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은 알에서 부화한 이후 바다 가두리 양식장으로 나갈 단계인 치패(稚貝.3∼5cm)까지 키우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다.
갓 부화한 어린 전복의 먹이는 부착성 식물 플랑크톤인 규조류로 지금까지는 바닷물을 종묘에 그대로 흘려보내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전복이 바닷물 속에 포함된 규조류를 먹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전복은 치패 때부터는 다시마를 먹고 2∼3년을 자란 후 성패가 돼 출하된다.
전복센터는 지난해부터 규조류 원종(原種)을 대량 배양에 나서 올들어 처음으로 지난 4월부터 어가에 실비가격으로 공급했다.
42어가에 공급한 규조류는 2만9천여ℓ.
동물과 비교하면 이 규조류는 초유(初乳)나 잘 농축된 진액이어서 이 먹이를 잘 먹은 전복은 건강한 치패로 성장할 수 있다.
현재 전복의 폐사율은 평균 55%로 2마리 가운데 1마리는 출하 전에 죽는 셈이다.
전복센터는 오는 8월까지 모두 5만ℓ의 규조류를 공급할 계획으로 치패 생산어가의 20% 정도가 먹이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어린 종묘 때 플랑크톤을 충분히 섭취함으로써 건강하게 자랄 수 있어 폐사율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복은 전남의 간판 수산물로 지난해 기준 6천941t(2천514억원)이 생산됐으며 이 중 98%가 전남에서 출하됐다.
흐리게 보이는 곳은 미역이나 다시마를 양식하는 곳이다.
치패를 3년동안 양식을 한 후에 출하를 하지만 돈이 급한 어부들은 2년반에도 출하를 한다.
바다쪽으로는 주로 미역과 다시마 양식장
육지에 가까운 쪽에 전복 가두리양식장들이 있다.
크레인이 달린 배가 옆에 조그만 배를 달고서 양식장으로 이동한다.
어촌계에서 각자 주어진 가두리양식장에서 작업중인 크레인 달린 배들
전복양식은 김양식이나 톳양식과 달리 시설비용이 만만치 않다.
바다에 떠 있는 바둑판처럼 여러 개의 네모난 칸들이 모아져 있는 것들이 전복양식 시설이다.
가로 세로 5미터 쯤 될까 말까 한 칸 시설비용은 40여만원, 여기에 그물까지 넣으면 70여만원에 이른다.
그리고 시설에 넣는 전복 치패의 양에 따라 시설을 포함한 비용은 200만원에서 250만원에 이른다.
전복양식을 많이 한 사람들은 1000칸에서 1500칸, 보통은 수백 칸 규모의 양식을 하고 있다.
양식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전복이 크는 정도에 따라 들어가는 양을 조절해야 한다.
이렇게 3년은 자라야 상품으로 판매된다. 결국 3년 동안에는 돈 맛을 보지 못하고 계속 투자를 해야 한다.
목돈을 갖고 있지 못한 어민들은 담보물을 금융기관에 저당 잡히고 빚을 내야 한다.
흔히 전복양식을 하는 사람들은 '100만원을 1만 원짜리 사용하듯 한다'는 말을 한다.
전복이 판매되면 다시 어린 전복을 사서 넣어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5년에서 7년 정도 아무 탈 없이 양식을 해야 돈을 벌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톳양식의 경우는 목돈이 들어가지 않고 일 년 단위로 수확을 하기 때문에 아직도 적잖은 주민들이 생업으로 하고 있다.
일 년이면 적으면 3천만원에서 좀 양이 되는 주민들은 7천여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전복양식을 한다고 매양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지난 어느 해 매미처럼 대형 태풍이 심통을 부리면 한꺼번에 전재산을 잃고 빚더미에 올라앉는다.
여기에 주민들끼리 연대보증이라도 했다면 주민 모두 신용불량에 차압을 당해야 한다.
전복양식에 필요한 물품을 바다로 옮기고 전복을 출하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전복집
전복집들의 울타리
가두리양식
1억5천정도 나가는 작업용 배
7천정도
모든 장비를 갖추어서 양식을 할려면 6-7억은 있어야한다니 양식도 아무나 할일이 아니다.
