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vel abroad./Nepal(2012,Jan)

‘14좌’를 걷다, 신비를 밟다

봉들레르 2012. 7. 7. 08:04

 

‘14좌’를 걷다, 신비를 밟다

웅장한 빙벽의 파노라마 … 유영하는 고래 등처럼 꿈틀
중앙일보ㆍ밀레 공동기획 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① 안나푸르나 <상>

 

week & 이 히말라야를 걷는다. week & 은 아웃도어 업체 '밀레'와 함께 '히말라야 14좌 베이스캠프를 가다' 시리즈를 시작한다. 히말라야 14좌는 해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14개 봉우리를 말한다. 그 14개 봉우리 기슭에 설치된 베이스캠프를 week & 이 모두 갔다 온다. 해발 3500~6000m 지역에 설치되는 베이스캠프는 히말라야 트레킹의 종점이자 히말라야 정상 정복의 시작점이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일반인으로서는 최고의 도전인 셈이다.

 week & 의 이번 기획에는 든든한 동행이 있다. 경남 하동 악양골에서 초막 짓고 차(茶) 덖으며 살고 있는 사진작가 이창수(50)씨다. 그는 week & 과 함께 히말라야를 걸으며 모든 여정을 카메라로 기록할 예정이다. 이씨는 "사람이 있는 히말라야를 카메라에 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week & 의 이번 기획은 한 달에 한 번씩 장장 2년간 연재될 계획이다. 첫 도전은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8091m)다. 국내 언론 최초의 도전을 위해 막 발걸음을 뗀 week & 에 응원을 부탁한다.

히말라야 3대 미봉 중 하나인 마차푸차레 봉우리 위로 별이 총총하다.

네팔 중앙에 솟은 안나푸르나(8091m)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높은 산이다. 하나 아름답기로 치면 첫 손가락에 꼽히는 미봉(美峰)이다. 안나푸르나로 들어가는 관문은 포카라(Pokhara)다. 네팔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전 세계 배낭 여행자의 집결지다. 이곳에서 베이스캠프까지는 약 50km, 걸어서 닷새쯤 걸린다. 베이스캠프 가는 길은 애초 구룽족 마을의 고샅이었다. 실핏줄처럼 이어진 이 길을 따라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지난달 포카라에서 꼬박 5일을 걸어 산악인들이 'ABC'라 부르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로지(산장)에 올랐다.

안나푸르나(네팔)=글 김영주 기자 < humanestjoongang.co.kr > , 사진=이창수(사진작가)

안나푸르나 남봉은 ABC 트레킹의 랜드마크다. 트레킹 도중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은 희운출리로 '눈이 많은 산'이다.

유령처럼 나타난 안나푸르나 남벽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트레킹 중인 용감한 여성 백 패커들. 이들은 단 3일만에 ABC(4130m)까지 올라왔다우기의 안나푸르나 남벽은 유령처럼 나타났다. 지난 6월 6일 동트기 전 ABC 로지는 짙은 산 안개에 갇혀 있었다. 안개로 인해 기압이 뚝 떨어져 고소증세로 밤새 뒤척였다. 뒷머리에 전해지는 묵직한 느낌과 '이렇게 남벽을 못 보고 하산하는구나'라는 아쉬움에 짜증마저 났다.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기 시작한 새벽 4시30분쯤 홀연히 안개가 사라졌다. 곧이어 청록색의 하늘 아래 웅장한 안나푸르나 남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ABC의 세 군데 로지에서 묵고 있던 트레커 20여 명이 일제히 나무 침상에서 튕겨나와 남벽이 보이는 빙하 둔덕에 도열했다.

"행운이네요. 우기 때 파란 하늘은 정말 보기 어려워요. 하늘이 가장 맑은 가을에 와도 못 보고 내려가는 트레커가 부지기수죠."

한국의 가구 공장에서 6년을 일해 우리말에 능숙한 트레킹 가이드 크리슈나(31)가 아침 인사를 건넸다.

