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남해안

송시열의 글이 쓰인 바위

봉들레르 2013. 7. 2. 01:02

 

중리해수욕장에서 언덕을 넘어서는 곳에 정자가 있다.

잠시 정자에서 경치감상을 했다.

 

경사진 길을 넘어가면

전복양식장들이 눈에 들어온다.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빨간지붕의 집은

당겨 보니 절표시가 보인다.

보길도 백도리의 송시열시문바위에 가는 입구

치패양식장

3개월이 될 때까지 치패(어린 전복)는 현미경으로나 관찰이 가능하단다.

새로이 조성된 길같다.

 

온통 바위로 된 지역을 돌아가면

눈앞에는 양식장들이 펼쳐진다.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 일대는 보길도 중에서도 삼대 명승이라 할 만큼 눈이 시린 절경지다.

앞에는 소안도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따라서 보길도에 가서 이 글씐바위를 보지 않고 돌아왔다면 심봉사가 따로 없다는 말을 들어도 달리 변명을 말아야 한다.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경치가 절묘하게 한데 어우러진 곳을 어찌 놓칠 것인가.

남인 고산과 치열한 예송논쟁을 벌렸던 서인의 대표 우암 송시열은 숙종이 장희빈을 통해서 얻은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하자

정통성을 문제 삼다 제주도로 유배당한다. 남인과 서인의 대표가 보길도와 인연이 깊다.

 험한 뱃길에 잠시 보길도 백도리에 머문 우암은 바위에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글을 남겼다.

 

철계단이 끝나는 곳에 송시열의 시문이 있다.

탁본을 뜨는 자국이 선명하다. 한심하다.

 

송시열은 윤선도를 나이 81세가 되도록 유배 생활을 시킨 장본인이다.

그런 송시열이 뒷날 제주도로 귀양을 가던 도중 보길도에 들렀다가 바닷가에 절벽처럼 우뚝 선 거대 바위 벽면에 시를 새겨 남겼다.

이보다 더 보길도의 절경을 뚜렷하게 말해줄 자료가 어디 또 있을까.

 

송시열은 ‘八十三歲翁 蒼波萬里中(팔십셋 늙은이 만리 바다 에 떠 있네)’로 시작되는 한시를 바위에 새겨 놓았다.

송시열의 작품은 한시이므로 한국문학사의 대걸작인 ‘어부사시사’와는 결코 견줄 바가 못 되지만,

그래도 보길도는 그가 남긴 한시에 힘입어 한층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그와 윤선도 사이에 서린 정치적 악연이 사람들 사이에 더욱 널리 회자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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