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domestic travel/남해안

3-4 벌교에서 주먹자랑하지 말라

봉들레르 2017. 1. 3. 01:10

전라도 낙안뻘에 꼬리처럼 매달려 한낱 갯가 빈촌에 불과했던 벌교.

그러던 벌교가 ‘벌교 가서는 주먹 자랑도 돈 자랑도 하지 말라’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보성과 순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고흥반도 사람들이 벌교 땅을 밟지 않고는 외지로 드나들 수 없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다.

또 하나를 꼽자면 대하소설 ‘태백산맥’ 의 힘이다. 아니 벌교 뻘밭에서 무진장 잡히는 꼬막의 힘이다.

한 됫박 막걸리에 꼬막 한 사발 까는 것을 큰 낙으로 즐겼다는 벌교의 장돌뱅이부터,

해맑은 유백색 빛으로 치장하고는 쫄깃하고 알큰한 몸으로 나랏님을 매료했던,

‘감기 석 달에 입맛은 소태 같아도 맛은 변치 않는다’ 는 참꼬맛의 그 맛.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닷바람 속에서도 뻘배를 띄워 꼬막을 캐는 아낙네들의 숭고한 땀이 배여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 맛은 누구를 막론하고 감동이다

벌교는 한 마디로 일인(日人)들에 의해서 구성, 개발된 읍이었다.
일인들이 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벌교는 낙안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 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는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일인들이 전라남도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벌교를 집중 개발시킨 것이었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머리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는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긴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목포가 나주평야의 쌀을 실어 내는데 최적의 위치에 있는 항구였다면,
벌교는 보성군과 화순군을 포함한 내륙과 직결되는 포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보성을 잇는 삼거리 역할을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철교 아래 선착장에는 밀물을 타고 들어온 일인들의 통통배가 득시글거렸고,
상주하는 일인들도 같은 규모의 읍에 비해 훨씬 많았다.
그만큼 왜색이 짙었고, 읍단위에 어울리지 않게 주재소 아닌 경찰서가 세워져 있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유입인구가 늘어났다.
모든 교통의 요지가 그러하듯이 벌교에는 제법 짱짱한 주먹패가 생겨났다.
그래서 ‘벌교 가서 돈 자랑,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멋 자랑하지 말라’는 말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보성여관'은

 소설에서처럼 해방 이후부터 한국 전쟁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기억하는 근현대 삶의 현장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억의 장소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벌교는 일본인의 왕래가 잦아지며 유동인구가 증가했고,

그 역사의 중심에 있던 '보성여관'은 당시의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근현대 벌교의 역사문화환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보성여관'은

2004년 역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보성여관의 관리단체로 지정되었으며,

2년간의 복원사업을 거쳐 2012년 6월 7일 예전 모습을 되찾은 '보성여관'을 새롭게 개관하게 되었다.

새롭게 복원된 보성여관은 벌교와 보성여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전시장과 차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휴식공간인 카페,

다양한 문화체험의 공간인 소극장, 그리고 소설 속 남도여관을 느낄 수 있는 숙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은 다다미방으로 다목적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930년대 철도가 개통되면서 역사가 건립되었다. 20여평의 대합실 및 사무실로 된 목조 건물이었으나 노후하여 1988년에 철거하고 한옥 형태의 새 역사가 건립되었다. 소설속 벌교역에서는 국회의원을 마중하고 전송하느라 도열, 계엄사령관의 부임 행사 및 염상진의 목이 내걸린 일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이 펼쳐진다.

 

 

 

1901년 벌교에서 태어나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 하였고, "

고향","향수","압천" 등을 만들었으며 1백 여 편에 달하는 민족성과 애국성을 지닌 음악을 남겼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음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국악을 채보 하였으며

해방후 현실참여 속에서 당시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음악사조를 벗어나

가곡 "조국, 독립축전곡, 한강수, 개천절 노래, 3.1절 노래,선열 추모가" 등 애국적인 곡을 만들었다.

6.25 전쟁 부산 피난시절 마지막 작품으로 "무궁화 노래"를 남기고 53세의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다.

그의 생가가 복원되고, 벌교 채동선 음악당 앞에는 정지용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이 친필 악보대로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벌교에서 물 인심 다음으로 후한 것이 꼬막 인심이었다.

그만큼 벌교 뻘밭에서 엄청난 양의 꼬막이 생산되었던 것. 제사상에서 홍어 없어도 요놈의 꼬막만은 반드시 올라와야했고,

여자치고 꼬막무침 못하는 이 하나 없었다 하니 꼬막이 벌교를 대표하는 명물로 손꼽히는 것은 당연지사.

소설 ‘태백산맥’ 에서처럼 간간하고 쫄깃쫄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꼬막은

가을 찬바람이 불어오는 10월 말부터 제법 쫄깃한 맛을 내는 데 이듬해 춘삼월까지가 제철이다.

모래밭에 사는 조개들과는 달리 진흙을 제 집으로 삼고 사는 참꼬막은 온몸에 거무스름한 갯뻘을 먹칠하고 있다.

주름 골이 깊고 껍질도 단단하다. 씻기에도 번거롭고 다루기가 꽤나 어렵다는 얘기다.

꼬막을 캐는 일도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꼬막은 찬바람이 불어야 제 맛이 나기 때문에 천상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라는 것.

 

 

소설 속에서 품격 있고 양심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진 김범우의 집

국내 최대 홍교인 벌교 홍교. 선암사의 그것과 닮아있다

무지개다리인 홍교. 조선 영조 때 뗏목다리였던 것을 송광사 승려가 돌다리로 만들었다는 홍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다리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홍교는 염상진 등이 유지들의 창고를 털어 굶주리고 있던 주민들에게 주려고 곡식을 모아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