전복에 먹이를 줄 때나 전복집을 들어올릴 때 없어서는 안될 크레인달린 배들
4월~10월까지 다시마를 주고
11월~3월까지 미역을 준다.
제철이 아닐 때 미역이나 다시마는 거들떠도 안본단다.
전복을 따는 작업
전복선별작업
전복양식어부 이야기
딸기, 커피, 생수, 냄비, 빵, 김치…. 작업하면서 먹을 간식거리와 식사가 배에 실렸다.
아침 6시30분, 완도 보길도 정동리 선착장. 가로등 불빛 아래 ‘갑바’(어깨까지 올라온 방수 작업복)를 입은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더니 소란스러워진다.
“준비 다 됐어. 커피는 낄였어.” “일 열심히 해라고 날씨가 금상첨화네.” 작업 인원은 십 여 명. 배에 올라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출항 준비를 시작한다.
조수복(53)씨네 작업 날이다. 정오에 전복을 실어갈 수산물차가 완도에서 오기로 했다. 이른 아침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커피 마시며 “오늘은 일 진전이 겁나 빠르겄는디…”, “이쁜 아가씨가 바다에 나간다고, 바다가 이라고 잔잔해불고만…”,
“나는 별라 할 것이 없겄어” 하는 말들이 나온다. 주말이라 조수복씨 딸이 작업에 동참한 것.
전복 작업배 용덕호는 ‘삽배’라 불리는 6톤짜리 어선. 작업이 용이하게 이물(뱃머리)이 열리고 닫힌다.
고물(배 뒤)에는 전복집을 끌어올릴 수 있는 크레인이 정착돼 있다.
“맨 앞 바구니가 꽉꽉 차야 하는디…”
보길도 바다는 거대한 양식밭이다. 바다 가득 가두리 양식장이 펼쳐져 있다.
정동리를 비롯해 백도리, 정자리, 예송리 통리, 중리 등 어촌마을 대부분이 전복 양식에 생활을 기대고 있다.
선창리와 보옥리만 멸치잡이 등 오랫동안 해온 고기잡이를 유지하고 있다. 물살이 세서 가두리 양식이 어렵다 한다.
보길도에서는 정동리가 10여 년 전에 전복양식을 가장 먼저 시작했다. 노화도에서 시작된 전복양식을 마을 사람 몇이 배워와 시작했다.
예송리가 가장 늦게 시작됐다. 예송리 또한 물살이 있어 전복양식을 망설였었다.
배는 길게 늘어진 전복양식장 사이로 달렸다. 조수복씨 ‘전복밭’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는데 마을 어촌계 계약 때문이다.
어촌계에서는 양식이 잘되는 바다와 그렇지 못한 바다를 나누고, 그 안에서 제비뽑기를 해 바다가 주는 혜택을 공평하게 나눴다.
전복 양식장은 바둑판 모양새로 네모 반듯하게 있다. ‘빠지’라 하는 가두리 양식틀 안에 그물망을 치고 그곳에 전복을 키운다.
그물망 안에는 전복이 달라붙어 살 수 있도록 네모나게 만들어 놓은 전복집이 있다.
작업은 크레인으로 그 그물망을 끌어 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물망을 틀에 고정시켜 놓고, 다시 크레인으로 전복집을 들어 올려 선상으로 올린다. 굵은 전복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남자 세 명이 달라들어 납작한 전복칼로 밀어내듯이 전복을 따낸다. “욱에서 아래로 쑥 밀어.” 요령이 없으면 전복 하나 따내기가 쉽지 않다.
딱, 달라붙어 꼼짝달싹 안 한다. 그 만큼 힘이 세다.
배에서 바로 선별이 이뤄진다. 선별은 여자들 몫이다. ‘깡’이라 부르는 작은 전복은 따로 구별해내고 그 이상의 것만 계량기에 올려놓는다.
계량기가 자동으로 돌아가며 무게에 따라 자동적으로 선별해낸다. 조수복씨는 “맨 앞 바구니가 꽉꽉 차야 하는디….
고건 내 맘 뿐이겄제” 하고 웃는다. 1㎏에 5~6미(마리) 되는 큰 전복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인 것.
똑같은 기간에 똑같이 밥을 주고 키워도 전복 굵기가 다르다.
