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아랍어 : 알 마그리브)는 아프리카 서북쪽의 나라로 라바트가 수도이고 카사블랑카가 최대 경제 도시이다.
주요 도시는 마라케시(Marrakesh), 테투안, 탕헤르, 살레, 페스, 아가디르, 메크네스, 우지다 등이다.
동쪽과 남동쪽에 알제리, 남쪽에 모리타니와 서사하라와 접해 있으며,
서쪽과 북쪽은 지중해, 서쪽은 대서양에 면해 있다.
북쪽에 세우타, 멜리아, 페뇽데벨레스데라고메라, 치파리나스 섬과 같은 스페인의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지브롤터 해협 너머에 스페인과 영국령 지브롤터와 마주하며 서사하라까지를 영토로 한다.
모로코는 산악국(평균해발고도 800m)으로 북서 아프리카의 아틀라스 산계가 있다.
전 국토의 1/5인 비옥한 충적 저지대에서만 농경이 이루어지며,
저지대는 물루야(북동쪽), 라르브(북서쪽), 하이아틀라스 산맥의 산록 평원(중부), 수스 평원(남서쪽) 등이 있다.
암석고원(평균 549~915m)이 국토의 절반으로, 동부지방 고원들이 가장 높고 라바트 해안과 남부 사하라 사막지대에도 고원이 있다.
산들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높고, 전체 면적의 1/3 이상을 차지한다.
초승달 모양 2,458m 리프 산맥이 지중해 연안에 있으며, 중부에 평균고도 3,355m 아틀라스 산맥이 있다. 이
산맥은 북으로부터 미들, 하이, 안티 아틀라스로 나뉘며, 하이 아틀라스에 최고봉 투브칼 산(4,165m)이 있다.
강들은 급류로 대개 대서양으로 흐르거나 사하라 사막에서 증발하지만, 북쪽 물루야 강은 지중해로 흐른다. 전
국토의 1/10이 삼림지대로 시더, 전나무, 향나무 등은 산악지대에서, 야생 올리브나 사발야자는 낮은 지대에서 자란다.
모로코 북부와 중부 대부분은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은 따뜻하고 다습하며,
여름은 무덥고 건조한 반면 남부로 갈수록 반건조 기후와 사막기후가 나타난다.
평균 기온은 해안지대가 17~23℃, 내륙이 10~27℃이다.
연강우량은 북부 1,000㎜에서 남부 203㎜에 이르며, 남동부 사하라 사막지대는 그 절반도 안된다.
역사를 보면, B.C 2000년대말 베르베르인 토착 유목민들이 이주해 왔다.
B. C 12세기에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교역소를 세웠고, B. C 5세기에 카르타고인들이 대서양 연안에 거점을 만들었다.
카르타고가 로마에 멸망한 뒤, 내륙 베르베르족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주바 2세(B.C 25~A.D 24 재위)의 모로코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이 되었다.
46년 로마는 모로코를 모리타니 속주로 합병시켰고, 이 속주는 로마 통치 후반기에 거의 그리스도교화되었다.
동쪽의 이슬람교도의 침략을 받았으나 740년에 베르베르족이 다마스커스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우마이야 왕조나 압바스 왕조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립을 지켰다.
약 3세기 동안 정복 또는 통치권 이동과 같은 지역간의 전쟁으로 대다수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11세기 중엽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 동맹이 세운 최초의 왕조 알모라비데가 모로코 전역, 사하라 이남,
몇몇 아프리카 지역과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까지 통치했다.
12세기초 또 다른 베르베르족 알모아데 왕조가 알모라비데조(朝)에 반기를 들며 모로코와 이슬람권 스페인 전역을 통치했다.
그들은 13세기에 스페인에서 쫓겨났고, 모로코에서는 1269년 마린 왕조에 패배했다.
15세기 중엽까지 계속된 마린 왕조 동안 모로코에는 이슬람교 신비주의인 수피즘(Sufism)이 발달했다.
마린 왕조 몰락 후 작은 독립국가들로 쪼개졌다가 1550년경부터 1세기 동안 사디 왕조가 통치했다.
15세기 후반부터 모로코에 영구적 발판을 구축하려는 유럽인들의 시도는 대부분 격퇴당했다.
17세기 이후 알라위 왕조의 술탄이 정치, 종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846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침략하고 모로코의 지원을 강제하여 알제리의 지도자 아브델카데르를 잡았다.
영국은 1856년 모로코에서 교역권을 받아냈고, 스페인은 1859년 모로코를 조종해 북아프리카 영토를 확장했다.
