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다드에서 멀리 보이는 산 골짜기 로스인헤니우스 계곡(Valley de los Ingenios)
트리니다드 인근의 로스인헤니우스 계곡
예전에는 사탕수수밭과 제당공장까지 갖추었던 농장에서 3만명의 노예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Manacus 농장
스페인 식민지 시절 거대한 사탕수수 농장으로 착취해 가며 떼돈을 벌던 곳이다.
지금은 수확하고 싶은 만큼만 사탕수수를 키우고 있어서 농장이 많이 없어졌다.
그 당시는 설탕이 금보다 비쌌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강제노역을 시켜가며 이 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그러다 보니,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탑이 생겨났고 재산을 모은 부자가 생겨났다.
지금 그 탑은 관광객이 올라가서 거대했던 잉헤니오스를 바라보는 전망대로 쓰이고 있으며
, 부자의 집은 박물관과 식당으로 쓰이고 있다.
노예감시탑 1816년에 만들어지고 높이는 45m
트리니다드 Lzngage 마을
멕시코로 간 에니깽의 일부가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다고 한다.
Slave dwellings at Manaca Iznaga estate
Manaca Iznaga Towner 노예감시탑
설탕부와 설탕장관이 있는 유일한 나라 쿠바.
그 중에도 18헤리 세계 설탕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트리나드에는 "설탕계곡"이라 불리는 광활한 사탕수수 농장도 있다.
쿠바까지 간 애니깽
'에네켄'(Henequen). 사전에서는 '잎이 흰색이고 가장자리에 가시가 있는 용설란'이라고 풀이한다.
1995년 김호선 감독이 연출한 장미희·임성민 주연의 영화 때문에 '애니깽'으로 더 많이 알고 있다.
이 용어는 110년 전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 이민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19세기 말 열강의 식민지 침탈은 해운산업을 발전시켰다. 선박용 로프를 만드는 섬유의 원료 수요도 급증했다.
그 원료는 에네켄에서 추출했다. 당시 에네켄은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서 대규모로 재배됐다.
현지 에네켄 농장주들은 한몫 잡기 위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때 농장주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나타난 이가 바로 이민 브로커인 영국인 존 마이어스였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왜일까.
◇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한인 이민자들이 모델
'멕시코 한인 이민 100년사: 에네켄 가시밭의 100년 오딧세이'(이자경 著)에 따르면,
존 마이어스는 1903년 1월 13일 미국 하와이 호눌룰루항에 도착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던 한국인 최초의 계약 이민자들을 주목했다.
미주 한인 이민 112년 역사의 문을 열었던 이들은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한민족 특유의 끈기와 성실함으로 일을 해 농장주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에네켄 농장에 투입됐던 중국인 노동자의 수급이 끊어진 것도 한인의 이민을 앞당겼다.
당시 중국 정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짐승만도 못한 작업 환경에 더는 자국민을 보내지 않았다.
마이어스는 일본의 인력송출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를 통해 국내 언론에 광고를 냈다.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의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가난에 찌들리고 어수선한 정국에 살던 한국인들은 솔깃했다. 게다가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극락 같은 곳이다",
"누구든 병들면 고쳐준다"는 등의 소문도 호기심을 부추겼다.
남자 802명, 여자 207명 등 총 1천33명이 묵서가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들은 2년 전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1905년 4월 4일 인천 제물포항에 모여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올랐다.
1905년 5월 12일. 일포드호는 일본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살리나 크루스항에 닻을 내렸다.
한 달이 넘는 긴 항해 동안 아이 2명과 어른 1명이 숨지고, 1명이 태어났다. 모두 1천31명이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들은 배에서 내려 곧바로 기차를 타고 다시 북상해 5월 15일 중부 지역 베라크루스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10∼25명씩 무리로 나뉘어 메리다의 에네켄 농장에 배치됐다.
◇ 노예와 같은 생활…'사기 이민'으로 밝혀져 한 차례로 끝나
지상낙원으로 알고 있던 환상은 곧 깨졌다.
한인들은 새벽 4시부터 어두울 때까지 쏟아지는 땡볕에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얼
굴이 검게 타고, 가시에 찔려 손에서 피가 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정해진 하루 일감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채찍질도 가해졌다.
참고 견디며 일했지만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물론 임대주택과 식량도 직접 돈을 주고 구입해야 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일을 할수록 빚만 늘어나는 나락에 빠졌다.
