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vel plan abroad/중앙아시아

인도 시킴(Sikkim)

봉들레르 2013. 11. 8. 19:33

 

 <부탄&시킴 해피트레킹> 전 코스 개념도

  <시킴 칸첸중가 및 히말라야 조망 트레킹> 개념도

 '히말라야의 선물' 다르질링에서

다르질링에서 본 설산

 

시킴은?

히말라야(티벳, 부탄 등)에 탄트라 불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는 시킴 지역을 '이율드레마종'이라 칭했습니다.

시킴은 오래전부터 '숨겨진 보석, 과일과 꽃의 땅'이라 불린 고결한 대지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티벳에서 불교의 쇠퇴를 예언하였고, 티벳에서 불교가 쇠퇴하면 이곳에서 번창하리라 예언하여,

불가(佛家)에서 시킴은 '약속의 땅'이기도 하였습니다.

골짜기와 능선 곳곳에 성스러움과 옛스러움이 그대로 보존된 시킴은 '해탈의 성자' 히말라야를 친구로 두어 더욱 빛납니다.

시킴은 트레킹의 메카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사방에서 네팔 히말라야, 티벳 고원, 부탄 히말라야가 시킴을 감아쥐고 있어 어느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뎌도 멋진 트레킹이 됩니다.

특히 칸첸중가를 찾아가는 '욕섬∼게차라' 트레킹은 시킴을 대표하는 트레킹으로서 히말라야로 찾아 들어가는 '심연의 합장'으로 불립니다.

다르질링은?  (인도의 다즐링, 중국의 기문, 스리랑카의 우바는 세계 3대 홍차)

인도의 다르질링은 히말라야가 준 선물입니다.

2,500m의 고원지대로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따사로운 햇빛과 어우러진 파라다이스입니다.

더불어 신의 거처, 히말라야 설산이 보이는 멋진 조망도 갖고 있어서 휴식과 힐링의 대지로 불립니다.

시킴 히말라야, 티벳고원, 부탄 히말라야가 만든 역삼각형의 시킴계곡은 남쪽으로

인도의 광활한 저지대로 이어지는데 두 대지를 잇는 지점에 다르질링이 있습니다.

그런 지형적 요인으로 히말라야와 저지대의 윤습한 삼림, 중간지대의 청량함을 모두 갖춘 땅입니다.

다르질링의 일출은 유명합니다.

 칸첸중가의 힌 봉우리가 붉게 채색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인도인들은 자연과의 영적 교감과 정신적 안위를 찾습니다.

이런 이유로 다르질링으로 떠나는 여행은 모든 인도인의 로망이기도 합니다. 다르질링의 매력은 현대에도 이어집니다.

영국은 대단위 차 농장을 개발해 홍차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또 초기 히말라야 탐험시대엔 히말라야로 떠나는 기지 역활도 했습니다.

최초의 등산학교도, 히말라야협회도 다르질링에 있었고

텐징 노르게이도 다르질링역에서 짐을 나르던 꾸리의 삶에서 시작해 세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시킴 트레킹은?

시킴은 부탄과 함께 티벳의 영향을 받은 불교 소왕국이었습니다.

부처도 북인도 소왕국의 왕자였고 히말라야로 수행 출가를 하였으니

시킴이 아니라도 인도대륙에서 히말라야와 맞닿은 땅은 신성의 대지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말라야에선 인도대륙을 적시는 갠지스, 인더스가 발원하고 그 덕에 문명과 사상과 종교가 잉태했으니

히말라야는 모든 창조의 근원이고 존재의 에너지입니다.

히말라야에 자리잡은 시킴은 서로는 네팔 히말라야. 북으로는 티벳 고원, 동쪽으로는 부탄 히말라야에 접해서

 삼면이 히말라야에 포위된 모습이고 남으로는 벵갈의 열대 저지대로 이어져 겨우 숨통이 트인 모습입니다.

부탄과 시킴은 같은 역사의 흐름을 유지했으나 시킴은 부탄보다 네팔에 가까이 위치한 이유로

 네팔의 침공을 받고 그 결과로 영국의 보호를 받다가 인도 독립과 함께 소왕국으로 돌아가 1975년까지 유지했으나

인도·중국 국경분쟁을 겪은 후 자발적으로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었습니다.

인구 구성에서도 영국 통치시대 대단위 농장을 개발하면서 노동자로 대거 이주한 네팔인들이 7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은 시킴의 성격을 크게 각인해, 부탄과 함께 은둔의 불교왕국이었으나

이제 개방과 은둔의 양면성을 띤 독특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몇 개 도시를 제외하면 외국인은 허가를 받아야 방문이나 트레킹이 가능합니다.

그런 면에서 부탄과 동일하지만 부탄만큼 엄격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킴은 활발한 자연여행의 메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시킴 트레킹은 셋으로 나뉩니다.
우선 다르질링(Darjeeling). 반일(半日) 트레킹으로, 칸첸중가를 조망하는 최고의 전망대 타이거 힐 조망 트레킹,

세계 최고의 홍차 밭을 걷는 힐링 트레킹입니다.
다음은 시킴 히말라야 조망 트레킹으로 3일간 트레킹과 텐트 1박입니다.