1912년 모로코 술탄 모울라이 아브드 알 하피드는 프랑스 보호령을 받아들였다.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었고 탕헤르는 국제관리지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민족주의가 대두했고,
프랑스와 협상 결과 모로코는 1956년 3월 2일에 독립하여 시디 무하마드 술탄이 입헌정부를 수립했다.
탕헤르는 1956년 6월 7일에, 서사하라를 제외한 스페인령은 8월 12일에 모로코왕국에 반환됐다.
술탄 벤 유세프가 모하메드 5세로 등극했다. 1961년 물라이 하산이 아버지를 이어 하산 2세로 즉위했고,
몇 차례 군사혁명으로 의회정부 수립이 늦어졌으나 1977년 선거로 왕의 지지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1970년 중반 모로코는 스페인령 사하라 지역에 35만 자국민을 보내 모로코 영토임을 거듭 주장했다.
1976년 스페인은 알제리 지원의 사하라 게릴라 조직과 모로코가 싸우도록 하고 그 지역에서 철수했다.
1980년대에도 모로코는 스페인령 사하라 지역(현재 서사하라) 개발정책을 계속해 알제리, 모리타니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모로코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지역의 유일한 왕조이다.
모로코는 서비스업, 농업, 광업 기반의 혼합경제로 1인당 국내 총생산이 4억달러를 넘어 아프리카 제1위로 부유한 국가이다.
산유국은 아니지만, 광업과 경공업 등 산업의 균형도 좋다.
모로코 경제의 특징은 총 GDP의 15~20%, 노동인구의 약40% 이상의 농업 부문 성과가 경제 성장에 영향이 크다.
정부 보조를 받아 관개되는 농지는 수출용 감귤류, 포도주, 채소를 생산한다.
주곡인 보리, 밀과 감자의 수확량은 해마다 변동이 심해 국내 수요에도 미치지 못한다.
축산업은 양, 닭 등이 있는데, 양과 소는 생산성이 낮아 우유를 대량 수입한다.
주요 농업지역은 대서양과 지중해 연안으로 밀, 호두, 과일, 쌀, 채소 등이 생산된다.
경지 면적은 국토의 21%이고,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에서 세계 7위 올리브(세계 점유율 3.5%), 9위 사이잘 삼이 주목되며,
세계 점유율 1% 이상은 사탕무(1.9%), 오렌지(1.5%), 대추야자(1.0%), 토마토(1.0%) 등이 있다.
총취업 인구 3%의 수산업은 대서양 해안 어장이 우수하여 일본에도 문어 등이 수출된다.
공업국은 아니나 의류와 식품 등의 경공업 외에, 석유정제와 비료 등의 기초적인 여러 공업이 발달했다.
공업은 인산 비료(생산량 세계 6위), 올리브 기름(9위)이 눈에 띄고, 와인과 육류 등의 식품가공업, 가공무역에 쓰이는 봉제업이 번성한다.
그 외 자동차 조립, 정유, 시멘트 등이 있으나 외국 자본과의 합작회사가 비교적 많다.
섬유공업과 식품가공업은 주로 수출품목을 생산하며, 수공업 중에서 카펫과 가죽 세공은 전통적 수출품이다.
제조업은 GNP의 1/5이며, 노동인구의 1/10이 종사한다.
카사블랑카에 산업시설이 집중되어서 정부는 타 지역의 산업개발을 장려하고 모로코인이 기업 운영권을 갖도록 규정하고 있다.
소규모 기업들이 산업인력 대부분을 고용하여 소비재를 생산하고, 중공업은 주로 수입연료와 원자재에 의존한다.
주요 생산품은 직물, 신발, 타이어, 자동차이다. 광물자원은 아틀라스 산맥의 단층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모로코는 세계 최대의 인산염 수출국으로, 광업 생산은 매장량 세계 1위 인광석(채굴량 세계 2위), 연탄(7위), 코발트광(8위)이 유력하나,
석탄, 철, 동, 아연, 금, 은, 납, 암염, 우라늄 등도 채굴되고, 천연가스도 풍부하다.
원유의 채굴량은 1만톤으로 국내수요의 극히 일부만을 충당한다. 전력생산은 주로 수입 연료에 의존하고 약 1/3을 수력발전으로 충당한다.
주 수출품은 의류, 전기, 케이블, 인광석, 인산염, 농산물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원유, 섬유, 전기기계류 등 자본재, 반제품, 연료, 소비재다.
정부는 늘어나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수입 제한 등을 한다.
유럽연합 여러 나라에 체류, 이주한 자국인의 송금도 외화 수입원이 되고 관광자원도 풍부해 외화수입을 크게 올리고 있다.
