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남은 공산국가 중에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쿠바를 찾는 여행객들은 살사리듬과 이국적인 음식
그리고 카니발 분위기에 매료된다. 이는 진정으로 감각적인 유혹이다
공항에서 14Km를 남쪽으로 내려오면
혁명광장이 나온다.
혁명광장에서 눈에 띄는 그림들
체 게바라의 벽화 오른쪽 건물에 비슷한 디자인으로 세워진 피델 카스트로
혁명 광장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
호세 마르띠는 19세기 쿠바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수필가이다.
서정적이고 간결한 그의 시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고,
신랄하면서도 멋들어진 수필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하나라는 평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가 체 게바라와 같은 반열 혹은 체 게바라를 넘어서서 이를테면 국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쿠바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이기 때문이다.
혁명 광장의 호세 마르티 기념관의 호세 마르티 상
호세 마르티 기념비 앞에 서있는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그의 글이 쓰여져 있다.
김일성대학 출신의 가이드 호세
http://www.cuseko.com/index.php
쿠바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은 기억할 주소다.
혁명광장을 압도하는 두 혁명가.
세계적으로 호응을 얻는 셀카봉
the School of Art & Design at the University of Bedfordshire
Occupy Havana – Mural Workshop For The 99%
Design For Communication Course Leader Noel Douglas has just returned from doing a Mural workshop in Havana, Cuba.
The workshop theme was the key slogan of the Occupy movement the ’99%’ against the ’1%’.
In an intense 4 days working with a great group of artists, designers and students from Havana ideas were mulled over
and the result was this 8 metre high mural painted on the wall of the University of Havana’s Faculty of Arts and Literature
which sits on a busy intersection of roads meaning it is guaranteed a good audience.
The mural was part of the Havana Bienniale
처음으로 쿠바섬에 정착한이 들은 타이노 혹은 치보니라고 알려진 아메리칸 원주민 들이다.
그들은 1942년 10월 27일 크리스토퍼콜럼버스가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평화롭게 살아왔다.
콜럼버스가 쿠바를 하바나의 스페인주지사에 의해 통치되는 스페인의 식민지로 선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않았다.
19세기 동안 수차례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스페인의 지배 하에 실패하고 말았다.
스페인과 미국간에 긴장이 조성되고, 이는 스페인과 미국간의 전쟁을 일으키게 되어 결국 스페인은 쿠바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쿠바는 1902년 독립을 이룬다.
20세기 전반부에 아메리칸 원주민은 섬을 점령하고, 섬을 개발시키지만 동시에 미국은 나라전체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1959년, 나라의 지도자인 풀젠씨오 바티스타는 피델 카스토라가 이끄는 혁명세력에 의해 쫓겨난다.
이는 쿠바와 소비에트 연방간의 동맹으로 이어지고 쿠바는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피델카스트로는 1959년쿠바의 수상이 된다. 2011년 4월 19일, 피델 카스트로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 사임한다.
그는 그 이후 그의 세력을 강화하고, 스스로 역사상 가장 오래 집권한 국가지도자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입법국가주의자로, 그의 승리는 쿠바와 미국인 들의 환영을받는다.
그의 집권 첫해에 카스트로는 국가재건, 국가기반산업강화 및 부패척결 등과 같은 훌륭한 업적을 이뤄낸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채, 아르젠티나 막시스트이자 카스트로의 측근조언자인 어네스토체게바라는 정치적인 신망을 얻어내고
카스트로의 형제인 라울과 가까운 동맹을맺는다.
체와 라울은 함께 카스트로를 설득하여 공산주의자 들과 노선을 같이하여 결국 소비에트연방과 동맹을 이룬다.
게바라는 또한 쿠바 공산주의 지도자인 블라스로카 칼베리오를 혁명정부를 통제하게끔 조종하고, 결국 카스트로를 설득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이런 상황에 만족해하며, 카스트로가 그와 그의 국가를 공산국가로 선포할 경우, 무제한적인 지원을 약속한다.
카스트로가 비록 그의 동맹을 바꾸지는 않았을지라도 미국은 게베라의 역할 및 카스트로와 쿠바공산주의자 간의 관계에 대한 소식을 접한다.
결국 미국은 카스트로와 서서히 적대관계를 이루어, 결국 카스트로를 공산주의노선으로 이끌게 된다.
1960년 3월, 소비에트 연방은 쿠바와 첫번째 원조계약을 체결한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퇴출시킬 계획에 착수한다.
같은 해 말, 쿠바에 대해 무역제한이 체결되면서 이는 카스트로의 쿠바공산주의 선언으로 이어진다.
게베라는 1965년 쿠바를 떠나 1967년 라히게라의 볼리비아군대에 의해 처형된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면서 쿠바는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
카스트로의 인기도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이 일고 쿠바의 원조도 끊긴다.
1990년 대에 이르러 상황은 안정화되고 쿠바는 대다수의 라틴아메리카 국가 들과 경제관계를 맺기시작했으며,
유럽연방과도 관계를 서서히 회복한다. 중국은 새로운 지원국으로 대두되고 베네수엘라나 볼리비아 같은 나라와 새로운 동맹을 맺어 나간다.
2006년 7월 31일, 피델카스트로는 대부분의 그의 임무를 그의 형제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넘긴다.
이는 카스트로가 수술로부터 회복하고 있던 시기였기 떄문이다.
그러나 그는 2006년 12월, 건립 50주년 기념식 및 그의 80세 생일기념행사에도 참석하지못할 만큼 병세가 깊어진다.
그의 불참은 그가 위암말기이며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는 뉴스를 불러일으킨다.
쿠바 고위관련자 들은 그의 상태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하고있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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