ABC 로지는 천혜의 전망대다. 북쪽으로 안나푸르나를 비롯해 시계 방향으로 싱구출리(6501m)·타르푸출리(5695m)·간다르바출리(6248m)·마차푸차레(6997m)·히운출리(6434m)·안나푸르나 남봉(7219m)이 어깨를 맞대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둔덕 끝에 앉아 봉우리의 생김새와 이름을 되뇌다 분에 겨운 감상에 빠졌다. 안나푸르나 산군(山群)은 네팔에서 비가 가장 많이 오는 지역이다. 다른 산악지역은 밀이나 귀리 농사가 전부지만 이곳은 논농사가 성해 네팔 고산족의 주식인 쌀을 생산한다. 안나푸르나는 '수확의 여신'이다.

ABC의 케른. 옆으로 수많은 추모탑이 자리하고 있다.싱구출리는 영어로 '플루티드 피크(Fluted Peak)'라고 불린다. '파이프 오르간처럼 늘어뜨린 빙하'란 뜻이다. 타르푸출리는 고래의 머리처럼 솟았는데, 이방인은 '텐트 피크(Tent Peak)'라 부른다. 히말라야 3대 미봉 중 하나인 마차푸차레는 남쪽에서 보면 물고기 꼬리 모양을 하고 있어 '피시 테일(Fish Tail)'이다. 네팔 말로 '출리'는 산이다. '히운'은 '히말'처럼 눈을 의미한다. 그래서 히운출리는 '눈이 넘치는 산'이다. 이름처럼 히운출리 남벽과 북벽의 눈사태는 악명이 높다.

반면에 안나푸르나 남봉은 별다른 이름이 없다. 그냥 남쪽 봉우리(Mt. Annapurna South)다. 하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없어도 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로 충분히 압도적이다. 안나푸르나 주봉에 비해 높이는 낮아도 산세는 위용이 넘친다. 안나푸르나 주봉이 여성적이라면 남봉은 '남자의 봉우리'라 할 수 있다.

밤새 고소증세로 시달린 탓에 멍한 상태에서 올려다본 히말라야의 연봉은 마치 유영하는 고래 등처럼 꿈틀거렸다. 광각렌즈 안으로 들어오는 연봉은 더 들쭉날쭉했다. 잦은 비로 인해 로지 옆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는데, 이 안으로 안나푸르나 산군의 봉우리가 모두 들어왔다. 신묘한 장면이었다.

신의 거처로 가는 길

촘롱(2170m) 마을의 돌계단. 트레킹 도중 만나는 구룽족 마을의 모든 길은 판석이 깔려 있다.ABC 가는 길은 모노 트레일(Mono Trail), 즉 외길이다. 출발 지점은 서너 군데 되지만, 이틀 정도 걸어 해발 2000m 지역에 당도하면 길은 하나로 합쳐진다. 트레킹 일정에 따라 트레킹 전략은 달리 짤 수 있다. 가장 일반적인 코스가 포카라에서 ABC까지 5일 코스다. 포카라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페디(1130m)에서 시작해 포타나(1950m)~지누(1780m)~뱀부(2310m)~데우랄리(3200m)~ABC 로지(4130m) 여정이다. 트레커 대부분이 50대 이상인 한국인들은 상대적으로 무리가 덜 가는 이 코스를 애용한다.

그러나 사흘 만에 ABC까지 올라오는 겁 없는 백패커도 있다. 실제로 ABC 로지에서 3일 만에 올라왔다는 20대 한국인 여성 3명을 만났다. 이들은 각자 네팔로 배낭여행을 왔다가 포카라 트레킹정보센터에서 만나 의기투합해 안나푸르나까지 오르게 됐다고 했다. 5일 여정을 3일 만에 오르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해발 800m에서 4130m까지 3일 만에 오르다 보면 열에 아홉은 고소 증세로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들은 말짱한 표정이었다. 알고 봤더니 안압 저하제인 다이아막스(Diamox)를 먹고 올랐다고 했다. 고산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약품이다.