조호림(38)씨는 “똑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와도 키 큰 놈 있고, 작은 놈 있고 그러잖애” 한다. 어느새 해가 떠올라 있었다.
바다는 푸른빛으로 나울나울거렸다. 작업하는 사람들 얼굴도 물기로 반짝반짝거렸다.
“전복이 허울만 좋제, 인건비 따 먹기여”
“갖고 가든 못 하더라도 여그서 묵는 것은 누가 뭐라고 안한게 묵어.” 전복칼로 생전복을 까 건네준다.
딱딱하다 싶을 만큼 씹히는 맛이 대단하다. 바닷물의 짭짤한 소금기에 감칠맛이 살아있다.
오독오독 씹을 때마다 콧속으로 올라오는 바다향이 싱그럽다. “이왕이믄 질로 좋은 놈을 묵어야, 육지 가서 소문을 내주제.”
조수복씨가 “깨무는 순간 몇 만원이 입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라는 가장 굵은 전복을 톡 까버린다.
배 한가운데로 전복을 담아내는 바구니 상자가 줄줄이 놓였다. 밥상 대용이었다. “올 스톱, 일을 했는게 밥은 묵어야제.
전복 본께 굵직하니 우리 밥값은 나오겄는디….” 언제 삶았는지, 전복은 물론 전복집에서 잡아낸 가리비까지 김이 포근포근 올라오게 삶아져 나왔다.
작업하다 잡은, 어른 손바닥보다 큰 해삼이 놓였다. 김치와 함께 아침밥으로 나온 것은 전복 반 찹쌀 반의 전복죽.
삶은 전복은 단단한 육질이 야들야들하면서 찰진 맛이 더해진다. ‘조개의 황제답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전복죽은 고소하기만 하다.
보길도 전복 이야기가 나온다. “전복이 허울만 좋제, 인건비 따 먹기여.” 소득 이야기다.
전복은 옛날에는 서민들은 먹기 힘들었던 귀한 조개. 양식이 되며 그 물량이 늘어나 지금은 대중화됐지만 다른 패류에 비하면 여전히 값이 꽤 나간다.
분명 전복양식은 보길도 가난한 어촌을 부촌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이라는 것.
“전복양식 초창기만 하더라도 대규모가 아니었제. 처음에는 고무 다라이 같은 둥그런 통을 너갖고 키웠는디 큰 비용이 안 들어가.
긍께 양식을 시작할 수 있었제. 글다가 수하식으로 하고, ‘기찻길’이라고 해우발 맹키로 길게 해서 키우고.
그때까지만 해도 전복값이 좋았어. 일하기가 고약스럽고 지금보다 전복 나오는 양이 훨씬 적었지만 돈이 됐제.
근디 시방은 전복양식 시작할라믄 3억이 있어야 해. 배 지서야지(사야지), 빠지 짜야지, 치패 사다 넣어야지. 전복이 클라믄 2년 반이 있어야한디…,
3억 빼내기 쉬운 일이겄어. 다 지(제)하고 나믄 인건비만 남는 거여.”
전복은 2년 반 내지 3년이 걸리는 농사다. 소득 없이 먹이만을 주며 키워야 한다.
전복 활동량이 강한 가을에 치패를 가두리에 넣고 그 다음 해 봄에 넣은 치패를 한번 선별해준다. 1년 지나 다시 상태가 좋은 전복을 선별한다.
전복을 키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더 키워야 한다. 전복의 먹이인 다시마와 미역. 다시마, 미역 양식까지 해야 전복을 키워낼 수 있는 것.
4월~10월까지 다시마를 주고, 11월~3월까지 미역을 준다.
여름에는 스무 날에 한 번, 가을에는 1주일에 한번 다시마와 미역을 채취해 전복집에 넣어준다.
“전복 면허지가 따로 있고 다시마 미역 면허지가 따로 있제. 바다가 좋은께 다시마랑 미역이 물에 너주기만 하믄 쑥쑥 잘 자란디,
이놈 키울라 저놈 키울라, 발동선이 따로 없어.”
조호림씨는 “전복은 식성이 무척 얄궂다”고 말한다. “최고 좋은 밥만 귀신같이 가려 묵는 것이 전복이여.