모로코는 명목상 왕권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 의회 입헌군주제지만
1999년 왕위에 오른 모하메드 6세가 의회 해산권, 비상사태 선포권 등 모든 실권을 행사해 왔다.
2011년의 헌법 개정에 따라 모하메드 6세 국왕이 군대, 종교에 대한 통제권을 인정받고 국가원수의 지위를 지키는 대신,
현재 국왕이 임명하는 총리는 총선에서 승리한 다수당에서 임명해 정부 대표의 지위를 부여한다.
입법권은 6년 임기로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단원제 의회에 있다. 사법부는 독립되어 있고,
대법원이 최고 사법권을 가지며 왕이 대법원장을 임명한다.
인구는 2018년 기준 3,619만명으로 대부분 아랍화된 베르베르족이고 프랑스인, 스페인인, 베두인 아랍족, 흑인, 유대인 등도 소수 존재한다.
프랑스인과 스페인 사람들은 1956년 모로코 독립 후 현저히 줄었다.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28%를 차지하며, 인구의 60%가 도시에 거주한다.
모로코인들은 베르베르어와 아랍어 중 하나를 구사하며 두 언어 모두 지역에 따라 사투리와 억양이 조금씩 다르다.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고, 베르베르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도 사용된다. 프랑스어가 공공기관, 언론,
식자층 등 1300만명이 사용하는 최대 외국어이고 제1외국어로 가르치며 젊은 층에서 선호한다.
기타 주요 외국어는 북부에서 식민지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스페인어가 있으며, 약간의 포르투갈어 사용자가 있다.
전체 인구의 대부분은 말리키 율법을 따르는 수니파 이슬람교도이고, 극소수 그리스도교도가 있다.
수니파 이슬람교를 국교로 취급하고 있지만, 이슬람 원리주의는 테러리스트들의 사상이라 금지된다.
기독교(로마 카톨릭, 개신교, 베르베르인의 토착 교회)는 소수 종교로 간주되어 차별을 받으며 자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활동도 금지되어 있다.
모로코는 많은 고대의 건축물과 전통적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페스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훌륭한 재래시장 수크, 카라위인 모스크, 차우와라 타레니스(염색공장), 메레니드 묘,
구도시 페스 알발리, 부 줄르드 문 등이 유명하다. 카사블랑카는 하산 2세 모스크, 모하메드 5세 광장, 구 메디나, 왕궁 등이 있으며,
라바트는 하산탑, 전통시장, 왕궁, 하산 2세 무덤 등이 관광지다,
마라케시는 쿠투비아 사원, 제마 엘프나 광장, 사디안 묘, 엘바디 궁전이 유명하고, 메크네스는 밥 만수르 문, 볼루빌리스 로마 유적 등이 볼거리다.
탕헤르의 메디나, 카스바 박물관, 누벨거리와 이프란의 알-아카와인 대학 등도 볼만하며,
볼루 빌리스(고대 로마 유적), 대서양 연안 관광지 에사우이라, 쉐프차우엔(파란색 집들, 하이킹 및 트레킹 장소),
다데스 계곡, 에르크셰비, 최고봉 에벨 투브칼, 아인 디에브 해안가 등도 유명하다.
1981년 이후로 사실상 모병제를 하며 2007년 공식적으로 징병제가 폐지되었다. 모로코의 육군은 아프리카에서 강하다.
육군이 가장 크고, 그 다음으로 공군, 해군 순이다.
국가예산의 약 1/4이 교육에 투자되는데 문자 해득률은 아직 40% 미만이다.
7~13세의 어린이는 의무교육이며 학제는 5년제의 초등학교, 3~4년제의 중등학교와 기술학교, 그리고 그밖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되어 있다.
교통망은 북부와 서부 도시들 간에 잘 발달되어 있고, 내륙부에도 펼쳐져 있어 버스 교통이 발달해 있다.
정부가 철도를 운영한다. 카사블랑카에 국제공항이 있고 탕헤르에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에 다니는 연락선 편이 있다.
카사블랑카의 나라 ‘모로코(Morocco)’는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Morocco’의 ‘아랍어 이름은 ‘al-Mamlakah al-Maghribiyyah’로 ‘Kingdom of the West’의 의미이다.
역사적으로 중세 아랍 역사학자나 지리학자는 모로코를 인근의 역사적 지역들이 ‘al-Maghrib al-Awsat(The Middle West)’
혹은 ‘al-Maghrib al-Adna(The Nearest West)’로 불렸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al-Maghrib al-Aqsa(The Farthest West)’라고 때때로 언급을 했다.