티벳과 시킴의 경계선상이며 히말라야 자락에 자리한 쏭고호수 명상 트레킹,

히말라야 자락의 윤습(潤濕)하고 조망이 수려한 매남라 트레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루의 텐트생활로 히말라야 자연 트레킹의 맛을 볼 수 있어, 게차라 트레킹이 부담스런 분들도 무리없이 도전할 만합니다.
끝으로 칸첸중가 트레킹. 8일간의 트레킹으로, 칸첸중가 최고의 조망 포인트인 게차라(Goechala. 4,940m)까지의 정통 왕복 트레킹입니다

 

*시킴(Sikkim)

시킴 주(Sikkim)는 원래 네팔과 부탄 사이에 있던 나라였으며 1975년에 인도 합병되었다.
주도는 강토크이다.


A. 위치 : 인도 동북부

B. 인구 : 608,288명(2006)  
주도(州都)는 강토크(Gangtok)이다. 북동쪽으로는 중국에 접하고, 남동쪽으로는 부탄에,
서쪽으로는 네팔에, 남쪽으로는 인도의 서(西)벵골주와 접한다. 중국과의 국경에는 빙설(氷雪)의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 놓여 있고, 또 중국과는 나툴라․젤레플라 등 두 개의 고개를 거쳐 연결되고 있다.


시킴에는 세계 제3의 고봉을 이루는 칸첸중가산(8,603m)을 비롯하여 7,000m 이상의 고봉이 줄지어
솟아 있어 대부분이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삼림지대(森林地帶)는
열대성․온대성․냉온대성으로 변화하여 지역 전체가 일대 식물원의 경관을 이루고 있다.


히말라야산맥의 남쪽에 위치하여 계절풍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6~9월에는 매일같이 비가 내린다.
따라서 해발고도 1,200m 이하에서는 울창한 열대성 삼림을 이루고, 높이 올라갈수록 온대림․냉대림으로
변하며 삼림한계 부근에는 석남화(石南花)가 밀생(密生)한다.


해발고도 3,700m부터는 고산대를 이루어 설선(雪線)도 비교적 낮아서 5,000m 정도이다. 농작물은 쌀을
비롯하여 옥수수․두류․피․맥류 등 외에 오렌지․육계(肉桂) 등 열대성작물을 산출한다. 공업은 수직면포 등에
불과하다. 구리광산이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아직은 미개발 상태에 있다.


C. 강토크(Gangtok: 힌디어와 네팔어)는 시킴 주의 주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히말라야 산맥 해발 약 1700m에 자리잡고 있으며, 날씨는 연중 온화한 날씨가 계속되는 편이다. 1975년
군주제가 폐지되고, 시킴이 인도의 22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강토크는 이 지역의 주도로 지정되었다.


D. 시킴의 주민․종교
주민의 2/3는 네팔인(人)이며, 나머지 1/3은 티베트계(系)의 보티아족(族)과 렙차족이 차지하고 있다.
렙차족의 기원은 인도차이나 민족과 동일하다고 한다. 종교적으로 네팔인은 힌두교를 신봉하고 있으나,
보티아족과 렙차족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따라서 산정(山頂)에는 불교사원이 세워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밖에 상당수의 티베트인도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은 티베트버마어계에 속하는 렙차어를 사용한다.

E. 시킴의 역사․정치
역사적으로는 티베트계의 번왕(藩王)의 통치하에 놓여 있다. 17세기 전반 그들 조상은 티베트에서 군대를
이끌고 시킴의 렙차족 지배자를 격파하고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2번이나 네팔의 구르카 왕조에게 침입당하였다. 1816년 이래 영국과 접촉해 오다가 1835년에는 다질링,
1849년에는 시킴령(領)의 타라이(히말라야의 삼각부)와 티스타강(江) 하류부가 영국령이 되었다.


청(淸)나라는 북부 시킴을 자국(自國)의 속령이라고 주장하였으나, 1890년에는 결국 전역을 영국령 인도의
보호하에 둘 것을 승인하였다. 1947년 8월 인도의 독립과 함께 시킴에 대한 영국의 지상권(至上權)은
소멸하였다. 동시에 현상거치협정(現狀据置協定)이 인도와 시킴과의 사이에 체결되어 인도는 시킴의 외교․
통신 및 국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1950년 12월 5일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시킴은 정식으로 인도의 보호령이 되었다. 다시 1953년에는 5명의
선출 멤버 와 4명의 지명 멤버로 구성된 국가심의회(國家審議會)가 설치되어 번왕 정치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1960년에 이르러 중국과 인도 간의 외교관계가 냉각됨에 따라 국제정치의 초점이 되었으나,
1974년 인도의 준주(準州)가 되었다가 1975년에 주(州)로 승격되었