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남해안

3-5 고풍스런 색깔 순천 선암사

봉들레르 2017. 1. 3. 08:17


 

 

선암사를 가는 길이 곡선으로 되어있어 운치를 더 한다






보물 제400호로 화강암 아치형 석교인 승선교 

우리나라의 무지개다리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다리다

가운데 삐쭉하게 나온 용머리



 승선교 안내판에 따르면 "조선 숙종 39년(1713)에 호암 대사가 완공한 승선교는 밑 부분이 자연 암반이어서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으며, 가운데 부분에 용머리 조각이 있다"한다


"승선교는 계곡의 폭이 넓어 아치 또한 유달리 큰 편이다.

아랫부분에서부터 곡선을 그려 전체의 모양에 완전한 반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물이 비쳐진 모습과 어우러져 완벽한 하나의 원을 이룬다."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부분부터는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 시냇가와의 사이는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선암사 강선루

승선교와 작은 연못인 삼인당을 지나 일주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선암사 경내가 드러난다.

선암사는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다른 사찰들에 비해 가람배치나 경내 풍경이 권위적이지 않고 포근하다

작가 조정래는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조정래의 아버지 조종현은 16세에 선암사로 출가해 만해 한용운이 이끈 항일 비밀결사체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의 조선불교 사찰령을 거부한 민족 운동가였으며 선암사에서 결혼한 최초의 승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불교를 장악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쉽게 만들고자 황국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젊은 승려들은 결혼을 통해서 일본 방식의 대처승이 되었다고 한다.

조정래 작가는 스스로를 선암사의 풍경소리와 목탁 소리를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이라며

소설 <아리랑>을 쓰게 된 이유로 꼽기도 했다. 

날아갈듯한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는 우리나라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이다.

불교에서 조계종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종단인 태고종의 총본산이다.

선암사는 1698년 세워진 보물 400호 승선교와 강선루를 비롯해 보물 8점, 지방무화재 11점 등 모두 19점의 문화재가 있다.

범종루 현판 아래에는 태고총림조계산선암사(太古叢林曹溪山仙巖寺)라는 현액이 있다.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普愚)를 종조(宗祖)로 삼는다는 의미다.

태고 보우는 교와 선을 일치시키고 정토와 선을 방편과 지혜로 수용한 여말선사다.

대웅전을 마주보는 만세루 뒤편에 걸어둔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현판이 특이하다.

이 현판은 서포 김만중의 부친 김익겸(金益兼·1614~1636)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육조는 중국역사의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중 하나로 후한이 멸망한 후 수(隋)가 통일되기 전에 있었던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의 여섯 조정을 말한다.

보리달마가 520년경 중국에 들어와 쑹산 소림사에서 선법을 폈으니 선종의 법통을 이어 받은 절이라는 말로 해석된다.

대웅전 현판 글씨는 조선 23대 왕 순조의 장인 김조순의 작품이다.




대웅전은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져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석탑(보물 제395호)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 기둥을 세워 지어졌는데 기둥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 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이다.

공포를 앞뒤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특히 건물 안쪽 공포 구조에서는 화려한 연꽃 봉오리 장식으로 마감하여 조선 후기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수법을 나타내고 있다.
선암사 대웅전은 다포계의 일반적인 수법을 따랐으나 화려한 건축양식과 장식성에서 조선 후기 중건 당시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어

학술적·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봄이 되면 관광객들이 몰리는 선암매길이다


선암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