의 장소인 ‘동천’이라고 명명했다.

‘석실’은 돌로 된 방을 의미하지만 산중에 깊이 숨어있는 방이란 뜻이다.

말하자면 이 이름은 ‘동천의 석실’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동천’이자 ‘석실’이라는 의미다.

동천석실은 아슬아슬하게 바위 위에 있다. 바로 앞에는 바위 두 개가 마치 갈라진 듯 서있는데

고산은 이곳에 도르래를 설치해 필요한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그 앞의 차바위는 고산이 차를 끓이던 장소다.

찻상을 고정하기 위해 파 놓은 홈을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연못도 있다.

동천석실 정자 오른쪽 암벽 사이에는 석간수가 솟고 그것을 받아 모아 연지를 만들었다.

벼랑 쪽을 석담(石潭)이라 하고 바깥쪽 연지를 석천(石泉)이라 한다. 이 사이의 통로가 바로 희황교다.

동천석실은 방 한 칸이지만 그 한 칸이 거느린 세계는 상징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깊고 넓다.

시인·건축가 함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