황성신문 1905년 7월 29일자 사설은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반영했다.
"멕시코 원주민인 마야족의 노예 등급은 5∼6등급, 한인 노예는 7등급으로 가장 낮은 값이다.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다.
아이를 팔에 안고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이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해서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한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도다. 통탄, 통탄이라."
이 신문은 7등급 노예로 전락한 한인들의 참상을 보도하고, 이틀 후 고종의 이민정책을 비판하는 사설도 게재했다.
당시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송환 계획을 세웠지만 일본의 방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사로 더는 멕시코에 노동자를 보내지 않았고, 110년 전 사기극은 그렇게 단 한 차례로 막을 내렸다.
이구홍 이사장은 멕시코 이민에 대한 다른 측면도 얘기한다.
"지금까지는 '사기 이민'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사실"이라며 "당시 대한제국이 노동자들에게 멕시코에 가는 여권을 발급했고,
멕시코 이민청도 이들을 정식으로 받아들였으므로 1905년 멕시코 이민은 미주 한인 이민에 이어
'정식 노동 이민'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이민 경비를 지불하고 곧바로 풀려난 사례도 있어 '노예 이민'이란 표현도 과장됐다고 소개했다.
현지에서 한인 후손을 도운 조남환 목사는 "황족인 이종오가 내시 4명, 궁녀 1명과 함께 이민선을 탔는데
이를 두고 고종이 해외 망명정부 건설과 같은 임무를 줬을 것"이라고 해석했고, "실제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가난 탈피 말고도 미지에 땅을 밟겠다고 모험심을 발휘한 한인도 여럿 있었다는 후손들의 증언도 멕시코 이민을 보는 또 다른 견해다.
◇ 4년 뒤 자유의 몸…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지고 쿠바로도 건너가
노예와 같은 생활도 4년 뒤 끝났다. 1909년 5월. 당시 대한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경술국치를 앞둔 고국은 녹초가 된 그들이 돌아오기에는 더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지옥 같은 곳에 남는다는 것도 죽기보다 싫은 일. 한인들은 살겠다고 유카탄 반도를 떠났다.
하지만 그들은 언어 장벽으로 일자리를 잡을 수 없는 데다 멕시코 혁명으로 동양계 이민자들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그나마 애환이 서린 메리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인조섬유가 등장하면서 에네켄 농장이 문을 닫으면서 한인들은 생존을 위해 멕시코 전역으로 다시 흩어져 나갔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정착하고, 오늘날 4만 명이 넘는 한인사회의 씨를 뿌린 것이다.
특히 한인 274명은 1921년 쿠바 사탕수수 농장으로도 넘어갔다. 이들은 현재 수도 아바나 등지에 사는 1천100여 명의 선조이다.
◇ 무관 양성학교 세우고 독립자금도 보내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이 작성한 '멕시코·쿠바지역 독립운동사적지 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한인들은 자신들의 고생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며 후손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한글학교를 세웠다.
일제에 빼앗긴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비극과 유랑 생활 속에서도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2세 교육에 전념했다.
유카탄 반도의 한인들은 농장 계약 만료일을 4일 앞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의 '메리다지방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단결과 상호 이익을 도모하면서 일제의 침탈에 맞서기 위한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했다.
메리다에 이어 멕시코시티, 탐피코, 오학기나 등지에도 대한인국민회가 창설돼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근영·양귀선·조병하·이순근 등은 1910년 11월 17일 메리다 중심지에 무관 양성기관인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세웠다.
멕시코에서의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이 학교는 3년 정도 운영되다 폐교됐지만 조국 독립에 필요한 군인을 실제 배출했다.
이 학교 학생들은 독립자금을 보낸 데 이어 한국전쟁으로 발생한 난민을 돕기 위해 구제금까지 보냈다.
이들은 1918년 메리다를 방문한 도산 안창호 선생을 큰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쿠바에 도착한 한인들도 1921년 6월 마탄사스에서 쿠바대한인국민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매년 3·1절 기념 행진을 펼쳤으며 현지인에게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사업을 벌였다.
마나티, 카르데나스, 아바나에도 지방회가 설치돼 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1923년에는 쿠바 현지인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해 '친구회'도 만들었다.
멕시코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한국을 정식 승인했고, 1962년 1월 26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1985년 8월 2일에는 멕시코 대외무역청(IMCE) 서울사무소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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