영어 ‘Morocco’는 알모라비데 왕조와 알모아데 칼리프국의 수도인 ‘Marrakesh’가 근원으로
스페인어 ‘Marruecos(마루에코)’의 영어식 표현이다.
‘Marrakesh’의 기원은 논란이 있지만 베르베르어인 ‘amur (n) akush(Land of God)’에서 왔다고 여긴다.
마라케시에 대한 현대 베르베르 이름은 ‘Mṛṛakc’이다. 터키어로 모로코는 ‘Fas’로 알려졌는데 이 말은 고대 수도인 ‘Fes’에서 유래되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집트와 중세 중동부 아랍의 문학에서 모로코의 일반 이름은 ‘Marrakesh’였다.
이 이름은 아직도 아랍 일부 언어에서 쓰인다.
미디어파인
시내에서 다니는 거라서 걸어서 이동한다.
엘 바디 궁전(El Badi Palace) 입구
궁전앞 전경
왜가리
MARRAKESH_El Badi Palace pond
An annex on the northwest side of the palace which contained residential quarters,
possibly for foreign ambassadors
Overall view of the Badi Palace's main courtyard
1578년 포르투갈 왕 세바스찬 1세와 그의 군대는 아프리카로의 영토 확장을 위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은 크사르 엘-케비르에서 모로코 군대와 격전하게 되는데, 이 전투는 ‘삼왕 전투(battle of the Three Kings)'로 알려져 있다.
유혈의 전쟁 결과는 마침내 포르투갈의 패배로 끝났고 전쟁을 일으킨 포르투갈은 지중해 무역권과
막대한 전쟁 보상금까지 모로코 왕국으로 지불하게 되었다.
모로코의 술탄 아흐메드 엘 만수르는 포르투갈과의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궁전 건축을 착수하는데,
이것이 ‘엘 바디(El Badi Palace)’이다. 준공하는데 대략 25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었는지 대충은 짐작이 간다.
그러면서도 궁전의 의미가 ‘비견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라고 하니 궁전의 화려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더욱이 궁전 건축에 사용되었던 비용 역시 포르투갈에 받았던 전승 배상금으로 건축되었다니
엘 바디의 의미는 궁전의 화려함 이상의 가치가 있었으며,
침체되어 있던 이슬람의 강인함을 유럽 세계로 알리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궁전은 현재의 모습으로는 전혀 상상을 할 수 없지만
당시 이슬람 국가 중 가장 강성했던 오스만 트루크 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을 표방하며,
물리적으로 이슬람의 이상적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최고의 장인들을 모집하고,
유리타일, 대리석 기둥, 스투코 조각과 목재 천장 등은 가장 값비싼 재료를 사용하여 궁전을 장식하였다.
더욱이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팀부쿠(Timbuktu)를 비롯한 이탈리아반도의 카라라(Carrara)
그리고 멀게는 인도에서부터 목재, 금, 상아, 오닉스(onyx) 그리고 검은 대리석(black marble)과 흰색대리석(white marble)을 수입해
궁전을 의장했다고 한다.
비록 궁전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유적의 잔해들과 지하 감옥, 마구간 등에 남겨진 젤리즈 타일 조각으로
원래의 화려하고 정교했던 모습들을 추정할 수밖에 없지만, 여전히 인상적인 모습이다.
높게 솟은 성벽은 울퉁불퉁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흉측한 모습으로 무엇인가를 여전히 둘러싸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보다 오히려 폐허의 모습이 당당했던 과거의 시간의 잔해처럼 말해주어 마음속에는 더 와닿는다.
이러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정원의 모습은 넓게 펼쳐진 운동장같이 황량함과 적막감이 돌지만, 한편으로는 고요함이 넘쳐난다.
현재 정원의 일정 부분이 복원되어 조금은 과거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정원이 어찌 나무만 심어 놓는다고 당시의 모습이 연상되려나 하겠지만 가만히 정원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과거의 아름다운 모습이 새록새록 부활한다.
더욱이 최근의 스페인 연구자들에 의해 철저히 고증되어 주변 정자의 모습까지 컴퓨터 그래픽으로 복원되어
그 모습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정원의 규모는 대략 가로 140m, 세로 110m로 모로코에 있는 이슬람 정원의 모습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이다.
정원에는 5개의 수조가 크고 작은 모습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중앙의 수조를 중심으로 녹지가 사분되어 있다.
정원의 형태는 전통적인 페르시아 형식의 사분원을 따르고 있지만, 인도 무굴제국의 궁전 정원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물론 거리상 서로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슬람이라는 한 울타리에서 당시의 유행을 충분히 공유했을 개연성은 상존한다.