반면에 5일 여정의 트레킹은 고소 증세를 피할 수 있다. 하루 평균 10km, 5~6시간 정도 천천히 걷기 때문이다. 난이도도 무난한 편. 1주일 정도 지리산을 종주한 느낌이랄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눈 덮인 히말라야가 펼쳐질 것 같지만, 주위 풍경은 의외로 단조롭다. 데우랄리까지는 나흘 내내 정글 속을 걸어야 한다. 가끔 얼굴을 내미는 마차푸차레만이 여기가 히말라야임을 알려준다. 데우랄리부터 ABC까지는 빙하 둔덕으로 잡풀이 우거져 바닥이 푹신하다.

잠은 로지에서 잔다. 트레일이 통과하는 마을마다 방 6개짜리 로지가 있으며, 네팔 음식을 비롯해 한국 음식과 양식을 판다. 로지 간판에 '한국 김치찌개 합니다'라고 써놓은 집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루에 얼마나 걸어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시작은 '6·7·8'이다. 오전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이다. 우기 때는 한 시간 정도 빨리 가는 게 좋다. 해가 일찍 뜨기도 하거니와, 오후에는 어김없이 장대비가 쏟아진다.

ABC에서 하산하는 길은 사흘이면 된다. 지누의 천연 온천에서 피로도 풀고, 염소 고기로 조촐한 파티를 열 수도 있다. 트레킹을 도와준 스태프와 한자리에 모여 회포도 풀 수 있는 자리다.

안나푸르나에 묻은 추억

해발 4000m 지점에서 휴식하고 있는 트레커들.안나푸르나는 유난히 한국인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1999년 한국인 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故) 지현옥 대장이 북면으로 하산하다가 실종됐다. 지난해 10월 18일에는 고(故) 박영석 대장 일행이 하산 도중 남벽 아래에서 실종됐다. 안나푸르나를 바라보는 건 박 대장을 기억하는 사람에겐 힘든 일이었다.

닷새 만에 도착한 ABC의 빙하 둔덕 옆으로 케른(티베트 불교의 돌탑)이 수십 기 있었다. 안나푸르나에 잠든 영혼을 기리는 추모탑이다. 케른 옆에 앉아 한참이나 박 대장 일행이 잠들어 있을 빙하를 바라봤다. 산에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은 남아 있는 사람을 깊은 회한에 빠지게 한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을 떠올리며 안나푸르나의 기막힌 해돋이를 맞았다. 해발 4130m의 아침 공기 사이로 내리쬐는 한 줌 볕은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우리 일행이 묵은 안나푸르나 로지 벽면에는 박 대장과 함께 실종된 신동민·강기석 대원과 오희준·이현조(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망) 대원 5명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이들 5명의 운명을 지켜본 사진작가 이한구(44)씨가 찍은 사진이다. 하회탈처럼 웃고 있는 한국 산악인 5명은 이제 안나푸르나의 전설이 돼 있었다.

안나푸르나 입산 정보=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는 200㎞ 거리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면 30분 거리지만 자동차로 이동하면 한나절 걸린다. 워낙 길이 험해서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려면 일단 허가를 받아야 한다. 포카라 시내에 있는 안나푸르나 보존구역사무소(ACAP)에서 트레킹 허가와 트레커정보관리시스템(TIMS) 카드를 받아야 한다. 보통 트레킹 에이전시를 통해 발급받지만, 개인 여행자의 경우 ACAP에서 직접 받을 수 있다. 단체 여행객은 파란색 카드, 개인 여행자는 녹색 카드를 받는다. 녹색 카드 여행자는 포터·가이드 등을 고용할 수 없으며, 직접 짐을 지고 가야 한다. 우기 때는 위험 요소가 많아 가급적 포터나 가이드를 고용하는 게 좋다. 안나푸르나 입산료는 2000루피(약 25달러·약 3만원)다. 포카라 ACAP 사무소 977-61-431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