다시마 철이 되믄 철 지난 미역은 거들떠보지도 않어.”
완도는 전국 전복 생산량의 80% 정도를 차지한다. 완도에서 전복 양식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전복 먹이인 다시마와 미역이 잘 자라나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전복이 진짜 달려가더랑께”
전복양식이 시작되기 전에도 완도 전복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수산물이었다.
“물이 바다로 나가믄 바구(바위) 가서 따 와서 생으로 묵고 그랬는디, 귀했제. 바구에 딱 달라붙어서 살어.
우리 마을에는 무레꾼(해녀)이 없는께 중리 통리 무레꾼들이 와서 전복 작업을 했제. 동네에서 무레꾼들에게 바닥(바다)을 폰 것이제.
그때도 완도 전복하믄 최고 중에 최고였제. 값이 질로 비쌌어.”
자연산 전복은 갈색빛이 나고 껍질이 억세다. 바다에서 자라는 양식은 푸르스름한 빛이 강하고 부드럽다.
그러나 맛에서는 큰 차이를 두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 “자연산이 쫄깃쫄깃하니 좋제.
근디 전복이 원래 바구에 달라붙어서 활동을 잘 안하는 조개인께 양식이라고 해서 크게 차이가 안 나.”
바위 틈 속에서 조심조심 사는 전복. 그러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민첩성을 보일 때가 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빠르다.
“생전 첨 봤단게. 전복이 진짜 달려가더랑께. 깜짝 놀랬단게.”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들쥐와 전복 얘기다.
들쥐가 전복을 잡아먹으려고 납작 엎드려 있는 동안 전복이 들쥐 등 위로 올라탔다는 것.
전복이 다른 조개와 확연히 다른 것은 타원형의 껍질 위에 한 줄로 뚫려 있는 구멍이다.
실제로는 뒤쪽 몇 개만 열려 있고 나머지는 막혀 있다. 열려 있는 구멍은 배설물을 내보내는 통로이고 수컷의 경우 정액을 내뿜는다.
평소에는 이 구멍을 통해 호흡을 한다. 전복의 암수 구별은 생식소 빛깔로 한다. 암컷은 짙은 녹색이고 수컷은 담황색이다.
암컷은 살이 부드러워 찜이나 구이, 죽으로 해먹기 좋고, 수컷은 암컷에 비해 작지만 육질이 오돌오돌 씹히는 맛이 있어 생으로 먹기 좋다.
보길도 전복 어민들이 여태껏 가장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태풍 피해가 없었다는 것.
“한 7~8년 동안 잠잠했제. 태풍이 심통을 부려불믄 다 끝장이제. 시설 갖출라고 융자 받아서 전복농사 짓는 것인디….
융자 받을라고 동네 사람들끼리 보증 서주고 했는께, 태풍 불어블믄 보통 문제가 아니제.” 바다가, 하늘이 고맙기만 하다.
한 아짐은 “보통 때도 나는 말조심하고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인심 쓸라고 얼마나 신경 쓴디…. 그래야 용왕님이 돌봐줄 것 같은께…”라고 말한다.
전복 작업은 시간을 맞추기 위해 빠르게 진행됐다. 바쁜 와중에도 농담이 오고가며 웃음보를 터트렸다.
무엇보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이 봄바람이었다. “인자 봄인께, 주말에는 아무리 급해도 일하지 말어.
다들 (보길도로) 놀러 와서 산도 올라가고 꽃구경도 한디,
우리도 사람인께 놀아야제”라는 말에 “속 핀한(편한) 소리 하고 있네”라는 대꾸가 바로 나온다.
조수복씨 얼굴빛도 봄빛이다. 전복집을 거둬 올릴수록 굵은 놈이 다닥다닥 붙었다.
깡이 적게 나오고 상품 가치가 큰 굵은 전복이 상자에 가득 채워졌다. 양도 많이 나오고 품질 상태도 좋다.
“보길도 바다가 우들한테는 돈바닥이제. 멸우치(멸치), 삼치 많이 잽히고, 김발 할 때는 또 그만큼 나오고, 톳, 청각도 잘 됐고.
이 바다 없었으믄 애들 갈칠 수나 있었가니.”
글·사진 = 김창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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