스페인의 연구자들은 중정의 모습에서 스페인 안달루시아 중정과
모로코 전통 주거 양식인 리아드(Riad)의 공간구성 방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엘 바디 궁전을 모로코 리아드 디자인의 절정(the pinnacle of riad design)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또 일부 학자들은 알람브라 궁전 사자의 파티오(Patio de Lion)의 디자인 개념을 차용한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정원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여러 문화가 결합되어 조성되는 만큼 특정한 문화가 지배적으로 우세했다고는 예단하기는 힘들고,
기본적으로 이슬람 문화가 각 지역으로 확장되면서 토착문화와 결합하여 새롭게 구성된 정원문화라 생각된다.
따라서 엘바디 궁전의 정원 형태는 전통적인 모로코 주거가 응용된 유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한 해석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원로는 현재 특별히 포장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 모로코의 다른 정원들과 비교할 때 타일이 포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사각형의 대리석 판석과 녹색과 푸른색 계통의 젤리즈 타일을 부착하여 화려하고, 반짝이는 모습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정원을 거닐고 있노라면 마치 반짝이는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효과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2.5m 이상 선큰(sunken) 되어 있는 녹지는 오렌지를 비롯한 귤나무를 식재하여 열매가 맺히는 시기가 되면,
싱그러운 과일 향기와 후각을 자극하고, 노란 오렌지와 녹색의 푸름은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따라서 정원을 거닐 때 느끼는 만족감은 아마도 천상을 거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가운데 길게 늘여진 수로는 대략 90m × 22m 크기로서 물탱크의 저류 기능과 함께
볼트 형식의 벽돌 교각 구조(vaulted brick piers) 위에 건축되어 물을 채우거나 흐름을 조절할 수 있는
인공운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에는 수조의 중심에는 사각 섬이 조성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그 위에 분수가 설치되어 있어 시원한 물줄기를 내뿜으며 주변의 정적인 경관을 좀 더 역동적이고,
다채롭게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측과 서측에 있는 정자 건물(pavilion) 좌우에는 대략 가로 32m, 세로 18m의 규모의 수조가 양측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모두 수영장(pool)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더운 낮 시간 동안 무더위를 피할 수 있는 휴식과 향락의 공간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알람브라 궁전의 ‘도금양 중정’에서와 같이 건물과 하늘이 투영되어 신비스러운 느낌이 들 수도 있도록 하였을 것이다.
더욱이 정자 주변 3면에서 반사된 햇빛은 정자의 내부를 밝히는 조명 역할을 하는데,
일출에서부터 일몰이 되는 시간까지 특별한 조명 시설이 없더라도 반사되는 채광만으로도
어두운 정자 내부를 충분히 밝히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북쪽과 남쪽에 있는 정자는 외벽과 일체 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의 정자 건물은 앞으로 돌출되어 각각 세면이 정원으로 노출되어 있다.
현재 동쪽의 정자는 기초의 유구만 남겨진 상태이며, 서측의 정자는 온전히 정자 건축의 벽체만 남겨져 있다.
동측의 정자는 크리스털 파빌리온이라 부르고, 동측의 정자는 코우바 엘 함시니야(Kubbat el Khamsiniya)라고 부르는데,
정자 건물에 50개의 대리석 기둥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의 정자 건물을 둘러서 기둥이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의 높이가 대략 12m라고 하니 그 위용과 화려함도 내부의 의장 못지않았을 것이다.
건물 내부에는 중요한 연회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연회의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정자 중앙에는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던 분수 유구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정원의 하부구조에서 엔지니어들은 구리 파이프를 사용하여
중앙난방 시스템과 수력을 활용하여 극적인 경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였고,
모든 서비스 공간은 지하에 설치하여 실제 이용자들의 눈에는 거슬리지 않게 하였고,
더욱이 주방에서부터 음식은 기계적인 소형 승강기로 배달했다고 하니,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활용한 궁전임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완공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새로운 왕조가 부흥하여 화려하고 값나가는 보석과
의장들을 모두 떼어다가 새로운 궁을 건설하는데 이용되었다고 하니, 화려하고 강성했던 역사도 새옹지마 같아 안타까움이 있다.
또 일부 호사가들은 엘 바디가 숫자 117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이슬람력으로 엘바디의 준공 해인 1594년(1002AH)에서 물라이 이스마일이 궁전의 장식들을 떼어간 1708년(1119AH) 까지를 환산하면 117이라는 숫자가 나온다고 하니, 놀라기도 하겠다.
세계의 정원에서
'My travel abroad. > Morocco(2020 Feb)'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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